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애 한국모금가협회 상임이사

올해 언론보도에 유난히 천문학적 숫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대장동 개발사업의 수익이 5500억원이고 몇년 일한 직원의 퇴직금이 50억원이란다.

그에 비하면 1억원은 우습게 느껴진다. 악착같이 쓰지 않고 모으면 몇년 안에 모을 수 있는 다소 현실적인 돈처럼 보인다. 어쨌거나 요즘은 돈이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공공연히 말하고 우리 자녀들은 돈이 최고라는 믿음을 가지고 자라난다.

베풂은 리더십의 주요한 덕목

펀드레이저(fundraiser, 모금가)라는 직업으로 20여년 기부금을 다루는 동안 '돈의 크기'가 '영향력'을 결정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큰 돈은 당장의 지배력과 권력 영향력을 상징하지만 그렇게 보일 뿐이다. 돈이 있다고 세상을 바꾸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의 생명을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위대한 업적을 성취할 수도 없다.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그 돈을 가진 사람들의 가치철학과 마인드다. 돈은 물처럼 사람의 그릇에 담길 뿐이다. 그릇이 깨끗하고 넓게, 귀하게 잘 만들어져 있으면 그 안에 담긴 돈은 귀하게 쓰인다. 가치철학 없이 돈만 많이 얻고자 하는 사람은 그 그릇이 물컵인지, 꽃병인지, 구정물통인지, 발 씻는 그릇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그저 많이 담는 것이 최고라고 여기는 것 같다.

자선(charity)은 인간 사회에 늘 있어왔다. 철학적 사조와 시대상, 종교는 각기 달랐어도 인류 사회는 항상 불평등했기에 누군가의 결핍을 더 많이 가진 자들이 채워주는 방식으로 유지돼왔다.

자선을 마땅히 해야 할 일로 받아들인 사람들 중에 그 사회를 이끌어가는 지성인과 지도자들이 많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말과도 의미가 상통한다. 스스로를 명확히 세우고 자기 삶이 안정되고 여유로운 사람이 지도자가 돼야 다른 이들을 공평하고 정의롭게 보살피기 때문이다.

결핍이 크면 철학과 가치는 안중에 없게 된다. 예나 지금이나 자신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결핍이 채워지지 않은 이들이 권력을 갖게 되면 사익에 집중할 가능성이 높아 만인의 지도자로 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베풂은 리더십의 중요한 덕목이기도 하다.

기적을 일으키는 기부 DNA

계급이 사라진 현대 사회에는 각자 풍성함을 따라 기부를 한다. 많은 기부자들을 만나보니 기부 DNA가 따로 있음을 알게 됐다. 그 DNA는 사람의 가치철학에 얹혀져 있다. 기부하는 사람은 세상의 변화, 삶의 변화에 대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혼자 잘먹고 잘사는 것에만 집중하는 사람은 하늘이 무너져도 알지 못할 가치다. 그들은 오히려 내가 왜 세상의 불평등을 책임져야 하냐며 따진다. 그릇이 딱 그만하다.

그런 이들이 돈을 더 많이 갖는다고 해서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 세상의 변화는 소유와 상관없이 자신의 믿음을 따라 행하고 작은 재물이라도 귀하게 쓸 줄 아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다.

생명을 살리는 일은 1억원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단 돈 1만원이라도 생명을 소중히 여긴다면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고 수십만명의 1만원들이 모여 세상을 바꿀 수 있다. 결국 가치를 알지 못하는 맹목적인 부자는 평생 살아도 자기 식구만 건사하지만 없는 살림에도 월 1만원을 꾸준히 기부한 사람은 수백명의 사람을 살리는 기적을 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