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구속된 학생 260여명도 절반 이상 못 받아 … 수형·퇴학기록 확보 '절실'

내년이면 학생독립운동 90주년이다. 이 운동은 광주에서 촉발된 1929년 11월부터 전국으로 번진 1930년 3월까지 일어난 항일운동을 통칭한다. 학생독립운동은 3.1운동, 6.10만세운동과 함께 3대 독립운동으로 불린다. 학생독립운동은 전국 320개 학교 5만4000여명이 참여한 3.1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국적 독립운동이었다. 이 운동에 참여해 옥고를 치르거나 퇴학당한 학생들은 1930년대 후반부터 농민운동과 사회운동에 헌신했다.
하지만 이런 역사적 위상과 달리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군사정권 시절인 1970년 국가기념식에서 제외됐다. 문재인정부가 출범한 올해 다시 정부주관 기념식이 열리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특히 학생독립운동과 관련된 독립유공자가 212명에 불과해 추가 서훈이 시급한 실정이다. 다행히 정부가 올해 독립유공자 포상심사기준을 완화하면서 지난 17일 학생독립운동과 관련해 6명이 뒤늦게 정부포상을 받았다.
당시 조선총독부 고등법원 검사국 사상부에서 작성한 '신원조'에 포함된 318명 가운데 192명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했다. 1929년과 1930년 학생시위와 관련해 경찰과 검찰 처분을 받은 2600여명은 공적 확인이 필요하다. 해방 이후 사회주의 활동때문에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내일신문은 학생독립운동에 헌신했으면서도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사람들을 기록한다. <편집자 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심사기준 완화방침'을 밝히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에 참여했다가 옥고를 치르거나 퇴학당한 이들에 대한 추가 서훈 기대감이 커지고 있다.

하지만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등이 펴낸 '광주학생독립운동사'의 기록을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정보'와 비교한 결과 대다수가 서훈을 받지 못한 것으로 확인됐다. 보훈처 기준이 지나치게 엄격하고 근거자료가 없어서다. 추가 서훈을 받으려면 참가자 수형·퇴학기록을 시급히 확보해야 한다.

독립운동을 이끈 성진회

일제는 시위 초기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한국인과 일본인 학생사이의 단순 충돌로 파악하고 조기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시위가 계속되자 경찰을 총동원해 검거하고 수색했다. 이 과정에서 비밀결사 조직인 성진회 지도 아래 독서회와 소년회 등이 각 학교 학생들을 조직적으로 동원한 증거를 잡고 무차별 구속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사에 따르면 광주에서만 학생 260여명이 구속됐다. 시위에 참여한 보안법 관련자 49명, 성진회 관련자 38명, 독서회 관계자 90명, 소년회 관계자 11명 등 173명은 재판에 회부됐다.

성진회는 당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이끈 지도부 성격을 띠었다. 윤준식 광주학생독립운동동지회 부회장은 "성진회가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그 중 장재성이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에서 유학한 장재성(1908~1950 광주 출생)이 1926년 11월 광주고보 재학 당시 광주농업학교 학생들과 함께 비밀결사조직 성진회를 만들었다. 그는 1927년 도쿄의 주오대학에 입학, 1928년 국내에서 식민지 노예 교육제도 철폐와 한·일인 공학제도 반대를 촉구하는 동맹휴학이 일어나자 귀국해 지도했다. 1929년 6월 주오대학에서 퇴학당하자 곧바로 귀국해 조선공산청년회에 가입했고 같은 달 성진회를 확대한 독서회 중앙부를 결성해 학생운동을 지도했다.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독서회를 중심으로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다 검거돼 학생운동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징역 7년을 받았다. 그는 1962년 독립운동 공적이 인정돼 건국공로훈장 대상자로 결정됐지만 좌익 활동이 문제가 돼 제외됐다.

장재성과 함께 구속된 성진회 관련자 중 왕재일 최규창 등 25명은 독립유공자가 됐다. 하지만 임주홍(징역 3년6월) 임종근(징역 3년) 김몽길·여도현(징역 2년 6월) 최상호·임종대·김필재·유상걸(징역 2년) 나승규(징역 1년6월) 등은 서훈을 받지 못했다.
 


