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원 주천 노치마을 학살 재조명

기록·증언 재구성한 '가재 상흔'

최순호/남원미디어공방/2만원

전북 남원시 주천면 덕치리 노치마을. 백두대간의 마루금이 마을 한가운데를 지나는 국내 유일 마을이자 지리산 '둘레길 1코스'의 초입이다. 마을 앞 고리봉과 만복대에 억새가 많이 자라 갈재(갈대 노, 고개치)라 불렸던 곳으로 주민들은 가재마을로 부른다. '할아버지 당산'으로 불리는 뒷산 소나무와 노치샘은 백두대간 종주에 나선 탐방객과 영약을 찾는 산꾼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곳이다.

지리산 능선이 만든 운봉고원에 평화롭게 자리 잡았지만 속으론 70년 넘게 숨겨온 상처를 안고 있다. 1950년 11월 20일 새벽 전차부대가 들이닥치며 산골마을 천지가 뒤집혔다. 국군 제11사단 전차공격대대 부대원들은 이날 주천면 고기리 고촌, 내기마을, 덕치리 회덕 노치마을, 운봉면 주촌마을 주민들을 토끼 몰듯 몰아쳤다. 집에 불을 지르고, 자다 놀라 뛰쳐나온 사람들에게 총을 갈겼다. 요행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은 가재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희생됐다. 그렇게 40명 가까운 산골 사람들이 죽어갔다.

왜 죽었을까. 한국전쟁을 전후로 남원 지리산은 좌-우 이데올로기 대립의 복판에 놓였다. 빨치산과 토벌대의 주무대였다. 지금이야 문화도시·예향으로 불리지만 70여년 전 남원은 군사도시를 방불케 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이후 반군세력이 입산했고, 그해 11월 주천면 고기리 고촌마을에서 젊은이들이 국군과 경찰에 끌려가 집단으로 희생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후 군경은 공비 토벌과 빨치산 거점 제거를 명분으로 지리산 골짜기에 대한 소개작전을 펼쳤다.

"해명만 해줘도 좋겠어. 목적이 있으니까 와서 사람을 죽였을 것 아녀?"(정종원. 2008년 2월 12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위원회 진술).

일간지 사진기자 출신으로 6년 전 고향에 돌아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던 최순호씨(주천면 발전협의회 총무)가 지난해부터 경찰기록과 주민들 증언을 모으기 시작한 이유다. 최씨는 "수십 명의 주민이 희생된 사건에 위령비 하나 없이, 왜 발생했는지도 모르게 72년이 흘러갔다"고 적었다. 약 6개월간 미군정, 국방부 등 정부 자료와 신문기사를 찾고 희생자 가족들의 육성을 모아 '1950.11.20 가재 상흔'(사진)에 담았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울음소리 한번 뱉지 못하고 70여년을 삼켜야 했던 상흔이다.

과거사위원회 조사결과 남원시 일대에서 140여명의 민간인이 희생됐고 신분이 확인됐거나 추정이 가능한 희생자는 90명이다. 지리산에 산다는 이유로 애꿎은 목숨이 스러진 것도 억울한데, 차마 이름도 밝히지 못하는 죽음이 수십이다. 죽었으니 빨갱이가 되고 죄인이 된 셈이다.

최씨는 "일부 유족은 위령비에 들어가는 희생자 이름에서 자기 가족 이름을 빼달라고 요구하는 일도 있었다"고 전했다.

계획대로라면 고기리·덕치리 민간인 희생자 위령비는 오는 8월 15일 세워진다. 최씨는 '가재 상흔'이 위령비와 함께 이유 없는 죽음에 대한 해원의 시작이길 바란다고 했다. 지리산의 아픈 기억에 대한 진상규명과 민간인 희생에 대한 정부 차원의 책임있는 조치가 뒤따라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명환 기자 mha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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