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인도중앙은행 총재 FT 기고 … "통화정책 효율성·포용성 제고 … 프라이버시 우려는 과제"

미국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디지털달러 발행 여부에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호주는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의 장점에 반신반의한다. 선진국 중 스웨덴 중앙은행 리크스방크가 가장 먼저 CBDC를 발행했지만, 여전히 탐색 단계다. 현재 상황으로, 영국중앙은행이 염두에 두는 브릿코인은 2025년 전엔 발행되기 어려울 전망이다.

선진국들의 신중한 입장은 신흥국과는 다소 대조된다. 상당한 신흥국들이 이미 CBDC를 발행하거나 발행을 계획중이다. 바하마는 이미 샌드달러를 발행했다. 중국은 여러 지역에서 디지털위안화를 시범운용하고 있다. 인도 의회가 곧 암호화폐 법안을 통과시킬 것이라는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디지털루피화 발행의 법적 근거가 마련될 예정이다.
스마트폰에 개설된 중국 디지털 위안화(e-CNY)지갑 화면. 중국은 여러 지역에서 디지털 위안화를 시범운용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선진국은 리스크 우려 더 커 = 인도중앙은행 총재를 지낸 두부리 수바라오는 26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기고에서 "선진국과 신흥국이 CBDC를 보는 각도는 다르다"며 "선진국들은 장점이 리스크보다 큰지 회의적이지만 신흥국들은 두려움 반, 기회 반으로 CBDC 발행을 검토중"이라고 전했다.

수바라오 전 총재에 따르면 신흥국이 가장 우려하는 지점은 민간이 발행하는 암호화폐가 법정화폐를 몰아내 통화주권을 훼손할 가능성이다. 물론 비트코인 등 초기 암호화폐에선 현실화되지 않았다. 하지만 달러나 유로화 등 기축통화와 일대일로 연계되는 스테이블코인에 이르러선 이야기가 달라진다.

스테이블코인들은 신흥국 금융네트워크에서 자본을 이탈시켜 자체 생태계로 흡수할 잠재력이 크다. 그렇게 되면 신흥국 중앙은행들은 자국 경제활동에 대한 통찰력을 잃을 수 있다. 기준금리를 설정하고 통화공급을 조절하고 인플레이션을 관리하는 중앙은행의 능력은 크게 훼손된다.

신흥국의 우려가 기우일까. 수바라오 전 총재는 "아니다"라는 입장이다. 수십억명의 고객을 보유중인 글로벌 거대 기술플랫폼들이 스테이블코인을 속속 계획중인 상황에서, 신흥국 통화가 초국적 디지털화폐로 대체될 가능성은 상상을 넘어 눈앞에 다가온 현실이라는 것. 그는 "대개의 스테이블코인은 달러와 연동될 전망"이라며 "미국은 이를 규제하기는커녕 사실상 기축통화인 달러의 영향력을 확대할 좋은 기회로 보고 있다"고 지적했다.

◆국경간 거래, 결제 비용 줄일 수 있어 = 신흥국들은 또 자국민이 민간 지급결제 시스템에 의존하게 되는 상황을 두려워한다. 중앙은행들은 민간 시스템에 대한 해킹, 정전사태 등이 통화 신뢰성을 훼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우려한다. 대안은 그런 우려가 적은 CBDC를 발행하는 것이다.

기회인 측면도 있다. CBDC가 국경간 거래, 국내 결제 비용을 줄이고 금융포용성을 높일 수 있다. 또 위조가능성을 줄이고 통화주조와 발행, 배급 비용을 절약할 수 있다 .

하지만 도전과제도 만만치않다. 우선 은행이라는 전통의 금융중개인을 배제할 수 있다. 사람들은 리스크가 따르는 일반은행의 예금을 위험이 없는 CBDC 계좌에 넣어두려 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예금 이자가 오르고 당연히 신용의 비용도 높아진다. 신흥국들의 경제성장이 점차 신용 주도로 전환되고 있는 시기를 고려하면, 신흥국 경제 전반에 충격을 줄 수 있다. 물론 대처가 불가능하지는 않다. 개인별 CBDC 보유 한도를 정하고 중앙은행이 지급하는 금리를 제한하면 완화될 수 있는 문제다.

더 큰 과제는 프라이버시일 수 있다. CBDC 거래는 현금과 달리 꼬리를 남긴다. 불법 금융거래를 억제하는 장점도 있지만 선의의 민간거래도 낱낱이 드러나는 부작용이 있다. 정직한 개인이라도 국가가 자신의 금융거래를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은 가벼이 넘길 일이 아니다. 대중의 신뢰를 높일 수 있는 엄격한 데이터보호법이 긴요하다.

수바라오 전 총재는 CBDC를 고려하는 신흥국들이 라틴 격언을 되새겨야 한다고 지적했다. '천천히 서둘러라'(festina lente). 우리로 치면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뜻이다.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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