학교에 조직된 독서회

독서회는 성진회 지도를 받아 학교마다 조직됐다. 당시 독서회는 주로 사회주의 사상 등을 공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비밀결사 조직인 독서회는 보안유지 때문에 7~8명 정도로 구성했다. 이들은 각 학교 학생들을 선동해 광주역 등에 집결해 일본 학생들과 대치했고, 선두에 서서 식민지 노예교육 철폐를 주장했다. 일제는 1·2차 시위를 단순 충돌로 생각하다가 독서회 명부 발견을 계기로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로 인해 무려 90명이 구속됐으나 20명은 면소(공소권 없음)됐고 70명은 재판에 회부됐다. 이중 김상환(징역 4년)이 재판 도중 "학생 신분으로서 책을 읽었을 뿐이며, 재판장이 공정한 심리를 해 주기를 바란다"고 요구했지만 일본인 재판장은 이를 무시하고 일사천리로 재판을 진행했다. 이 사건으로 김상환·송두식·조길룡(징역 4년) 등 45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그렇지만 아쉽게도 이신형·황상남·정해두 (징역 3년 6월) 신명철·김종화·이영백 (징역 3년) 문학연·김종섭·최규문·신휴근·송두현·김종기·김문일·김현수(징역 2년 6월) 이수동·최달봉(금고 6월) 박기순·남일남·문명렬·유지선·박동인·이정오·정형규(금고 4월) 등이 미서훈자로 남아 있다.

무차별 적용된 보안법

단순 시위 주동자는 보안법 관련자로 분류됐다. 이 가운데 황남옥은 1929년 11월 3일 광주고보 학생 최쌍현이 일본 학생이 휘두른 칼에 찔려 다친 사건에 항의해 광주역 시위에 참여했다. 광주역 시위 참가자는 삽시간에 400여명으로 늘어났다. 투석전과 육박전이 벌어지는 동안 광주여고보와 수피아여고 학생들이 부상자를 치료하고 돌을 날랐다. 학생들은 이날 시위 이후 2차 학생독립운동을 준비했다. 일본 경찰은 1·2차 시위에 참가한 49명을 보안법 관련자로 재판에 부치고 전원에게 금고형 이상을 선고했다. 이 가운데 김향남 등 24명이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았다.

하지만 김안진(금고 8월) 최상봉·김홍남·김동섭(징역 6월) 김용대(금고 6월) 황남옥·고광신·정상열·임한길·구용우·김의원 (징역 4월) 김철근·오종필·최희섭·이인규·문학연·체세영·위종렬·박인철·이준범·정주영·윤재병·최가봉·정대린·장석진 (금고 4월) 등은 서훈을 받지 못했다.

여학생 시위를 이끈 '소년회'도 있다. 중심 인물인 장매성(광주여고보)은 1930년 9월 최고형인 징역 2년을 받았다. 당시 그는 늑막염으로 건강이 극도로 악화됐지만 보석까지 거절당했다. 이 사건으로 장매성 등 9명이 서훈을 받았지만 유일하게 '암성금자'만이 미서훈자로 남아있다.

미서훈자 유족들은 정부의 추가 서훈을 간절히 원한다. 아들 김소헌(76)씨는 "평생 소원이 아버지 서훈"이라고 절박한 심정을 전달했다.

학계에선 추가 서훈에 대비해 '수형기록과 퇴학자료' 확보를 강조했다. 이계형 국민대 특임교수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을 민족 운동의 중심에 세우기 위해서는 퇴학자 명단과 수형기록을 시급히 확보해 추가 서훈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광주학생독립운동 미서훈자 기록 '확인'
[인터뷰 | 윤준식 광주학생운동동지회 부회장] "학생독립운동 기념식, 동창회만도 못해"

[학생독립운동-서훈을 받지 못한 항일영웅들 연재기사]

광주 방국진 홍범택 기자 kjbang@naeil.com

방국진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