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SJ "일부 신평사들, 시장점유율 압박에 신용등급 부풀려"

미국에서 근래 인기를 얻는 자산유동화 시장이 있다. 상업부동산을 대상으로 한 '대출채권담보부증권'(CLO)이다.

이 CLO는 상업부동산 저당증권(CMBS)을 기초자산으로 한다. 특히 오피스나 쇼핑몰, 아파트, 기숙사 등 노후한 상업부동산에 대한 '전환기 대출채권'(transitional loans)이 중심이다. 전환기 대출이란 노후 건물을 수선하거나 리모델링하는 데 주어지는 대출이다. 은행들은 노후 부동산을 새단장하고 나면 더 높은 임대수익을 낼 것이라는 기대감에 대출에 나선다.

하지만 은행의 계산이 잘못될 수 있다. 때문에 대출해준 은행은 이런 위험을 떨어내고 싶어 한다. 대출채권을 묶어 상업부동산 CLO라는 상품으로 포장한다. 즉 상업부동산 CLO는 CMBS과 투기등급 회사채를 기반으로 하는 CLO를 이종교배시킨 상품이다. 대개 연금펀드 등 기관투자자들이 이를 사들인다.

이같은 형식의 구조화증권은 조각조각 나뉜다. 각각의 조각은 리스크와 수익률에 따라 '트란셰(tranches)'로 구분된다. 가장 먼저 손실을 떠안는 트란셰, 즉 가장 낮은 신용도를 가진 트란셰를 배정한다. 이를 '신용보강'(credit enhancements)이라 부른다. 높은 등급 트란셰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더 낮은 등급의 트란셰, 즉 손실을 가장 먼저 떠안는 투자자들 덕분에 상대적으로 보호 받는다. 따라서 해당 CLO가 위험한 증권을 기초로 한다고 해도 가장 상위에 있는 트란셰는 트리플A(AAA) 등급을 받을 수 있다. 첫 손실을 가져가는 트란셰가 두터울수록, 윗 등급 트란셰를 가진 투자자들에 대한 보호는 강해진다. 이 시장은 현재까지는 별 다른 문제 없이 호황이다.

이런 채권을 발행하는 기업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더 많은 트란셰가 투자등급을 받느냐는 것. 남아 있는 낮은 등급 트란셰의 손실 보호벽이 더 얇야질 수 있지만, 투자자를 꾀기 위해서는 불가피한 선택이다.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 최고의 신용등급을 부여할 신용평가사들을 찾을 때까지 쇼핑을 하면 된다. 신평사들은 사업을 따내 두둑한 수수료를 챙기기 위해 기꺼이 기준을 완화해주고 있다.

이같은 신용등급 부풀리기 사업은 성황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CMBS 시장 조사기관 '트렙'(TREPP) 자료를 인용해 "지난해 은행들은 214억달러어치의 상업부동산 CLO를 투자자들에게 떨어냈다. 2012년보다 10억달러 가까이 늘었다"고 전했다.

미국에선 전통적으로 S&P와 무디스인베스터스, 피치레이팅스 등 대형 신평사가 활동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DBRS와 크롤본드레이팅에이전시, 모닝스타 등이 생겼다. 모닝스타는 지난해 7월 DBRS를 인수해 사명을 DBRS모닝스타로 변경했다. 상업부동산 CLO 시장에서 활발히 경쟁하는 신평사들은 크롤과 DBRS모닝스타, 무디스 등이다.

구조화채권 발행사들은 보다 많은 트란셰가 높은 등급을 받길 원한다. 신평사들은 이들에게 거래를 따내 수수료를 받는다. 이 지점에서 신용평가 쇼핑이 시작된다.

WSJ에 따르면 은행들은 특정한 구조화채권을 만들어 신평사들에게 제시한다. 신평사들은 대략의 평가를 매겨 피드백한다. 은행은 어떤 신평사가 가장 높은 신용등급을 제공했는지 따져본 뒤 신평사와 계약을 맺는다.

거래를 따내기 위해 최근 2곳의 신평사가 상업부동산 CLO 평가기준을 바꿨다. 먼저 크롤이 2017년 기준을 바꿨다. WSJ은 "크롤은 다세대 아파트에 제공되는 모기지 신용평가에서 임대와 공실률에 대한 스트레스 테스트 기준을 완화했다"며 "다세대 아파트는 상업부동산 대출시장에서 큰 몫을 차지하는데, 전현직 전문가에 따르면 크롤의 기준 변경으로 이 회사가 평가하는 대개의 아파트 신용등급이 상승했다"고 전했다.

