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공공도서관의 역사는 서양에 비해 200여년 정도 늦게 시작한다. 미국의 공공도서관이 1700년대 시작됐다면, 우리나라에서 근대적 개념의 공공도서관은 1900년대 시작됐다. 1955년 총 7개였던 공공도서관은, 2019년 1134개로 증가했다.

우리나라가 민주화와 경제 발전을 짧은 시간에 이뤄낸 것처럼 공공도서관 역시 압축 성장을 한 셈이다. 송승섭 한국도서관사연구회 회장을 만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도서관의 발전과 도서관 분야에서 기억할 만한 인물들, 도서관 역사를 기억해야 할 필요성 등을 들었다.

송승섭 한국도서관사연구회 회장. 명지대 문헌정보학과 교수. 사진 이의종


■우리나라에 근대적 개념의 공공도서관이 도입된 것은 언제인가.

서양에서는 민권 의식이 우리보다 일찍 싹텄다. 대중의 지식 욕구가 확산돼가던 19세기에 이미 풀뿌리 작은도서관들이 널리 퍼졌다. 1731년 프랭클린이 만든 필라델피아 도서관조합(Library company of Philadelphia)은 회원제 도서관의 효시로 공공도서관의 설립을 앞당겼다. 이런 운동은 100여년 지속됐다.

미국의 교육자 호러스 맨(Horace mann)은 지식 정보에 대한 보편적 접근을 중시하면서 무상교육과 무상도서관이 민주주의의 기초라고 주장했다. 도서관을 기반으로 한 시민교육을 통해 민주주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다. 1850년에는 영국에서 공공도서관법이 제정됐다. 이는 국가가 도서관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1926년 쯤 조선총독부도서관 앞에 줄을 서 도서관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는 이용자들. 주로 학생들이다. 자료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우리나라의 경우, 자생적으로 건립됐다기 보다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을 위한 도서관이 건립되면서 근대적 개념의 도서관이 들어왔다. 1876년 강화도조약 이후, 부산 강경 인천 등 일본인들이 경제적 수탈을 위해 정착한 지역에 이들을 위한 도서관들이 건립됐다.

■일제 강점기에 한국인을 위한 도서관도 있었나.

한국인들이 한국인들을 위해 건립한 도서관들이 있었다. 예컨대, 1900년대 초반, 평양에 대동서관이 만들어진다. 이곳은 서점이자 출판사이면서 동시에 무료로 대출하고 열람하도록 하는 도서관이기도 했다. 또 1906년에 국립도서관을 건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당시 장관급 정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정부 내 도서관을 건립하고자 했다. 서적도 10여만권 준비됐던 것으로 알려진다. 다만 아쉽게도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이 서적들은 조선총독부 등으로 이관됐다.

1926년 쯤 조선총독부도서관 내 칸막이가 설치된 열람실 풍경. 자료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당시 도서관 운영 행태는 어떠했나.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을 위한 도서관을 거의 이용하지 못했다. 당시 한국인들의 문맹률은 70~80%에 이르렀다. 초등학교 입학률은 남자 약 30%, 여자 약 6% 정도였다. 문맹률은 한국어 기준이며 일본어는 더욱 알지 못했다. 그런데 각 도서관들은 거의 일본어 책 위주로 소장하고 있었다. 따라서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는다는 인식 자체가 형성되지 않았다. 때문에 소위 학생 등 지식층들 위주로 도서관이 운영됐다.

■독립운동에 영향을 준 도서관들도 있었나.

1919년 3.1운동 이후 일본은 '무(無)도서관 정책'에서 '도서관 설립 정책'으로 변화했다. 당시 한국인들은 구습을 타파하고 자주독립 운동을 하려면 문맹률을 줄이고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는 기반이 필요하다고 봤다. 그리고 도서관이 그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 맥락에서 건립된 도서관이 1920년 경성도서관이다. 설립자는 조선독립신문을 만든 윤익선으로 2만여권을 소장했다. 그는 3.1 운동 때 신문을 만들다 감옥에 수감됐고 독립과 계몽을 위해 도서관 건립을 구상한다. 매일신보 기사에 따르면 경성도서관 개관식에 7000여명이 운집했다. 이들 대부분이 후원회원으로 등록했다.

다만 운영난에 1년 정도 운영되고 다른 도서관에 분관으로 흡수됐다. 또 윤씨는 말년에 전향했다.

1935년 조선총독부도서관 개관 10주년 기념사진. 앞줄 가장 왼쪽이 이재욱, 그 뒷줄 가운데 키가 큰 사람이 박봉석. 해방 이후, 이재욱은 초대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으로, 박봉석은 초대 국립중앙도서관 부관장으로 일했다. 자료 사진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도서관들은 어떻게 발전해왔나.

1955년 한국도서관통계가 시작됐다. 그해에 우리나라 전체 공공도서관은 7개에 그쳤다. 엄대섭이 마을문고 운동을 하게 된 계기였다. 도서관이 양적으로 부족한 상황에서 1963년에 도서관법이 제정되면서 국가 재정으로 도서관을 지원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만들어졌다. 예산과 조직을 확보한다는 측면에서 도움이 된 반면, 규제와 통제도 심해진 계기가 됐다.

1963년 공공도서관은 총 43개였다. 1960년대 경기도가 1군 1도서관 운동을 하며 도서관을 많이 건립했다. 1980년대부터 공공도서관은 조금씩 양적, 질적 성장을 했다. 다만 1980년대까지 군사독재가 계속되면서 도서관도 지적 자유 측면에서는 그 영향력 아래 있었다.

■기억할 만한 도서관 분야 인물은 어떤 분들이 있나.

가장 많이 알려진 인물은 박봉석 초대 국립중앙도서관 부관장이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도서관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목록규칙, 분류법 등 초기 우리나라 도서관 운영의 기틀을 잡았다.

당시 함께 활동한 이재욱 국립중앙도서관 관장은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다. 1935년 농촌도서관경영법을 썼고 신문에 칼럼을 많이 써 대외 인지도가 높았다.

백 린 선생도 있다. 한국전쟁 때 규장각을 수호한 사서로 알려져 있으며 1960년 '한국도서관사연구'를 펴냈다. 이후 하버드대 동아시아도서관인 옌칭도서관에서 근무하며 한국학 도서관의 위상을 정립했다.

■도서관의 역사를 아는 것은 왜 중요할까.

우리나라의 다른 분야처럼 도서관 분야도 압축 성장을 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역사를 돌아보는 데 소홀했다.

그러나 국가적 위상이 높아지면서 도서관과 사서의 위상도 높아졌다. 과거를 정리하고 돌아보며 오늘을 평가하고 새롭게 미래로 나갈 수 있는 시점이 됐다. 도서관이 사회 발전에 기여한 역사적 기억들을 시민들과 함께할 수 있었으면 한다.

특히, 올해는 엄대섭 탄생 100주년으로 한국도서관사연구회는 5월 말 기념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 은평구 응암정보도서관은 길 위의 인문학 프로그램 중 하나로 엄대섭을 조명했다.

한국도서관사연구회는 창립 첫해인 지난해 '일제강점기 도서관 간행물 목차집'을 펴냈다. 앞으로 엄대섭의 대한도서관연구회에 관한 책, '도서관 역사저널' 등의 출간을 준비 중이다. 또 '도서관 역사학교'를 운영하고 사료와 유물 수집을 병행할 계획이다.

송현경 기자 funnyso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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