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번역가

1970년대 초만 해도 미국의 백악관 기자단은 열심히 일해서 백악관 출입기자란 위치에 올라온 백인 중년남자의 엘리트 기자단이었다. 이들은 나중엔 경쟁적이 되었지만 당시엔 사교클럽 같은 성격이었다. 백악관 바로 옆, 연례 만찬회로 유명한 내셔널프레스클럽에는 전세계 신문 통신 방송기자단이 출입하며 주로 백악관이 부탁하는 행사와 발표문을 보도했다. 특종이나 비판기사는 없었다.

1972년 6월 17일. 워터게이트 호텔단지 내 민주당 당사를 한밤중에 침입한 5명의 공화당원이 도청장치와 거액의 현금을 가진 채 체포된다. 이 '이상한 절도사건'의 취재를 맡아서 결국 닉슨 대통령을 하야시킨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 두 기자는 워싱턴포스트의 백악관 출입기자도 정치부기자도 아닌 입사 9개월의 풋내기 지방담당 사건기자들이었다.

그래서 미국 언론은 워터게이트 이전과 이후로 역사가 갈렸다고 말한다. 두 기자의 끈질긴 추적과 오직 한 사건에만 매달린 집중 취재, 신문사측의 신뢰와 적극적 지원, 무엇보다도 '익명의 제보자 말'의 인용이 처음 허용된 기사작성, 미국 역사를 뒤집은 정치적 파장 등이 민주언론 역사의 획기적 분기점을 이뤘기 때문이다.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워터게이트 도청을 지시한 것 때문이 아니라,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연속적 거짓말과 무리한 대응의 수렁에 빠져 결국 하야했다. 하지만 당시 워싱턴에 있던 약 2000명의 기자들 중 마지못해서라도 워터게이트 사건을 다뤄 본 사람은 고작 14명이었다고 한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워터게이트가 터지고 나서 반년 동안 관련 기명기사만 217건을 게재할 정도로 이 사건에 집중했다. 기자를 단순히 머릿수로 생각해선 안되는 까닭이다. 회의적이던 타지와 방송사들도 나중엔 벌떼처럼 보도에 합류했다. 워싱턴포스트사와 간부들도 취재대상, 영화 소재까지 되었다. 언론사별로 차별이나 갈라치기를 해도 별 실익이 없는 이유다.

공정과 상식 무너뜨린 대통령 취재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보도와 관련해 MBC기자를 '가짜뉴스 보도'란 이유로 해외순방 대통령 전용기 탑승에서 배제한 데 이어 13일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한미 한일 정상회담 현장에도 동행기자단 80여명 중 한명도 들이지 않았다. 대통령실에서 두 회담을 '전속회담'으로 전환하고 관련 내용 요약과 영상 사진 등을 기자들에게 배포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행기자단 전원을 기자용어로 '물먹였다'. 회담 후에도 서면 보도자료 뿐 언론과의 질의응답은 '시간이 없다'며 생략했다.

1970~1980년대 군사독재시절의 '보도지침'의 악몽이 생생한 언론인들은 이것이 대통령의 언론계에 대한 지나친 무지 때문인지, '기분 나쁜' 기자들에 대한 분풀이 차원의 단세포적 '몽니'인지 혼란스럽다고 말한다.

게다가 13일 오후 8시 대통령전용기가 G20정상회의가 열리는 발리섬으로 이동하던 중 윤 대통령은 개인적 친분이 있는 특정언론사 기자 2명만 따로 불러 1시간 이상 대화를 해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렸다"는 비판까지 받고 있다.

위선희 정의당 대변인은 15일 국회 브리핑에서 "80명이 넘는 동행취재단을 배제하고 단 두명에게만 '취재편의'를 제공했다. 윤석열정부의 언론 차별과 통제가 점입가경이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마치 검사가 마음에 드는 기자에게만 정보를 제공하고 거래하는 범죄영화의 한 장면 같다. 진심으로 충언드린다. 그만 검사복은 벗고 대통령에 걸맞는 자격과 태도를 보여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 관계자는 발리 현장의 브리핑에서 "평소 알던 기자와 만나서 '편한 대화'를 나눴을 뿐, 취재와는 무관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취재기자단 대부분을 제외시키고 대통령의 주요 일정인 정상회담 뿐 아니라 부인 김건희 여사의 일정과 독자행보에 대해서까지 대통령실이 제공한 자료와 사진만 받아쓰게 한데 대한 반발과 파장은 상당기간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왜 어떤 기자에겐 탑승을 거부하고 어떤 기자와는 '편한 대화'를 나누는 것을 전세계에 내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다고 위 대변인은 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에서 배워야 할 것들

워터게이트 사건은 재선으로 기세등등하던 닉슨을 사임시켰다. 2명의 기자가 미국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다. 뉴욕타임스에 밀려 지방지로 고전하던 워싱턴포스트를 전국적인, 전세계적인 언론사로 우뚝 세웠다.

두 기자는 1972년부터 4년간 이 사건을 취재한 취재수첩 250여개와 관련 기사들, 출장비 영수증과 비행기표까지 수천 건의 증거물을 나중에 500만달러에 텍사스대학에 팔았다. 그래서 '워터게이트 문헌'이라는 중요한 역사기록의 수장고가 생겼다.

권력자가 기사를 삭제하고 기자를 닦달하고 요리하고 언론사를 폐쇄해도 모든 것은 기록으로 남는다. 격동의 한국 현대사에도 그런 증거는 차고 넘친다.

차미례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