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재 "긴급조치 피해자 '예외 적용' 안돼"

반대의견 "국가 불법에 따른 피해 외면"

공무원의 고의·과실에 의한 불법행위가 있을 경우에만 국가의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현행법은 합헌이라고 헌법재판소가 결정했다.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피해자들도 이런 국가배상 규정 관련해서 예외를 적용할 수 없다는 판단이다.

헌재는 26일 과거 긴급조치 1호 또는 9호 사건으로 수사 및 재판을 받은 A씨 등이 국가배상법 2조 1항에 대해 낸 헌법소원 사건에서 재판관 5대 3 의견으로 합헌 결정했다.
떨어져 앉은 헌재 방청객들│26일 종로구 헌법재판소에서 유남석 헌재소장과 재판관들이 국가배상법, 변호사시험 '합격자 명단 공개', '사전선거운동' 구 공직선거법 등에 대한 헌법소원 선고 시작을 기다리고 있다. 코로나19 예방을 위해 방청객들이 떨어져 앉아 있다. 연합뉴스


국가배상법은 공무원 등이 직무를 집행하면서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을 위반해' 손해를 입힌 경우 국가 또는 공공단체가 배상하도록 규정한다.

A씨 등은 긴급조치로 인한 수사·재판 과정에서의 불법 행위에 대해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지만, 대법원이 2014년 10월 법관의 불법행위가 인정되지 않는다며 기각되자 헌법소원을 냈다.

◆국가폭력 피해자 예외 인정 여부가 쟁점 = 쟁점은 긴급조치와 같은 국가폭력의 피해자들에게도 예외 없이 공무원의 고의·과실을 따져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하게 한 게 위헌인지 여부였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 재임 시절 대법원은 긴급조치가 위헌이라면서도 긴급조치에 기초한 수사·재판이 바로 민사상 불법행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결했다.

법관의 재판은 고의 또는 과실 유무에 따라 불법행위 성립 여부를 판단하지 않고, 위법 또는 부당한 목적을 가지고 재판을 했다거나 법적 기준을 현저하게 위반하는 등 중과실이 있어야 법적 책임이 인정된다는 취지다.

국가배상 책임이 성립하려면 공무원에게 '고의 또는 과실'이 있어야 하는데 긴급조치가 위헌·무효임을 당시 수사기관·법원은 알 수 없었다는 이유다.

헌재는 긴급조치 피해자들에게도 예외를 적용할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헌재는 "과거에 행해진 법 집행행위로 사후에 국가배상 책임이 인정되면, 국가가 법 집행행위 자체를 꺼리는 등 소극적 행정으로 일관하거나, 행정의 혼란을 초래해 국가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되지 못하는 결과를 야기할 수 있다"고 했다.

이는 기존 헌재의 태도를 변경하지 않은 것이다. 헌재는 같은 조항에 대한 2015년 헌법소원 사건에서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이 없는데도 국가배상을 인정할 경우 피해자 구제가 확대되기도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원활한 공무수행이 저해될 수 있어 이를 입법정책적으로 고려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해왔다.

그러면서 "공무원의 고의·과실 여부를 떠나 국가가 더욱 폭넓은 배상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라면 국민적 합의를 토대로 입법자가 별도의 입법을 통해 구제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반대의견 "국가배상제도 본래 취지 반한다" = 반면, 김기영·문형배·이미선 재판관 3명은 국가배상법 조항이 헌법상 국가배상청구권·평등권 침해한다는 피해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위헌이라는 반대의견을 냈다.

이들 재판관은 "국가배상청구권 관련 법률조항이 지나치게 불합리해 국가배상청구를 곤란하게 만들거나 사실상 불가능하게 하면, 이는 헌법에 위반된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요구한 결과, 불법성이 더 큰 국가의 불법행위에 대해 오히려 국가배상청구가 어려워졌고, 국가의 불법행위에 따른 피해를 외면하는 결과가 발생했다"며 "이는 국가배상제도의 본래 취지인 손해의 공평한 분담과 사회공동체의 배분적 정의 실현에 반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들은 "긴급조치 제1호, 제9호 발령·적용·집행을 통한 국가의 의도적·적극적 불법행위는 헌법의 근본 이념인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정면으로 훼손한다"며 "국민의 기본권을 존중하고 보호해야 한다는 국가의 본질을 거스르는 행위이므로 불법의 정도가 심각하다"고 했다.

이들은 "해당 조항은 긴급조치에 관한 불법행위에 대해서도 개별 공무원의 고의 또는 과실을 요구한 결과 국가배상 청구를 현저히 어렵게 했다"며 "법치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국가배상 청구에 관한 법률 조항이 오히려 법치주의에 큰 공백을 허용했고, 국가의 기본권 보호 의무에 관한 헌법 10조에도 위반되는 불합리한 결과가 빚어졌다"고 강조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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