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근 문화유산회복재단 이사장

개성은 고려국의 왕도이다. 그렇지만 이보다 고려가 더 유명해진 이유는 개성의 인삼 덕분이다. 개성 예성강 하구에 있던 벽란도는 무역상들의 교역의 중심지였다. 이곳에는 중국과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상인들이 고려의 인삼을 구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들의 왕래로 고려(KOREA)는 세계로 알려졌고, 지금의 ‘코리아’가 되었다. 이처럼 세계에 고려를 알린 인삼에는 다른 나라의 그것과는 다른 특별한 그 무엇이 있다. 오직 한반도에서만 자라고 그 효능을 수천년 동안 간직하고 있다.

북한에서도 고려인삼을 내세운 다양한 판매전략을 세우고 있다. 북한의 8부작 드라마에서는 임진년 일본의 수탈에 맞서 고려 인삼을 지키는 주인공들의 분투를 그렸다. 과거 김정일 위원장까지 나서 북한의 고려인삼을 알리려는 노력이 다양하게 시도되었다.

일제강점기, 고려 인삼은 ‘독립자금’ 이상

얼마 전 충남 부여군에 있는 인삼박물관을 탐방하였다. 인삼의 역사와 가치, 한국사회에서 차지하는 의미 등을 알기 쉽게 전시해 놓았다. 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전시물은 다른 나라의 삼(蔘)과 비교하여 놓은 것으로 모양 색깔 등에 있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 캐나다의 서양삼이나 중국의 삼칠, 일본의 죽절삼과는 모양부터 확연히 다르다. 무엇보다 사람 모양은 고려 인삼(人蔘)뿐이다. 성분도 탁월하다.

이런 이유로 예로부터 고려 인삼은 귀하고 가격이 높았다. 고려 인삼은 17세기에 와서는 중국에서 최고의 대우를 받았다. 특히 개성상인 임상옥의 이야기는 심금을 울릴 뿐만 아니라 교훈적이다.

이런 고려 인삼이 일제강점기에는 독립활동에 크게 기여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일제에 의해 강제수탈되기도 했지만, 독립자금으로 변통된 것이다.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에 고려 인삼의 역사적 가치를 되새기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광제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가 쓴 ‘일제시기 상해 고려인삼 상인들의 활동’ 논문을 보면 고려홍삼은 오늘 날 달러($) 같은 국제통용 화폐와 같은 기능이 있었다 한다. 일제시기 고려 인삼은 상해를 통해 중국과 싱가포르, 홍콩 나아가 동남아 북미 중남미 등 세계 각지로 나갔다. 상해에는 많은 인삼 상점이 있었는데 이유선의 지성공사, 한진교의 해송양행, 김시문의 금문공사, 조성섭의 원창공사, 김홍서의 삼성공사 등이 대표적이다.

해송양행은 인삼 판매 수익금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제공한 애국기업이었다. 해송양행은 1919년 김규식이 파리강화회의 참석을 위해 프랑스로 갈 때 거액의 여비를 제공하고 1920년 안창호가 홍콩 베이징 등지로 미 의원단을 만나러 갈 때도 비용을 제공하였다.

또 원창공사는 임시정부 의정원장을 역임한 조상섭 지사가 설립한 기업으로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인삼 무역을 통해 조달하였다. 이처럼 윤봉길의사가 독립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인삼 행상하였듯이 인삼은 ‘총대 없는 상인 독립군’에게 독립운동의 무기였다.

근대 홍삼역사 120년, 문화유산으로 지키고 보전해야

고려 인삼이 국가적으로 본격 관리된 것은 1899년 대한제국 궁내부 삼정과 설치 이후이다.

대한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던 고종황제의 입장에서 자금 마련은 시급하고 절실한 문제였다. 이때 수요가 높은 인삼은 최고의 재물이었고, 황실에 인삼 관장부서를 설치한 것이다. 1908년 홍삼전매법이 제정되고 근대적 경영기법이 도입된 이후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최근 고려인삼의 종주권을 놓고 중국과 다툼이 벌어지고 있다. 우리는 일제강점기 식물주권을 지키지 못해 절반이 넘는 토종식물이 일본인명으로 된 아픔이 있다. 이중에는 약탈자인 데라우치나 하나부사의 이름도 있다. 이처럼 생물주권이 위협받고 있는 상황에서 만세운동 100주년인 올해, 고려인삼의 가치와 역사를 되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고려인삼의 복원을 위한 남북공동 연구도 시급히 추진해야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