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종 언론인, 전 한국일보 주필

"과외선생을 붙여서라도 반도체를 공부하라." 윤석열 대통령이 취임 한달째 되던 6월 7일 국무회의에서 장관들에게 한 말이다. 그날 회의는 반도체 공학자 이종호 과학기술부장관의 특강까지 곁들여졌다고 하니 '반도체 국무회의'라 할 만했던 모양이다.

윤 대통령은 왜 반도체에 꽂혔을까. 그 맥락은 5월 20일 한국을 방문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첫걸음에서 찾아야 할듯 싶다. 바이든은 비행기에서 내리자 곧장 삼성전자 평택 반도체공장으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윤 대통령을 첫대면하고, 함께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의 안내를 받았다. 2021년 취임 후 반도체 공급망을 국가안보 개념으로 인식했던 바이든의 마음 속은 반도체로 꽉 차 있었고, 윤 대통령이 그걸 놓칠 수 없었으리라.

반도체는 현대 산업의 혈액 같은 존재다. 반도체기업의 경쟁력이 바로 국가 경쟁력을 대변하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다. 미국은 중국과의 전략경쟁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 반도체 기술 및 공급망 확보에 안달이 나 있다. 미국의 반도체 생산 능력은 전세계의 12%로 줄어든 상태다.

바이든이 삼성반도체 공장을 찾은 지 며칠 후 인텔의 최고경영자 패트릭 겔싱어가 삼성 본사로 이 부회장을 찾아왔다. 인텔은 삼성의 반도체 분야 라이벌이자 고객이다.

겔싱어는 반도체산업과 관련해 미국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사람이다. 인텔은 미국 반도체산업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다. 그 인텔이 PC 시대에서 스마트폰 시대로 전환하면서 슬럼프에 빠졌다. 주식값은 계속 떨어지고 반도체 매출액에서 삼성전자에 밀리는 일까지 벌어졌다.

스마트폰 시대 슬럼프에 빠진 인텔

겔싱어는 인텔의 구원투수로 작년 2월 CEO로 취임했다. 그 타이밍이 반도체 공급망 구축을 최우선 정책으로 내세운 바이든 대통령 취임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다. 겔싱어는 인텔을 반도체 설계뿐 아니라 미국 땅에 제조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하는 '파운드리'(foundry)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반도체는 크게 두 종류, 즉 시스템반도체(프로세스칩)와 메모리칩으로 분류된다. 프로세스칩은 사람의 두뇌 역할을 하고 메모리칩은 데이터를 저장하는 도서관 역할을 한다고 비유해 볼 수 있다. 둘이 짝이 되어야 컴퓨터든 스마트폰이든 돌아간다.

삼성전자는 메모리칩의 강자이고 인텔은 프로세스칩 설계의 원조다. 두가지 반도체 모두 나노 단위의 초미세 첨단기술을 요구하지만, 프로세스칩이 반도체산업의 주연배우나 마찬가지다. 시스템반도체의 핵심은 설계 능력이다. 전기차 AI 메타버스 등 4차산업의 발달로 시스템반도체의 용도는 더욱 다양해지고 수요도 폭발할 것이다.

시스템반도체 칩을 설계만 하는 회사를 '팹리스'(공장이 없다는 뜻)라고 부르며 설계대로 칩을 제조하는 회사를 '파운드리'라고 부른다. 인텔은 프로세스칩을 설계해 자체 공장에서 만들기도 하지만 파운드리에 위탁해서 생산하기도 한다.

한때 '인텔인사이드'(Intel-inside) 로고가 판치던 시대가 있었다. 인텔이 만든 프로세스칩(CPU)이 내장되었다는 표시로, 이 로고가 없는 PC는 시장의 뒤쪽에 있어야 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약 15년 동안 인텔은 난공불락의 시스템반도체 요새를 구축했다. 헝가리 출신 전설적인 최고 경영자 앤디 그로브가 기술혁신을 선도할 때였다.

패트릭 겔싱어는 1970년대 말 18세에 말단 기술자로 인텔에 입사한 소년사원 출신이다. 품질관리에 몰두하는 겔싱어의 성격이 그로브의 눈에 들어 회사 사상 최연소 부사장이 되는 등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2004년 그로브가 은퇴하자 겔싱어는 새 CEO와 불화가 잦아 결국 회사에서 쫓겨났다.

우연의 일치였던가. 2007년 애플이 스마트폰(iPhone)을 내놓으면서 반도체산업에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애플은 처음에 인텔에 아이폰 앱(AP) 프로세스칩 설계를 제의했지만 순이익률에 집착한 인텔과의 협상이 결렬되자 영국의 반도체 설계회사 'ARM'을 선택했다. 반도체생산(파운드리)은 대만의 TSMC와 삼성전자에 떨어졌고 두 회사의 폭발 성장의 계기가 됐다. 억대 단위로 팔리는 PC 시장과 10억대 단위의 스마트폰 시장은 규모가 달랐다.

반도체 시장 흐름을 읽는데 실패한 인텔은 쫓겨났던 겔싱어를 불러들여 CEO를 맡겼고, 겔싱어는 인텔을 반도체 설계만 아니라 제조설비(파운드리)를 겸비한 기업으로 변신을 시도 중이다. 전세계 반도체산업의 큰 관심사다.

두뇌 경영 정책 결합된 생태계 육성을

'반도체 국무회의' 특강에서 과학기술부 장관이 던진 말 "메모리는 세계 최고수준이지만 시스템반도체는 기술 열위(劣位)"라는 대목이 한국 반도체의 위상을 잘 짚어주는 메시지다.

메모리칩을 넘어 프로세스칩으로 가는 길은 멀고 순탄치 않다. 두뇌 돈 경영전략 국가정책이 유기적으로 결합되는 활발한 반도체 생태계가 형성되어 프로세스칩 설계 벤처기업이 많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김수종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