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난처한 입장에 처했다. 정부가 일제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본 대신 돈을 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제3자 변제방식'이라는 그럴듯한 해법이다.

윤석열 대통령은 검사 시절부터 강제동원 해법을 고민했다고 했다. 윤 대통령은 정치에 입문하면서 이 문제가 대법원 판결로 인해 법적으로 제기된 문제인 만큼 법적 해법을 먼저 풀어야 이에 따른 정치외교적 갈등도 해소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 대통령은 최근 '요미우리'와의 인터뷰에서 "내가 생각한 것"이라며 은근히 자랑했다.

'제3자변제' 당사자 동의 구해야

그러나 '제3자변제'라는 묘수는 법적 오류에 빠져 '외통수'가 될 처지다. 피해당사자들이 거부하기 때문이다. 대법원에서 배상판결을 받은 15명 가운데 생존자인 양금덕(94) 김성주(95) 이춘식(100)씨는 변호사를 통해 정부의 '제3자 변제'를 거부한다는 입장을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 '내용증명'으로 보냈다. 양금덕 할머니는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런 돈은 안 받는다"고 했다.

물론 일부 피해자 유족들은 정부 방안에 따르겠다고 하지만 받지 않는 사람이 있는 한 대법원 판결이 '없던 일'로 되지는 않는다. 현재 소송 중인 사람만도 1000여명에 달하고 정부에 피해자로 공식 접수된 사람은 21만여명이다. 정부는 이들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당장 이슈화된 15명에 대해 급한 불부터 끄자는 식이다.

우리 민법 제469조(제3자의 변제) 제1항에 '채무의 변제는 제3자도 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채무의 성질 또는 당사자 의사표시로 제3자의 변제를 허용하지 아니하는 때에는 그렇지 않다'고 단서를 달고 있다. 게다가 같은 조항 제2항에는 '이해관계없는 제3자는 채무자의 의사에 반해 변제하지 못한다'고 규정해 정부가 내놓은 제3자 변제는 벽에 부딪혔다.

배상을 거부하는 미쓰비시와 일본제철 국내 특허권 등에 대한 강제매각(현금화) 여부에 대한 소송이 대법원에 오랜 기간 계류돼 있다. 대법원은 2018년 개인배상청구권을 인정한 만큼 강제매각을 승인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대법원이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단'을 십분 수용하더라도 법에 없는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주심인 오석준 대법관은 대법원에서 가진 취임식에서 "가치관에 따른 양자택일을 하지 않고 정답에 가까운 그 무엇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겠다"고 했지만 뾰족수가 있을지 의문이다. '술 친구'인 윤 대통령이 제시한 '제3자 변제'라는 해법이 정답이 아니고 차선이라도 되려면 일본의 상응조치가 있어야 한다. 강제동원 피해자들은 일관되게 "일본측의 진심어린 사과와 배상"을 요구해왔다. 직접 배상이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본측이 재단에 기금을 내놓아야 한다.

대한변협도 "재단을 통한 배상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면서도 "정부는 해당 일본 기업은 물론 일본정부에게 지속적으로 책임있는 조치를 촉구해 궁극적으로는 대법원 판결의 취지를 실질적으로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대통령도 궁극적으로는 대법원의 판결을 거스를 수는 없다는 취지다. 과거 정권들이 '고도의 통치행위'라는 이유로 했던 일들이 '직권남용'으로 고초를 겪는 것도 결국 '법치'라는 대명제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국내기업들이 기금을 출연한다지만 '채권 변제의 실효성도 없는 의무없는 일'이 되면 배임 등 또 다른 위법 논란의 소지가 있다.

강제동원 해법 대법판결이 기준

윤 대통령은 2018년 한국 대법원 판결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과 사실상 모순이 있다는 취지의 발언도 했다. 대법원 다수 의견으로 개인배상권을 인정한 것을 부인한 셈이다. 윤 대통령은 "모순되거나 어긋나는 부분이 있더라도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것이 정치 지도자가 해야 할 책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윤 대통령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 피해자와 가해자를 설득 조정하는 지도자의 역량을 보여주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일본이 금과옥조처럼 여기는 한일청구권협정도 정상적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한일수교를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6.3 사태)가 나자 계엄령을 내리고 군대를 동원했다. 박 대통령 역시 '국익과 미래를 위한 결단'이었을 것이지만 국민 동의 없는 일방통행이 낳은 후과가 수십년간 계속되고 있다. 역사나 정치논쟁은 차치하더라도 법률가인 윤 대통령이 최고 사법부인 대법원의 판결을 지켜주길 당부한다.

차염진 기자 yjcha@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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