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글로벌 자동차 생산 지연, 미중 기술경쟁 등으로 TSMC 독보적 존재감 부각”


세계 최대 반도체 제조 수탁사(파운드리)인 TSMC는 대만 남부에 3나노미터칩 공장을 건설중이다. 3나노미터칩은 현재 최첨단인 5나노미터칩보다 70% 빠르고 에너지 효율성도 높을 것으로 기대된다. 칩에 탑재되는 트랜지스터 크기가 작아질수록 에너지 소비량은 줄어들고 속도는 빨라진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25일자에 따르면 이 공장은 내년부터 3나노미터칩 양산에 돌입한다. 스마트폰에서 슈퍼컴퓨터까지 최첨단 기기에 탑재될 전망이다. 16만평방미터로 축구장 22개 크기의 이 공장은 TSMC 위용을 상징한다. TSMC는 글로벌 반도체 제조 부문을 장악한 초격차 기업이다.

일반적인 상황에서 TSMC는 존재감을 드러내는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전세계 반도체 부족으로 일본과 유럽, 북미의 자동차 생산이 둔화되거나 지연되고 있다. 많은 나라의 정치인들은 반도체 제조공장을 자국내로 끌어와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최첨단 기술에 대한 TSMC의 대규모 투자와 독보적 존재감은 점차 사람들의 이목을 끌고 있다.

게다가 동아시아를 무대로 미국과 중국이 군사적 긴장감을 높이고 있는 때다. 대만이 그 중심에 있다. 또 미중 기술전쟁의 한가운데 있다. TSMC가 그 한가운데 있다.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TSMC의 제조위상을 따라잡으려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지만 현재까지 성공하지 못했다. 미국 역시 고전하기 시작했다. 인텔은 핵심제품인 프로세서 제조 일부를 TSMC에 아웃소싱할 작정이다. 미 국방산업계는 ‘최첨단칩 제조에 더 많이 투자해야 한다’며 워싱턴정가를 압박하고 있다. 첨단무기류 생산에서 외국 반도체기업 의존도를 줄여야 한다는 것.

미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가 TSMC의 성공사례를 따르려 한다. 하지만 TSMC를 모방하는 비용이 엄두도 못낼 만큼 엄청나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그리고 반도체 고객기업들도 과거와 상황이 달라졌다는 상황을 절감하고 있다. 공급망 컨설팅기업 ‘세라프’의 창업자인 앰브로즈 콘로이는 “자동차기업들은 자신들이 세계적 거인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다”며 “하지만 현 상황에선 반도체 제조사들이 거인이고, 자동차 부품조달팀은 개미들”이라고 말했다.

파운드리의 승리

TSMC는 오래 전부터 대중의 눈에 띄지 않는 기업이었다. TSMC가 제조한 반도체는 애플이나 AMD, 퀄컴처럼 유명 대기업이 설계하고 판매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TSMC는 주문형칩 제조시장의 절반 이상을 장악했다.

매번 신세대 기술이 나올 때마다 TSMC의 시장 장악력은 더욱 커지고 있다. 28~65나노미터 범주에서 TSMC 비중은 매출 기준 40~65%를 차지한다. 대개 이 범주의 칩은 자동차에 탑재된다. 가장 선진적인 5~10나노미터 범주에서는 거의 90%를 장악했다.

다국적 컨설팅기업 ‘베인&컴퍼니’의 피터 핸버리는 “반도체업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TSMC에 의존한다며 “20년 전 20곳의 파운드리기업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 최첨단 기업은 대만에 있다”고 말했다.

반도체 공정기술이 한단계 진보할 때마다 기하급수적인 투자를 요한다. 때문에 많은 칩제조사들은 수년 전부터 설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제조는 TSMC 등 파운드리기업에 맡겼다. 차세대 공정기술을 개발하는 비용이 커질수록, 칩제조사들은 더욱 아웃소싱에 의존하게 된다. 순수 파운드리시장에서 TSMC와 경쟁하던 기업들은 하나둘씩 낙오했다.

올해 TSMC는 250억~280억달러의 자본지출을 예상하고 있다. 이는 지난해보다 63% 많은 액수다. 인텔과 삼성전자의 투자를 앞선다. 인텔은 프로세서 제조 일부를 아웃소싱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0나노 미터와 7나노미터에서 2번 연속 공정기술 구현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인텔의 행동주의 투자자들은 지난해 ‘칩제조를 버리고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 사업모델로 전환해야 한다’고 요구하기 시작했다.

인텔의 새로운 CEO인 팻 겔싱어는 투자자의 요구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는 23일 투자자와 언론에 보낸 화상메시지에서 “7나노미터 구현 자신감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인텔은 TSMC나 다른 파운드리기업과의 연계를 늘리고 있으며 일부 프로세서 제조를 TSMC에 외주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첨단칩제조 위상을 되찾겠다는 겔싱어의 다짐에도 불구하고, 인텔은 최소 전환기 동안엔 TSMC가 절실히 필요하다. 컴퓨터와 서버의 심장인 ‘중앙처리장치’(CPU) 시장점유율을 더이상 경쟁사인 AMD에 잠식당하면 안되기 때문이다.

