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르몽드, 독일의 변화 진단 … “경쟁력 현대화 위해 정책적 개입으로 패러다임 전환”


"달라진 독일, 경제에 ‘국가 적극 개입’" 에서 이어집니다

코로나19 팬데믹은 패러다임 전환의 기폭제가 됐다. 지난해 3월 유럽 각국이 국경을 막았다. 사상 처음으로 유럽 내 자유로운 이동이 금지됐다.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던 것이 하루 아침에 막혔다. 유럽 각국의 생산라인, 특히 이탈리아 북부지역의 생산라인이 붕괴됐다. 독일 경제 최대 비중을 차지하는 자동차업계의 시동도 꺼졌다.

보수성향의 기민당은 경제와 관련해 국가의 중립성과 재정의 엄격한 균형, 자유무역에 대한 신뢰 등을 주창해왔다. 그런 독일이 3월 23일 1조2000억유로(약 1600조원)라는 역대급 규모의 1차 경제부양책을 꺼내들었다. 그동안 신성불가침 원리로 떠받들던 ‘균형재정’과 ‘부채제동’(debt brake)이라는 원칙을 깬 것이었다. 부채제동은 2009년 독일 헌법에 삽입된 조항으로, 연방정부의 연간 재정적자를 GDP의 0.35%로 제한한다는 내용이다. 하지만 그같은 예외조치도 코로나19 팬데믹에 대처하기엔 충분치 않다는 공감대가 커졌다.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 부처의 한 고위관리는 르몽드에 “국경을 폐쇄하면서 ‘우리가 막강한 자금동원력을 가진 독일 기업들을 멈춰세우고 있구나’ 실감했다. 모든 이들이 약해지고 있었다. EU는 붕괴 위기에 놓였고 동시에 독일 기업들도 무너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독일 정부는 보호마스크조차 제대로 보급할 수 없게 된 사실 앞에 무기력함을 뼈저리게 절감했다.

보건과 경제위기를 맞아 유럽이 극도로 취약하다는 공감대가 독일 내에서 커지고 있었다. 지난해 7월 5일 기민당 소속 연방의회 하원의장인 볼프강 쇼이블레가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장문의 기고를 보냈다. 그는 보수성향 정치인으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부터 2017년까지 재무부장관을 맡으며 균형재정 원칙에서 한치의 물러섬이 없었던 강고한 매파다. 그런 그가 기고문에서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글로벌 시장과 하도급 공급망에 의존하는 유럽이 얼마나 취약한지 드러났다. 필수영역에서도 우리는 남에 의존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에서 배워야 할 교훈은 위기를 탄력적으로 회복하고 자주권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EU는 그에 준비해야 한다”고 썼다.

EU 공동채권 발행으로 자금 조달

자주권(sovereignty)이란 단어는 사실 프랑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자주 쓰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젠 독일 정치담론에서 흔히 등장하는 말이 됐다. 자주권은 경제적으로 보면 ‘행위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결국 경제체제의 강화를 요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지난해 7월 ‘유럽회복기금’을 제안했다. 이탈리아처럼 극심한 고통을 받는 국가들에게 예외적으로 금융지원을 하자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상 처음으로 EU국가들이 공동 발행하는 채권으로 자금을 조달키로 했다. 이는 독일 보수 정치권이 그간 절대적으로 터부시하던 일이었다. 그 계획은 결국 지난해 말 7500억유로로 확정됐다. 르몽드는 “유럽통합 역사에서 주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프랑스 나틱시스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인 파트리크 아르튀스는 지난달 14일 투자자노트에서 “결국 독일은 언제나 추상적 이념보다는 실용주의를 선택한다”고 말했다. 그는 “재정규칙과 통화정책, 국가간 연대정책 측면에서 유로존의 초기 규정은 점진적으로 폐기되고 있다. 현재 직면한 위기로 유로존이 해체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 유로존 국가들의 삶의 수준에 큰 격차가 나는 점을 고려하면 실용주의적 접근법이 정답”이라고 평가했다.

스타트업 파산으로 낱낱이 드러난 약점

독일의 전환을 부른 또 다른 충격은 전자결제 스타트업 ‘와이어카드’의 파산이다. 지난해 6월 25일 독일 증시 닥스에 상장된 와이어카드는 편의성에 힘입어 독일 최대 은행인 도이체방크의 시가총액을 넘어설 정도로 급성장했지만 한순간 종이로 만든 집처럼 무너졌다. 이 회사는 재무제표 상당 부분을 조작했다고 털어놨다. 이는 수년 전부터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지속 보도한 사안이었다. 하지만 독일 연방금융감독청(BaFin)은 그같은 경고를 무시했을 뿐 아니라 FT 기자들에게 허위보도 혐의를 씌우려 했다.

