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 소송자격 사라져, 론스타 이어 현대증권 사건 패소확정 … 다중대표소송 필요성

옛 현대증권(현 KB증권) 소액주주들이 자사주를 헐값에 매각 결정한 현대증권 이사들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지만 법원이 끝내 소액주주들의 권리를 외면했다.

현대증권이 KB증권에 합병되면서 소액주주들의 주식은 강제로 KB금융 주식으로 교환됐는데, 현대증권 주식을 보유하지 않아서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는 게 법원의 판단이다.


따라서 소액주주들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하더라도 기업들이 합병을 통해 해당 주식을 없애버리면 책임을 묻기 어렵게 되는 제도적 허점이 그대로 유지되게 됐다.

대법원 2부(주심 김상환 대법관)는 현대증권 노동조합과 이 모씨 등 소액주주 18명이 윤경은 전 현대증권 대표이사 등 이사들을 상대로 제기한 주주대표소송 상고심에서 원고 패소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고 15일 밝혔다.

소액주주들은 현대증권이 KB금융지주에 매각된 2016년 5월 이후 현대증권 이사회가 회사의 자사주를 헐값(주당 6410원)에 KB금융지주로 넘기는 결정을 내리자 당시 이사들의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주주대표소송은 회사가 이사들의 잘못에 책임을 묻지 않을 때 주주들이 나서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대법원은 1·2심과 마찬가지로 헐값매각 여부를 판단하지 않은 채 '원고자격이 없다'며 패소 판결했다. 현대증권 주주들은 소송이 진행 중에 현대증권과 KB금융지주의 포괄적 주식교환으로 현대증권 주식을 사실상 보유하지 않게 됐고 법원은 '주식이 없으면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주주들은 자발적인 주식매도와는 차이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주주대표소송 제도의 발원지인 미국에서는 비자발적인 주식교환의 경우 예외적으로 원고의 자격을 인정해주고 있다. 알라바마주 대법원은 1989년 현대증권과 같은 사건에서 소액주주들의 주주지위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다.

미국 렉싱턴사 주주들은 1985년 회사에 손해를 입힌 임원과 이사들을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했다. 하지만 소송이 진행되던 중 렉싱턴사가 콜로니얼사에 흡수합병되면서 렉싱턴 주주들의 주식은 콜로니얼 주식으로 교환됐다. 주식이 없어졌지만 알리바마주 대법원은 "강제적으로 주주지위를 박탈당한 원고들의 원고적격을 부정한다면, 주주대표소송 자체를 단지 다른 법인과의 합병을 통해 무력화시키는 결과를 야기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금융권의 한 변호사는 "대법원이 '주식이 없으면 자격이 없다'는 기계적인 판단만으로 사건의 실체를 엄밀히 따지지 않고 내린 결론"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은 사건이 상고된 지 1년 넘게 심리를 진행했지만 2013년 신세계 주주대표소송 판결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옛 외환은행 소액주주들이 미국계 사모펀드인 론스타를 상대로 주주대표소송을 제기한 사건도 마찬가지다. 대법원은 지난해 11월 '원고자격이 없다'며 소액주주들의 패소를 확정했다.

소액주주들은 론스타가 은산분리 규정을 위반해 주식을 초과 인수하고 배당금과 차익을 챙기는 과정에서 외환은행에 손해가 발생했다며 외환은행 이사 등을 상대로 3조원대의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대법원은 "대표소송을 제기한 주주가 소송의 계속 중에 주식을 전혀 보유하지 않게 돼 주주 지위를 상실하면 원고적격(소송을 제기할 당사자 자격)을 상실해 그가 제기한 소는 부적법하게 된다"며 "이는 주주가 자신의 의사에 반해 주주의 지위를 상실했다고 달리 볼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소액주주들을 대리해 현대증권 소송을 제기한 박필서 법무법인 한누리 변호사는 "법원이 원고적격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회에 계류 중인 다중대표소송의 필요성이 더 커졌다"고 말했다.

다중대표소송제도가 도입되면 모회사의 주주는 자회사 또는 손자회사 임원들의 불법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다중대표소송제 등의 도입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해당 법률은 2017년 11월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소위에서 논의된 이후 진전이 없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쟁점을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법원의 보수적인 판단과 정치권의 대립이 계속될 경우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주주대표소송제가 실효적인 제도로 자리매김하기 어려울 전망이다.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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