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형 한동대 교수 국제정치학, 전 국립외교원장

윤석열정부는 3월 6일에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했다. 행정안전부 산하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1965년 한·일협정 자금을 지원받은 국내 기업이 자발적 출연으로 기금을 내서 대법원 배상 확정판결을 받은 피해자들에게 위자료를 대신 지급하도록 하는 소위 '제3자 변제' 방식이었다.

대한민국의 헌법정신에 반하고, 불법 강점의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수정주의 역사관을 묵인하며, 행정부가 사법부의 판결을 뒤엎는 3권분립의 민주주의 원칙을 훼손하는 조치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가장 치명적인 것은 피해자 요구의 핵심인 일본 정부와 전범 기업의 사과와 배상이 빠져있다는 사실이다. 그동안 한국의 대법원 판결에 반발하면서 강제동원 사안의 존재 자체를 거부해온 일본의 입장만을 전적으로 받아들였다.

해법 발표 후 10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해 정상회담을 했다. 박 진 외교부장관은 "물컵의 반(半)을 우리가 채웠으니까 나머지 절반을 일본에서 채워줬으면 좋겠다"고 했지만 정상회담에서는 물컵의 '반잔'을 채우기는커녕 '빈잔'임을 재차 확인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한국 정부가 일본 정부를 대신해서 변호하는 모습이다. 전임 정부가 북한의 선의에만 기대던 잘못된 대북 정책을 했다고 비난을 퍼부었던 현 정부는 강제동원 해법에서는 일본의 선의만을 고집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선의에만 기댄 채로 일방적 대미 투자를 하고서는 인플레이션감축법안(IRA)과 반도체법안의 독소조항으로 뒤통수를 맞았다.

국민 돌파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은 오판

해방 후, 한일 양국은 두개의 기억이 엇갈려 왔다. 기억은 곧 역사다. 피해자가 기억하고, 대한민국의 정통성이 기억하는 역사는 일본 제국주의의 불법 강점과 그로 인한 무수한 피해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부인하거나, 애써 외면하거나, 또는 애매한 유감 표명만 있었다.

현 일본정권의 핵심 뿌리인 극우세력의 기억은 "침략의 정의는 확립되지 않았다"며 일본의 제국주의 침략을 미화한다. 일본군 '위안부'와 강제동원의 불법성도 외면하고, 한반도 침탈의 기억을 지워버리는 교과서를 발행한다.

또한 영토를 넘보며 주변국들과의 갈등을 일으키고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위태롭게 하면서 소위 '적극적 평화주의'라는 이름으로 국제사회에 공헌하겠다는 일본의 이중적 행태는 의도된 기억의 왜곡이다.

기시다 총리는 왜곡의 기억을 계승한다고 했고, 윤석열 대통령은 저항 하나 없이 이를 수용했다. 미국의 민주당 정부는 인권과 민주주의의 가치 외교를 내세워왔지만, 수많은 사람에게 수십년 간 저지른 인권침해를 고의로 덮어버린 위선을 택했다. 따라서 한미일 정부는 기억을 왜곡시키고 피해자와 역사에 폭력을 가한 공모자다.

두개의 엇갈린 기억은 두개의 다른 시작을 배태한다. 박 진 외교부장관은 강제동원 해법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대한민국의 높아진 국력과 또 국위에 걸맞은 우리의 대승적 결단이다. 정부가 이 문제를 도외시하지 않고 책임감을 가지고 과거사로 인한 우리 국민의 아픔을 보듬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문제 해결의 끝이 아닌 진정한 시작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의 진실성은 물론 믿기 어렵다. 비판을 모면하기 위한 가짜 시작으로 읽힌다. 그럴 진심이 있었다면 처음부터 일본의 입장만을 염두에 두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을 것이다. 국면을 빠져나가려고 준비한 교활한 꼼수와 위장의 시작일 뿐이다.

진짜 시작은 다른 데 있다. 우리 국민의 저항이다. 국가가 압도적인 역사에도 불구하고 동학부터 촛불항쟁까지 국가가 선을 넘을 때 우리 국민은 용납하지 않았고, 그것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저력이다. 이명박정부는 지소미아를 밀실에서 추진하다가 저항에 직면했고, 박근혜정부는 굴욕적인 위안부 합의로 흔들렸다. 같은 뿌리의 정권이 다시 유사한 일을 벌이는 것은 이번에는 돌파할 수 있다는 자기확신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산이다.

타인의 자유 범하지 않는 게 진정한 자유

잘못된 기억은 잘못된 시작을 낳는다. 잘못된 기억으로 인한 잘못된 해법으로 한일관계가 기울어지고, 한미일의 군국주의자들이 신냉전 질서를 획책하고 있다. 친일 프레임은 친북 프레임만큼이나 비생산적인 정치 공방이라는 점은 동의하지만 신뢰할 수 없는 일본과 안보협력, 그리고 한계가 특정되지 않는 안보협력을 확대한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위험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한미일 군사협력의 정당성을 자유라는 가치에서 찾는데,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타인의 자유를 침범하지 않고, 배제하거나 상처를 줘서는 안된다. 힘을 가진 개인이나 국가가 폭력을 행사하고 반성하지 않는다면 자유라는 가치로 함께 갈 수 없다. 기억이 정확해야 시작이 올바르고, 시작이 옳아야 진정한 미래가 있는 것이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