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녹영 대한상의 지속가능전략실장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쓴다"는 옛말이 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돈을 벌더라도 번 돈을 보람 있게 쓴다는 뜻이다. 얼마 전까지 우리 사회에서 열심히 일해서 부를 축적하는 것에 대한 긍정적인 의미로 사용해 왔다.

최근 국내외적으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에 대한 이행 요구가 강화되면서 앞으로는 더 이상 수단과 방법을 생각하지 않고 돈을 벌기는 어려운 시대가 됐다. 그동안 기업이 돈을 어떻게 버는지와 상관없이 사회공헌 등으로 정승같이 쓴다면 별 문제 없었고, 기업에게 CSR은 선택의 문제였다. 하지만 이젠 CSR이 글로벌 비즈니스에서 필수요소가 되고 있으며, CSR의 영역도 사회공헌을 넘어 여러 분야와 방식으로 확산되고 있다.

지난해 여러 기업이 대한상의 지속가능경영원으로 문의를 해왔다. 해외에서 갑작스런 CSR 평가 요구로 대응에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 우리 기관에서 조사한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자 한다.

사회적 책임 이행요구 강화

가구업체 A사는 2017년 미국 유통회사에 납품을 준비하던 중 CSR 평가를 요청 받았다. 하지만 외국인 근로자 숙소의 안전 문제로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납품을 포기해야 했다. 의류기업 B사는 미국과 유럽 바이어로부터 윤리적 제조 인증 프로그램(WRAP) 갱신 요구를 받았는데 비용 문제로 중단해야 했다. 결국 이들 바이어와의 거래는 끊기고 말았다.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둔 C사는 최근 공장 부지에 수천만 원을 들여 기도시설을 세웠다. 글로벌 고객사가 근로자의 종교적, 문화적 특성을 배려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위 사례는 어떠한 시사점을 주는 걸까? 필자가 보기에는 첫째, CSR이 우리기업의 수출에 직접 영향을 미칠 수 있다. 또 그동안 좋은 품질과 가격 경쟁력이 있으면 수출에 문제없었지만 이젠 제품을 제조하는 방법과 과정도 신경 써야 한다.

지난해 말 우리 기관이 발표한 '수출기업의 CSR리스크 실태조사'에 따르면 응답 기업의 절반 이상(54%)이 글로벌 고객사에 수출·납품 과정에서 CSR 평가를 요구 받았다. 평가 받은 기업 5곳 중 1곳(19.1%)은 이를 통과하지 못해 수출에 타격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평가 분야가 '환경' '안전·보건' '노동' '인권' '윤리' '공급망 CSR관리' '지배구조' '분쟁광물' 순으로 나타난 것을 고려하면 제조 방법과 과정도 건전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둘째, 대기업의 영역, 그리고 자발적 실천 영역으로 인식되던 CSR이 이젠 중소기업을 포함한 모든 기업이 이행해야 하는 필수 영역이 되었다.

글로벌 기업들이 CSR 관리 범위를 1·2차 협력사까지 확대하면서 중소기업도 자연스럽게 CSR을 이행해야 한다. 글로벌 CSR 규범도 강화되고 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영국의 '현대판 노예방지법(노동·인권)' 프랑스의 '기업책임법(인권)' 미국 '도트프랭크법(분쟁광물)' 등 관련법이 제정되고 기업 반부패, 지배구조 등의 규범도 강화되고 있다. 또 최근 체결된 국가간 투자협정 네 개 중 세 개 이상에서 환경, 노동, 인권, 반부패와 같은 CSR 관련 규정을 발견할 수 있다. 기업의 CSR 이행이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인 흐름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중소기업에 정책적 지원 필요

셋째, 정부의 정책적 지원과 관심이 필요하다. 개별 기업만의 노력으로는 한계가 있다. 특히 중소기업은 CSR에 대한 이해와 이행에 필요한 정보와 능력이 부족하다. 우리 기관이 조사한 결과를 보면 기업들은 정부의 정책지원으로 컨설팅과 교육 제공(56.3%), 필요한 정보 공유(50.8%), 인증·심사 등 비용 지원(45.2%), CSR 인증제도 신설 및 해외인증과 상호인정(39.7%), CSR 우수기업 인센티브 제공(38.9%) 등을 꼽았다. 정부가 관련 국제규범과 동향 정보를 제공하여 기업의 인식 확산을 유도하고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CSR 관리와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기업들의 자발적인 관심과 기업 눈높이에 맞는 정부 지원을 통해 "정승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는 기업"이 많이 나올 수 있게 되길 기대한다.

김녹영 대한상의 지속가능전략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