TSMC와 인텔 모두에 정통한 2명의 관계자에 따르면 인텔은 1년여 이상 TSMC와의 협업을 준비하는 팀을 꾸렸다. 타이난에 짓고 있는 TSMC의 새로운 공장에 CPU를 아웃소싱하기 위해서다.

투자은행 ‘번스타인’의 반도체 애널리스트 마크 리는 “인텔은 2023년 CPU의 20%를 TSMC에 외주할 것이며, 인텔의 위탁생산을 위해 TSMC는 약 100억달러를 투자할 필요가 있다”고 추산한다.

FT는 “엄두도 못낼 엄청난 비용은 다른 기업들이 최첨단 칩제조 경쟁을 벌이는 걸 어렵게 만들었다”며 “하지만 인텔 사례가 보여주듯, 돈이 유일한 장애물은 아니다. 트랜지스터 크기를 줄이는 건, 점차 공학적으로 벅찬 과제가 됐다”고 전했다.

3나노미터 트랜지스터는 머리카락 1/20000 크기에 불과하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제조 관련 기계와 화학물질에 대대적인 변화를 줘야 한다. 이를 위해 TSMC는 외곬의 집중력을 통해 3나노미터 기술을 위한 대규모의 광범위한 응용과정을 개발했다.

공급망 우려

TSMC가 최첨단칩 제조의 지배자로 올라서면서 점차 각국의 정치적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자동차 반도체 부족에서 비롯된 충격으로 각국은 반도체 공급망을 자국으로 끌어들여야 한다고 압박을 가하고 있다.

미국 의회는 칩 부족을 근거로 반도체 제조능력을 되살려야 한다고 지적한다. 지난해 TSMC는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압박으로 애리조나에 120억달러 규모 공장을 짓기로 약속했다.

일본 역시 반도체 공급망을 우려한다. TSMC는 지난해 일본에 자회사를 설립하겠다고 밝혔다. 새로운 반도체 제조 화학물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일본 기업들은 그 부문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일본정부의 한 관계자는 “TSMC 공장이 대만에만 있는 건 불안하다. 중국과 대만 간 전쟁 리스크에 대처해야 한다. 그 리스크는 매우 현실적이다”라고 말했다.

유럽연합(EU) 회원국들도 최첨단칩 제조능력을 유럽으로 가져와야 한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2나노미터칩 공장에 대규모 투자를 한다는 내용의 정책을 추구하자는 것. 2나노미터는 TSMC가 현재 짓고 있는 3나노미터공장 이후 차세대 공정기술이다.

TSMC가 각국의 압박을 수용한다면 자체 사업모델에 큰 부담이 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반도체업계 전문가들에 따르면 TSMC가 효율성을 앞세워 수익을 내는 핵심 이유 한 가지는 대만에 제조공장을 집중하기 때문이다. TSMC 대변인 니나 카오는 “대만에 있는 TSMC 공장들은 매우 가깝다. 엔지니어들을 유연하게 동원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TSMC는 미국 자체 공장의 칩제조 단가가 대만 공장보다 8~10% 높을 것으로 추산한다.

따라서 TSMC는 제조능력을 전세계로 분산시킬 준비가 안돼 있다. TSMC의 한 경영진은 “미 정부가 비용차이를 보조금으로 메워주겠다고 확약한 이후 공장을 짓겠다고 약속했다. 일본에서의 투자는 우리 미래에 핵심적인 기술에 집중돼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유럽의 경우는 유인책이 그리 매력적이지 않다. 그리고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원하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자체적인 반도체 제조사들로 이를 달성할 수 있을지 여부를 파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이는 유럽 반도체기업들도 동의하는 지점이다. 인피니언이나 NXP, ST마이크로 등의 유럽 반도체회사들은 자동차 반도체 시장과 일부 틈새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들은 오래 전부터 반도체 제조가 아니라 설계에 집중하고 있다. 물론 주요 반도체기업들 여러곳이 제조능력을 일부 보유하고 있다. 하지만 최첨단 제조능력에 수십억달러를 투자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칩제조의 많은 부분을 TSMC 등 파운드리기업에 외주한다. 유럽의 칩제조 능력은 TSMC와 삼성전자 등 선도기업의 기술력에 몇세대 뒤처졌다.

