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부 "국가면제 인정돼야"

변호인단 "납득할 수 없어"

위안부 피해자들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두번째 손해배상 소송에서 재판부가 소송을 각하했다. 지난 1월 1차 소송에서는 원고 승소 결과가 나왔는데 다른 재판부에서는 소송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판단을 한 것이다.

21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15부(민성철 부장판사)는 고 곽예남·김복동 할머니 등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 등 20명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각하했다.

재판부는 "지난 시간 한국정부의 노력이 위안부 피해자 고통과 피해 회복에 대해 미흡했을 것으로 보이고 2015년 한-일 합의역시 피해자 만족스럽다고 볼 수 없다"고 전제한 뒤  "피해자들이 실체법상 청구권이 있음을 부정하지 않고, 양국 합의가 모두 해결됐다는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국제관습법 판례 등을 따르면 주권적 행위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고, 법원은 국제관습법에 따라 판단할 수밖에 없다"며 "대한민국 헌법에 따라 해결은 대한민국이 외교 교섭을 포함해 대내외적 노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각하 이유를 설명했다.

◆"국가면제 인정하면 불확실성 커져" = 이번 재판 역시 반인권 범죄에 대한 국가면제를 허용할지가 쟁점이 됐다. 국가면제는 한 국가의 법원이 다른 국가의 공권력 행사에 재판권을 행사할 수 없다는 국제 관습법 중 하나다. 국가간 평등 원칙상 한 국가가 다른 국가의 재판을 받는 것은 부당해 외교 등 다른 방법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는 취지다.

재판부는 "입법부(대한민국 국회)는 유엔 국가면제에 비준을 하지 않았고, 외교부 역시 유엔 국가면제에 대해 원론적 입장만 표명하고 있다"며 "2차대전 이후 세계 각국 법원에서 독일을 상대로 소송이 제기됐는데 이탈리아와 그리스 등을 제외한 모든 국가가 국가면제를 인정했다"고 말했다. 이어 "국가면제가 인정된 판결은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됐는데 재판관들은 12대 3으로 국제면제를 인정해야 한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심각한 인권침해를 이유로 국가면제를 인정한다고 해도 향후 국가면제에 대해 불확실성이 더 커진다"면서 "자국의 외교정책을 고려해 입법적 결정을 하도록 해야 하는데 국가면제를 인정한다면 얼마나 인정할지, 국익의 유불리를 냉정하게 고려해 세밀하게 해야 한다"고 말했다. 국가면제에 대해 법원이 허용할 경우 추상적 기준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국가면제 허용 범위에 대한 부작용이 이어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이날 판결은 고 배춘희 할머니 등 다른 위안부 피해자들이 낸 소송에 이어 진행돼 2차 소송으로 불린다.

1차 소송을 심리한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34부는 지난 1월 "일본제국에 의해 계획적·조직적으로 광범위하게 자행된 반인도적 범죄행위로서 국가면제를 적용할 수 없다"고 판결한 바 있다. 이 판결은 일본이 무대응 원칙을 고수해 확정됐다.

애초 개별 재판은 재판부마다 독립적 판단이 원칙이고, 국제법 이해 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사안이라 2차 소송도 원고 승소라는 결론이 나오기 쉽지 않을 것이란 관측이 우세했다.

2차 소송을 담당한 재판부는 올해 초 선고할 계획이었지만 추가심리를 이유로 변론을 재개하면서 선고가 늦춰졌다.

◆피해자단체 "퇴행적 판결" =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들은 2015년 당시 박근혜정부가 일본과 맺은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에 반발해 2016년 12월 28일 소송을 제기했다. 일본 정부가 송달을 거부하던 중 법원이 공시송달 절차를 통해 소송을 개시했다. 일본은 재판에 참여하지 않는 대신 국가면제(주권면제)론을 주장하며 반발했다.

이에 원고 측 변호인단은 "일본군 위안부와 같은 중대한 인권침해 문제는 국가면제가 적용되지 않는다"고 맞서왔다. 변호인단은 "(피해자들이) 최후적 수단으로 선택한 이 소송까지 국가면제를 적용하는 것은 재판받을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라며 "국가면제론을 반드시 적용해야 한다는 국제관습법도 없다"고 주장해 왔다. 또 "주요 국제인권조약 및 지역인권조약은 피해자가 실효성 있는 구제를 받을 권리를 독립적 인권으로 명시적으로 보장하고 있다"며 "자국민이 외국에서 가장 기본적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당했을 때 국적국은 해당 국민을 보호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이날 법원을 찾은 이용수 할머니는 재판 도중 법정을 나서면서 "결과가 좋게 나오나 나쁘게 나오나 간에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겠다"고 밝혔다.

소송을 대리한 이상희 변호사는 선고 직후 "납득하기 힘들다"며 "피해자들과 상의해 항소 여부를 결정하겠다"고 말했다. 이 변호사는 "소수자 인권 최후 보루가 법원인데 피해자들이 법원에 왜 오는지 진지하게 법원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단체 네트워크는 "역사를 되돌리는 퇴행적 판결"이라며 "피해자의 재판받을 권리를 제한하고, 인권중심으로 변화하는 국제법 흐름을 무시한 판결"이라고 비난했다.

오승완 기자 osw@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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