경쟁 신평사인 DBRS는 이 때문에 크롤에 뒤처지게 됐다. 그러다 결국 DBRS도 올해 3월 신용평가 기준을 바꿨다. WSJ에 따르면 DBRS의 북미주 CMBS 헤드인 에린 스태포드는 "다른 부동산과 달리 다세대 아파트의 디폴트 확률을 낮추는 새로운 모델을 적용했다"며 "이는 상업적 고려가 아닌, 높은 예측력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미 신용평가 기준을 바꾼 크롤의 부동산 그룹 헤드인 에릭 톰슨은 "DBRS의 기준 변경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전통의 신평사들이 하던 것"이라며 "사업을 따내고 수수료를 얻기 위해 신용평가 기준을 완화했다"고 DBRS를 비난했다.

이에 대해 DBRS는 WSJ에 "우리는 새로운 정보를 기반으로 분석하기 위해 방법론을 업데이트하는 '공부하는 조직'"이라며 "다른 신평사들도 우리와 같은 조치를 취했을 것"이라고 반박했다.

달리 말하면 바닥으로의 경쟁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WSJ에 따르면 한 상업부동산 대출기관은 지난해 봄 3개 신평사들을 대상으로 상업부동산 CLO에 포함된 8개 트란셰에 대한 신용평가 견본을 요구했다.

무디스는 해당 트리셰의 절반을 트리플A라고 회신했다. 무디스는 8개 중 1개 트란셰 평가에 고용됐다. 크롤은 해당 트란셰의 61%를 트리플A라고 봤다. 여러개의 트란셰 평가에 고용됐다. 반면 DBRS는 3분의 2를 트리플A로 평가했다. 그 결과 8개 트란셰 평가 모두에 고용됐다.

DBRS의 승리는 지난해 3월 신용평가 기준을 바꾼 뒤 가능했다. 보다 많은 트란셰에 최고 등급을 부여할 수 있었다. 대신 트리플A 등급을 위해 손실을 가장 먼저 흡수하는 쿠션은 더 얇아질 수밖에 없다.

이같은 신용평가 쇼핑은 업계 관행으로 굳어졌다. WSJ가 인용한 커머셜모기지얼럿 자료에 따르면 2017년 DBRS는 상업부동산 CLO 신용평가와 관련, 18개 거래에서 10개를 따냈다. 2018년엔 크롤이 이겼다. 25개의 사업 중 21개를 따냈다. 2017년 DBRS에 완패하면서 신용평가 기준을 바꾼 뒤다. 그리고 지난해 3월 DBRS가 기준을 바꾸면서 24개 사업 중 16개를 가져갔다. 크롤은 9개에 그쳤다.

DBRS가 따낸 거래 중 지난해 5월 아보부동산신탁이 판매한 6억5000만달러 상업부동산 CLO가 있었다. DBRS는 바뀐 평가 기준을 통해 해당 CLO 트란셰 대부분에 투자등급을 매겼다. 기초자산의 손실 완충력이 14.5%에 그치게 됐다. 그 이상의 손실이 발생하면 투자등급 트란셰를 잠식한다. 이는 직전연도인 2018년 아보가 발행한 비슷한 CLO와는 달랐다. 당시 DBRS가 매긴 신용등급의 경우 손실완충력은 21.5%였다. 신용평가 기준이 바뀌면서 신용등급은 오르고 손실완충력은 하락했다.

상업부동산 CLO 시장은 상업부동산 구조화증권에서 일부분을 차지한다. 하지만 경쟁사를 누르고 거래를 따내 수수료를 얻으려는 압력에 신평사들은 더 위험한 대출채권에 더 높은 신용을 부여하고 있다.

온라인 금융전문매체 '울프스트리트'는 "현재까지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다"고 비꼬았다. 거래를 따내는 신평사들은 수수료를 두둑이 챙길 수 있어 행복하다. 채권발행기업은 보다 매력적인 신용등급을 받아 행복하다. 투자자들은 위험하지만 신용등급이 높은 상품을 살 수 있어 행복하다. 울프스트리트는 "투자자들은 손실 완충력이 줄어드는 것에 신경쓰지 않는다"며 "왜냐하면 디폴트 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 믿기 때문이며 수익률을 좇는 것만으로도 너무 바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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