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번역가

페루의 디나 볼루아르테 신임 대통령이 독립 200년 만에 첫 여성 국가원수가 된지 사흘만인 10일에 정식 취임식을 갖고 '부패척결'을 내세우며 국민의 협조를 호소했다. 하지만 전국적 시위로 정치적 혼란 속에 2명의 사망자까지 나오자 결국 12일 시위대 요구에 굴복, 의회에 조기선거 실시를 제안하겠다고 대국민 방송연설을 통해 밝혔다.(AP통신)

페드로 카스티요 전 대통령의 탄핵 축출로 부통령에서 대통령직에 오른 볼루아르테는 스페인어와 원주민의 케추아 말(원래 잉카문명권의 공용어)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선거유세로 2021년 총선에서 페루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당선됐다.

60세의 볼루아르테는 페루 전역에서 그녀 역시 사임하고 대통령과 국회의원 전체를 재선출하는 조기 총선을 실시하라는 시위가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새 내각을 발표했다. 8명의 남성과 8명의 여성 장관들에게는 "재임 중 어떤 부패행위도 저지르지 않고 신의와 충성으로 임무를 수행하겠다"는 선서까지 시켰다.

카스티요는 야당이 우세한 국회가 자신의 세번째 탄핵소추안을 의결하기 불과 몇시간 전에 의회를 해산하려는 무리수를 두려다가 실패해 탄핵당했다. 하지만 농부와 노동자들의 지지를 얻고 있던 그는 탄핵을 면하려고 야당의원들에게 현금을 돌린 것이 폭로된 직후에 황급히 의회를 해산하려 한 '반란혐의'로 구금됐다. 안데스 원주민 출신의 그는 17개월의 짧은 재임기간 중에 무려 70명의 장관들을 계속 갈아치웠다. 그 일부는 비리혐의로 기소당했다.

볼루아르테는 남은 임기 3년 반인 2026년 7월까지 자신이 대통직을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시위대는 당장의 조기 총선을 요구했다. 카스티요 지지 시위대는 집요하게 시위와 파업투쟁을 계속해 결국 볼루아르테는 12일 "의회에 2024년 4월 총선 일정을 제안할 것"이라고 밝히며 한발 물러섰다.

카스티요, 구금상태에서 탄핵불복 주장

그러나 현재 구금상태인 카스티요는 옥중편지를 통해 자신은 국가원수직을 포기하지 않겠다며 시위를 부추기고 있다. 카스티요는 트위터에 올린 자필 편지에서 대통령직을 이어받은 디나 볼루아르테를 '권력강탈자'라고 비판하며 국가원수로서 '높고 신성한 역할'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볼루아르테의 조기선거 제안에 대해서도 "권력강탈자가 최근에 말한 것은 쿠데타 우파의 분비물 같은 말"이라면서 "새로운 선거라는 추잡한 게임에 속아 넘어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리마에서 시위에 참가한 노동자 마우로 산체스는 "정부는 국민의 투표를 우습게 여겨왔다. 이런 마피아 같은 자들에게 더 이상 통치받지 않으려고 우리가 시위에 나섰다"고 외신기자들에게 설명했다.(AP통신)

페루는 의회의 탄핵권이 확대되면서 지난 6년 동안 6명의 대통령을 거쳤고 그중 3명은 탄핵이 연속된 2020년 단 1주일 동안에 잇따라 교체되었다. 이런 권력투쟁이 계속되는 동안 안데스산맥의 나라 페루는 수천명의 자영농들이 50년만의 한발과 싸우면서 생존의 위기에 내몰렸다.

심한 가뭄으로 농부들은 감자 파종을 하지 못했고 풀이 모두 말라죽어 수많은 양떼와 알파카 등 축산업도 유지할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정부는 지난주부터 5차 코로나19 대유행을 선언했다. 코로나19 발생 이후로 감염자가 430만명, 사망자는 21만7000명에 달한다.

볼루아르테 대통령은 새 의회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카스티요와 마찬가지로 지난 1월에 두 사람을 정·부통령으로 뽑아준 소속 극좌 정당으로부터 축출당했기 때문에 조기 총선 결과에 따라 조기 퇴진이 불가피하다.

정부와 의회의 극한 대립으로 인한 페루의 정치위기는 결국 '인종차별적 탄핵'이라며 반대하는 시위대의 고속도로 봉쇄와 극심한 국민 분열로 악몽의 끝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극단적 권력투쟁에 침몰위기 내몰려

정치를 잘 모르면서도 대통령에 당선된 후 자리 욕심에 무리한 정파적 행동으로 탄핵을 맞은 카스티요와 '농민의 아들'에 대한 탄핵 취소를 요구하는 전국 시위대의 행동으로 페루는 국가적 혼란과 침몰위기에 내몰렸다.

남부 농업지대의 고속도로를 봉쇄한 '페루농업농촌전선'은 카스티요 석방과 조기선거 뿐 아니라 헌법개정까지 요구하고 있다. 기득권 정치세력의 '법대로' 계속된 탄핵과 정치불안의 요인을 아예 뿌리 뽑겠다는 기세다. 마주 달리는 기차를 보는 것 같다.

전문가들은 "현재 페루정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대책은 대통령이 국민의 불만의 파도를 진정시키고 의회에 지지세력을 총동원한 연합체를 만들어 낼 수 있느냐 여부에 달려있다"고 말했다.(리마 가톨릭대 오마르 코로넬 교수)

볼루아르테는 조기총선 뒤에도 정권을 유지하며 국민통합과 의회세력을 규합해 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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