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미례 언론인·번역가

윤석열 대통령이 아랍에미리트(UAE) 국빈방문 중 15일 현지 파병 한국군 아크부대에서 "UAE의 적은 이란"이라고 발언한 것을 두고 또 파란이 일어났다. 어제 열린 국회 외교통일위원회에서 여야는 윤대통령의 발언을 놓고 날선 공방을 벌였다.

야당은 윤 대통령의 입이 외교안보 불안이며 외국 순방 때마다 '외교참사'가 일어난다고 비난했다. 이에 대해 정진석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UAE 국민들 입장에서 가장 위협을 느끼는 중동 국가가 이란 아니냐"고 응원에 나섰다. 같은 당 하태경 의원은 통역이 문제라면서 "내용적으로는 위협과 같은 뜻이니 대통령이 적이란 단어를 썼어도 외교부가 위협으로 통역해 줘야 한다"고 거들었다. 참으로 창의적인 해석이지만 궁색하다. 외교적 언어는 총탄과 같아서 사후 거둬들이거나 수습이 힘든 게 세계사의 교훈이다.

1945년 7월 26일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무조건 항복'과 '완전한 파멸' 중 하나를 택하라는 포츠담선언을 발표했다. 일왕 히로히토는 "중의원과 '협상에 의한 강화'를 결정했으니 '무조건 항복' 조항을 지워달라"고 했다가 트루먼 대통령에게 거절당했다. 그러자 일본 지도자들은 당장 답변하는 대신 천천히 외교적 노력을 하겠다면서 "무조건 항복에 대한 답변은 당분간 삼가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런데 일본인 번역자가 '묵살'과 '언급을 삼간다'는 두가지 뜻을 가진 '모쿠사츠'(もくさつ)란 단어를 '묵살한다'고 영문으로 번역하는 큰 실수를 저질렀다. 격분한 미국 지도자들은 일본의 '묵살'에 대해 2주일도 못돼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대답했다.(허시 골드버그 저 '대실수') 외교적 실수나 잘못된 말은 한 나라와 인류의 운명을 참혹하게 망가뜨릴 수 있다.

"UAE 적은 이란" 발언으로 물의

이란정부는 "윤 대통령이 UAE를 포함한 폐르샤 연안국가들과 이란이 역사적으로 우호관계에 있으며 급속하게 일어나는 긍정적 전개를 모르는 것 같다"며 "한국의 입장, 특히 한국 대통령의 발언을 심각하게 지켜보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다"는 외교부 성명을 내놓았다. 실언을 인정하고 사과하라는 완곡한 압박이다.

대통령실은 "한국 장병들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군이 우리의 적, UAE의 적은 이란"이라며 발언한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순방중인 국가원수의 발언을 사적 모임의 말실수처럼 주장하는 것도 부적절하다는 반응이다.

우상호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장병을 격려하는 취지라도 지나친 말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라며 "인접국 관계를 악화시킬 수 있는 발언은 적절하지 않다"고 말했다. 황 희 의원은 "UAE 정부와 이란은 전에도 주적 관계가 아니었다. 잘못하면 이란과 UAE를 이간하는 것"이라고 비난했다.

문제는 윤 대통령의 발언 수위가 갈수록 호전적이고 과격해지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달 26일 북한 무인기의 영공침범 후엔 "확전 각오" "압도적 대응" "백배 천배 대량응징 보복" 등 강경 메시지를 쏟아냈고 군과 국방부는 "북한정권 종말"까지 외쳤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가족을 잃은 많은 한국민들은 대통령의 이런 즉흥적 발언과 국방 부서의 강경대응이 안보 재앙-전쟁으로 이어질까 불안할 수밖에 없다.

한국전쟁 정전 70주년을 맞은 올해에 교전이나 핵무기 사용도 불사하겠다고 하는 것은 한반도 평화나 비핵화 목표와는 동떨어진 망국적 행동이다.

윤 대통령의 대북정책은 대선 후보 시절 "미국에 전술 핵배치와 핵공유를 요청하겠다"고 공약했다가 바로 다음날 미 국무부가 "지지하지 않는다"고 단칼에 공식부인 당한 적도 있다. 올 초에는 "미국 핵전력을 '공동기획-공동연습' 개념으로 운용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고 했지만 바이든 대통령이 미국 기자들의 확인 질문에 "노!"라고 단호하게 부인했다.

미 국방정보국(DIA)을 거쳐 CIA한국 지부장을 지냈던 브루스 클링너 해리티지재단 연구원도 "한반도 전술핵공유는 미국과의 긴장을 유발하고 북한의 선제공격 위험을 키워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새해 뉴시스통신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밝혔다. 그는 비핵화 정책 목표 포기는 다른 나라에도 위험한 신호를 보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1950년대 주한미군 통제 하에 전술핵무기를 배치했지만 점차 수를 줄이다가 1991년 완전히 반출했다. 지금은 북한이 목표로 삼기 어려운 이동식 공중 해상 플랫폼을 기반으로 삼고 있어 과거로 역주행하기 어렵다.

'내 편 아니면 적군'식 정치에 국민 지쳐

야당을 종북 주사파로 몰아붙이고 한반도의 전쟁불사를 외치는 윤대통령은 여당 내부인사 조차 '내편 아니면 적'으로 축출을 일삼으며 집권 8개월여를 보냈다. 매일 끝없이 쏟아지는 친윤 반윤 뉴스, 적대적 좁쌀정치에 지쳐가는 국민들은 지금이라도 갈등해소와 화합의 제스처를 원하고 있다. 다음 총선의 승리는 그 결과에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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