영국 옥스퍼드대 카르틱 라만나 교수

영국이 국내 2위의 시설관리·건설업체인 카릴리언(Carillion) 파산으로 휘청이고 있다. 수십억파운드 가치의 회사가 붕괴한 것은 기업회계가 사실상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드러냈다.

이른바 글로벌 회계법인 빅4, 즉 딜로이트와 EY, KPMG, PwC는 카릴리언에 회계감사 또는 비회계 서비스를 제공하며 수천만파운드를 청구했다. 거액을 내고 빅4 회계법인의 서비스를 받은 기업이었지만 재무보고서 어느 곳에도 파산은 예고되지 않았다.

물론 카릴리언 파산이 새로운 뉴스는 아니다. 기업회계와 관련한 '야바위' 사례는 이전에도 여러번 있었다. 2001~2002년 엔론과 월드컴의 붕괴, 2008~2009년 미국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인 경제의 침몰이 그렇다.

엔론이 전통의 회계법인 아서앤더슨을 끌어내린 후 새로운 규제가 신설됐다. 기업회계와 지배구조 개선을 목적으로 했다. 하지만 15년여가 지난 현재 전 세계는 여전히 그같은 병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영국 옥스퍼드대 블라바트닉 행정대학원 교수인 카르틱 라만나가 신랄히 비판했다. 라만나 교수는 18일 영국 정책연구센터(CPS)가 운영하는 온라인매체 CapX 기고문에서 "현대 회계감사 시장은 제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다"며 "문제의 핵심인 빅4 회계법인을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라만나 교수는 오늘날 기업회계 시장에 적어도 7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른바 '회계업계의 7가지 죄악'이라고 칭했다.

첫째 회계감사 시장은 가두리 양식장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회사들은 회계보고를 의무적으로 해야 한다. 회계업계 전반적으로 질적 경쟁을 벌일 이유가 없다는 것. 라만나 교수는 "이들에게 기업이란 잡아놓은 물고기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둘째 회계감사란 밋밋한 상품이다. 질감이나 뉘앙스가 거의 없이 대동소이하다. 회계사들은 대개 '본 것에 기초해 보면 눈에 띄게 잘못된 점은 없다'는 결론을 내린다. 시사회를 마친 영화비평가들이 '그다지 나쁘지 않다'고 평하는 것과 비슷하다. 모든 영화비평이 그와 같다면, 영화비평이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회계감사도 마찬가지라는 게 라만나 교수의 주장이다.

셋째 회계법인을 고르는 주체는 회계보고서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다. 회계 대상 경영진 또는 이사회가 고른다. 경영진이나 이사회는 내부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잘못된 점을 왜곡하거나 감추고자 하는 동기를 갖고 있다. 회계보고서를 절실히 원하는 측은 해당 기업의 고객이나 거래처 회사, 투자자, 금융권 등이다. 수많은 기업들이 잘못된 회계보고서를 근거로 카릴리언과 함께 사업을 벌였다. 하지만 이들은 카릴리언을 회계감사할 법인을 선정할 권한이 없었다.

넷째 사실상 과점시장이라는 점이다. 포춘지 선정 500대 회사 등 주요 기업의 경우 회계법인은 사실상 단 4곳으로 한정된다. 흔히 '회계란 복잡하다. 때문에 규모의 경제가 필요하다'는 등의 이유를 댄다. 하지만 기업과 관련한 법무서비스 역시 복잡하다. 하지만 수없이 많은 대형 로펌이 경쟁한다. 과점의 변명이 되지 않는다.

게다가 단 4개의 회계법인이 시장을 좌우한다는 의미는, 규제당국이 이들에게 책임을 추궁하기를 꺼린다는 뜻도 된다. 앤론의 파산으로 아서앤더슨까지 붕괴했을 때 규제당국은 빅5를 빅4로 줄여 과점시장을 더 망쳤다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KPMG는 2005년 탈세기업에게 보호처를 제공한 혐의를 받았다. 면허가 취소될 수 있는 중범죄였다. 하지만 '기소유예약정'이라는 솜방망이 처벌에 그쳤다. 빅4가 빅3로 줄어들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라만나 교수는 "많은 이들은 빅4 회계법인에 대해 '너무 과점이라 망하게 내버려 둘 수 없다'(too few to fail)고 한탄한다"고 지적했다.