유럽 한 반도체기업의 CEO는 "우리는 22나노미터 수준에 있다. 22나노미터에서 2나노미터로 직행하는 건 타이베이 101층건물 꼭대기로 뛰어오르려는 것과 같다. 실패하면 박살이 난다"고 말했다. 그는 "최첨단칩 제조능력을 유럽에 꼭 둬야 할 필요성은 사실 큰 설득력이 없다. 우리는 미국에서 수요가 높은 대량시장 소비가전에 들어가는 칩과는 다른 반도체에 전문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우리에게 최첨단 제조기술로부터 오는 비용이득은 미국 기업들만큼 절실하지 않다"고 덧붙였다.

미국 공장에 120억달러를 투자하겠다는 TSMC의 약속 역시 기대보다는 제한적일 수 있다는 지적이다. 애리조나 공장은 2024년부터 5나노미터칩을 양산할 전망이다. 지금이야 최첨단칩이지만 그때가 되면 상황이 달라진다. 내년부터 양산 체제에 돌입하는 TSMC의 3나노미터칩 공장에 뒤처질 것이 분명하다. 게다가 미국 TSMC 공장에서 만들 칩의 활용도 역시 제한된다. 자동차에 쓰이는 대부분의 칩은 28~65나노미터 크기다. 이 범위는 TSMC의 지배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레드오션 시장이다.

TSMC가 미국에 투자하게 된 데엔 무엇보다 미 국방산업계의 입김이 컸다. 미 국방부가 장기적인 노력을 기울인 결과다. 국방공급망을 확보하기 위해 최첨단칩 제조능력을 미국에 복원해야 한다는 의지가 컸다.

미 국방부는 10여년 전부터 반도체 제조공장이 아시아에 집중되는 상황을 우려했다. 반도체는 무기생산의 핵심부품이기 때문이다. 미사일 궤적을 모델링하는 슈퍼컴퓨터 프로세서부터 미사일 내 탑재되는 내열성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에 쓰인다. 전투드론과 같은 무인시스템이 등장하면서 반도체의 중요성은 더욱 커질 전망이다.

반도체업계 전문가들은 반도체 제조능력을 자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정부 주도 노력이 지속가능하지 않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베인&컴퍼니의 핸버리는 "반도체 투자는 한차례 끝나는 게 아니라는 점을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한다. 3나노미터칩 공장에 초기 150억달러가 들었다면 2년 뒤엔 또 다른 180억달러를 써야 한다. 그 이후 또 다른 200억달러를 써야 한다. 액수는 점차 커진다. 최첨단을 유지하려면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는 TSMC가 파운드리시장을 장악하게 된 이유다. 미국 기반의 글로벌파운드리, 대만 기반 UMC를 포함한 경쟁기업들은 점차 최첨단 능력으로 겨루겠다는 야심을 버리고 있다. 그에 따르는 투자비용이 커도 너무 크기 때문이다.

TSMC의 지배력에 대한 우려는 최근 수면위로 올라왔지만 사실 몇년 전부터 반도체 고객기업들은 상당한 걱정을 하고 있었다.

핸버리는 "팹리스 기업들은 수년 전부터 TSMC 지배적 입지가 가격결정력으로 드러날 것을 걱정했다"며 "TSMC의 유일하게 남은 미국 경쟁자 글로벌파운드리가 2018년 첨단 제조능력 개발에서 낙오하면서 걱정은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중국 최대 파운드리기업인 SMIC는 포기하지 않고 따라붙겠다고 다짐하고 있지만, 지난해 미국 정부가 반도체 최첨단 제조시설을 구축하는 데 필요한 장비를 얻을 수 없도록 수출통제조치를 취하면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그리고 인텔이 남았다. 최첨단칩 제조와 관련해 두차례 실패했지만 인텔은 최근 파운드리사업을 이어가겠다고 선언했다. 200억을 투자해 애리조나주에 공장 2곳을 짓겠다고 했다.

하지만 일부 업계 전문가들은 회의적이다. 글로벌 투자은행 'CLSA'의 기술연구 헤드인 세바스찬 후는 "어려울 것"이라며 "인텔은 몇년 전 최고의 공정기술을 갖고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TSMC는 쉽게 따라잡히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올해 막대한 투자계획을 밝힌 TSMC는 선두를 유지하겠다는 강한 결의를 내비쳤다. 반도체장비 제조사의 한 CEO는 "올해 TSMC의 자본지출 상당몫은 극자외선(EUV) 리소그래피 장비 구매에 투입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최첨단칩 제조에 필수불가결한 장비다.

EUV 장비시장을 독점한 네덜란드 ASML은 최근 실적보고에서 "공급이 수요를 따라갈 수 없다"고 밝혔다. 업계 관계자들은 TSMC가 올해 주문하는 모든 장비가 경쟁자들과의 격차를 벌리는 데 일조할 것으로 본다.

앞서의 장비 제조사 CEO는 "인텔이 자체적인 어려움을 해결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TSMC와의 격차는 더 커질 것"이라며 "TSMC는 당분간 초격차를 유지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