와이어카드 사태는 독일 금융계의 약점을 여실히 드러냈다. 1차적인 문제는 사기를 적발할 능력이 안된다는 것이다. 2차적이면서 더 중요한 문제는 진짜 기업혁신의 돌파구가 무엇인지, 이에 어떻게 종잣돈을 대야 하는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독일이 선호하는 기업모델은 중간 규모의 기업이거나 가족이 지분을 갖고 있는 대기업이다. 안정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이유에서다.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교수로 금융위기 전문가인 얀 피터 크라넨은 “독일엔 전통적으로 금융시장에 대한 불신이 있다”며 “미국과 달리 독일 증시는 저개발됐다. 독일 기업들은 돈이 필요할 때 대개 은행에서 대출을 받는다. 시장감독당국이 상대적으로 약한 이유”라고 말했다. 와이어카드 사태는 변화의 계기가 됐다. 2020년 말 상장기업 회계에 대한 감독시스템은 물론 닥스에 대한 전면적 재검토가 이뤄졌다.

부채제동 해제해 혁신기업 투자

그와 관련한 또 다른 좌절감이 있었다. 독일은 창조적 파괴를 감행하는 혁신기업들을 많이 배출한다. 하지만 이들 기업의 진가를 알아보는 건 종종 독일이 아닌 다른 나라였다. 독일 생명공학계에서 큰 성공을 거둔 ‘바이오앤테크’가 대표적이다. 코로나19 첫번째 백신을 신속히 개발하는 기염을 토했다. 메신저RNA(mRNA)에 기반한 혁신적 기술을 활용해서다. 우구르 사힌과 외즐렘 튀레지 부부 과학자가 회사를 창업했다. 독일 억만장자 스트룽만 형제가 2008년 초창기부터 바이오앤테크에 투자했다. 이는 당시 독일 생명공학계에선 상당히 이례적인 일로 평가 받았다. 바이오앤테크는 2019년 뉴욕증시에 상장됐다. 백신 임상시험도 미국 제약사 화이자와 협업했다. 당연히 혜택도 미국과 공유한다.

독일 언스트앤영(EY)의 생명공학 전문가인 지크프리트 비알로얀은 “사실 mRNA 기법은 독일 기초과학 연구분야에 막대한 공적기금이 투입됐기에 가능한 발명품이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 혜택은 미국이 가져가고 있다. 미시경제학으로 보면 말이 안되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독일은 지난해 6월 말 동일한 상황이 되풀이되는 걸 막기로 결심했다. 독일 생명공학 기업 ‘큐어백’이 뉴욕에서 기업공개(IPO)를 하기 전 공공투자은행인 ‘독일재건은행’(KfW)을 통해 공적자본을 투입키로 했다. 큐어백도 바이오앤테크와 마찬가지로 mRNA에 기반한 코로나19 백신 후보를 연구중이다.

큐어백 지원은 ‘부채제동’을 해제하면서 가능했다. 이를 필두로 독일은 코로나19에 따라 직접적으로 위기를 받는지 여부를 떠나 다양한 부문에서 부양조치를 채택했다. 지난해 6월 의회를 통과한 2차 코로나 부양책엔 독일의 미래 먹거리에 500억유로를 투자한다는 내용이 담겼다. 인공지능(AI)과 수소경제 등이다.

이후 독일 경제장관 피터 알트마이어는 프랑스와 긴밀한 협력 끝에 유럽 공동투자 프로젝트 지원방안을 내놓았다. 배터리와 반도체, 우주항공 등 전략산업 부문에 집중 투자해 유럽의 가치사슬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지난달 초 르몽드는 프랑스 재정부장관 브뤼노 르 메르에게 ‘왜 독일이 산업정책을 꺼내들면서 변화를 꾀하고 있는지’ 물었다. 르 메르 장관은 “유럽의 자주권과 같은 이슈에서 독일의 전략이 실제 바뀌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이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촉발됐다”고 말했다. 그는 독일의 전략 전환 이유로 유럽에 대한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적대감, 중국과의 관계 재정립이 필요하다는 확신감을 꼽았다.

독일이 전통의 신념에서 방향을 튼 것은 정부의 전략 변화뿐 아니라 경제계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 재계를 대표하는 ‘독일연방산업협회’(BDI)는 2019 년 1월 중국에 대한 기본적인 입장을 정립했다. BDI는 중국을 처음으로 ‘체제 경쟁국’으로 정의했다. 또 미국과 중국의 기술플랫폼에 대항해 유럽의 기술적 주권을 강화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지난해 말 중국과의 포괄적투자협정 서명을 적극 밀어붙인 것도 BDI였다. 시기가 절묘했다. 독일의 의장국 재임기간이 끝나기 전, 그리고 미국의 새로운 대통령 조 바이든이 취임하기 전이었다. BDI는 각종 난관을 뚫고 협정을 압박해 결국 성사시켰다.

뒤셀도르프대 조데쿰 교수는 “독일의 많은 기업들은 미국은 물론 중국과 큰 이해관계가 얽혀 있다. 독일 기업에게 최악의 시나리오는 미국과 중국 중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제받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유럽은 스스로 체력을 길러야 한다. 다시는 트럼프나 다른 누구에게 ‘내편을 들라’는 강압을 받아서는 안된다. 그러려면 정부의 산업정책이 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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