다섯째 규모가 크든 작든 회계업계 전반에 '이해상충'과 '윤리적 타락'이 만연하다. 최근 보고서에 따르면 회계법인 41%에서 윤리적 일탈 우려가 제기됐다. 청렴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는 회계업계에서 41%의 회사가 도덕적 의심을 받는다는 건 충격이다. 이유는 명백하다. 비회계 서비스 시장의 높은 수익률 때문이다. 빅4를 포함한 많은 회계법인은 기업컨설팅과 같은 비회계 서비스 상품을 팔면서 많은 돈을 벌어들인다. 이제는 회계 부문보다 더 큰 이익을 내기 시작했다. 회계법인의 존재 이유, 즉 건전한 기업회계 유도는 말잔치에 그칠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라만나 교수는 "비회계 서비스 제공을 넘어 빅4 회계법인의 윤리성에 이상한 신호가 감지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최근 영국 법무부는 KPMG 전 직원들에 대해 기소했다. 자사에 대한 규제당국의 조사 계획을 사전에 불법적으로 입수한 혐의와 관련된 사건이다. 혐의를 받는 KPMG 전직 간부는 "관련된 공인회계사들은 말 그대로 시험지를 훔친 것"이라며 "부적절한 회계감사를 감독하는 규제당국을 훼방 놓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라만나 교수는 "KPMG의 모든 임직원이 연루되지는 않았다고 해도 KPMG의 기업문화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주는 사건"이라고 꼬집었다.

여섯째 빅4 회계법인이 정치적으로 강력하다는 점이다. 거대규모와 시장지배력 덕분이다. 회계산업의 전반적 룰을 정하는 것도 이들이다. 예를 들어 빅4는 국제회계규칙 제정작업을 감독하는 기구에 가장 큰 재정적 후원을 하고 있다. 규제기관과는 '회전문 인사'를 통해 서로 인력을 교환한다. 빅4 임원들은 종종 안식년 휴가를 받아 규제당국으로 들어갔다가 복귀한다. 앞서 KPMG 사건에서 '시험지를 훔친' 혐의를 받은 한 중역은 규제기관의 한 감독자에게 "당신이 받는 돈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기억하라"고 경고한 사실이 발각되기도 했다.

일곱째 회계법인 소속 범죄 연루자에게 중한 처벌이 내려지는 일은 극히 예외적이다. KPMG 전직 직원들의 기소는 매우 이례적이었다. 종종 사법당국은 불법 회계법인을 처벌하지 않는다. 회계사들이 '전문적 판단'이라는 명분 뒤에 숨고, 배심원단은 전문가들의 판단을 자세히 따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회계와 감사의 규칙을 정하는 막강한 힘을 통해 회계법인들은 책임에서 면제되는 법규정을 다수 만들고 있다. 특히 고객기업의 경영적 판단을 방패 삼아 숨는 경우가 많다. 그같은 판단은 본질적으로 증명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시당초 왜 고객기업의 경영적 판단을 고려하도록 법적으로 허용했는가 하는 질문이 드는 대목이다.

이에 대해 라만나 교수는 "사실상 회계업계는 이익은 사적으로 취하고 위험요소는 공적으로 나누는 시스템을 꾀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회계업계 전반이 부패하다면 회계감사를 아예 없애는 게 낫지 않느냐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라만나 교수는 "자본시장엔 회계감사가 필요하다"며 "그렇지 않다면 현재보다 더 엉망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1920년대 기업 회계관행은 제멋대로였다"며 "1929년 증시붕괴와 뒤 이은 대공황은 주먹구구 기업회계와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설명했다.

그렇다면 회계업계의 문제점을 어떻게 고쳐야 할까. 라만나 교수는 손쉬운 해결책이 없다는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회계관행 개혁은 눈이 말똥말똥한, 의식 있는 환자의 뇌를 수술하는 것처럼 어렵고 복잡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유력한 해결책은 빅4를 해체하고 소규모 회계법인으로 쪼개는 일"이라며 "1982년 미국전신전화회사(AT&T)가 의회의 결정으로 해체된 사례가 있다. 약 60년간 상업은행과 투자은행을 엄격히 분리한 글래스-스티걸법처럼, 회계법인도 회계와 비회계 서비스의 엄격한 구분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라만나 교수는 기업회계시장을 개혁하려 한다면, 회계법인 자체를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2002년 엔론사 도산 이후 미국 의회는 회계감사와 관련한 새로운 법규정을 만들었다. 하지만 그 결과 나온 규제안은 종종 경멸적으로 조롱 받는 '회계 완전고용 법'이었다. 라만나 교수는 "회계법인에 보다 많은 일감 보다 많은 수수료를 보장하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며 "오늘날 회계감사 시장 개혁이 매우 복잡한 과정임을 고려하면 각국 정부는 또 다시 회계기업들에게 지원요청을 하려는 유혹에 빠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야기한 금융인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스스로를 구제금융한 것이었다"며 "회계인들이 스스로 개혁할 것을 믿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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