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임금 근로자의 31~41% … 자살충동 남자 2.07배, 여자 1.97배 높아

#1. 국내 한 기업 콜센터 신입사원 A씨(여)는 얼마 전 황당한 일을 겪었다.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다는 고객의 전화 상담을 받아 그의 컴퓨터에 원격으로 접속했는데 화면에 야한 동영상과 사진이 잔뜩 떠 있던 것이다. 놀란 A씨는 온종일 울었고 성희롱을 당한 사실이 잊히지 않아 며칠 동안 마음고생을 했다.

#2. 서울의 한 패스트푸드점에서 근무하는 B씨도 최근 황당한 일을 겪었다. 그는 최근 주문한 제품이 늦게 나온다며 항의하던 고객이 던진 햄버거에 얼굴을 맞았다. 고객은 주문한 햄버거가 나온 것을 미쳐 보지 못하고 소란을 피운 것이다. 소란은 경찰이 현장에 출동한 후에야 고객 사과로 일단락됐다.

#3. 한 유명 백화점 화장품 매장서 근무하는 C씨는 환불을 요구하는 고객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했다. 고객은 제품을 구입한지 한 달도 더 지나 거의 다 쓴 제품을 들고 찾아와 환불을 요구했다. 화장품을 바르고 얼굴에 트러블이 생겨 외출을 못한다는 이유였다. 환절기에 누구나 겪을 수 있는 뾰루지라고 설명하자 고객은 환불을 요구하며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문제가 더 커질 것을 우려한 C씨는 결국 환불을 결정했다. 억지 환불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C씨 고과에 반영됐다.

납득하기 힘든 일부 소비자와 민원인들의 갑질 행태가 알려지면서 피해자인 감정노동자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사례까지 알려지면서 국회, 노동당국도 문제해결을 위해 다양한 정책을 내놓고 있다.

◆감정노동자는 누구 = 고용노동부는 감정을 관리해야 하는 활동이 직무의 50%를 넘을 경우를 감정노동으로 분류한다. 기준에 따르면 우리나라 전체 임금 근로자의 31~41%에 해당하는 560만~740만명 정도가 감정노동자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는 고객에게 상품을 설명하고 판매하는 면세점·백화점 판매직원들이다. 콜센터 상담사, 호텔·음식점 직원 등은 잘 알려진 감정노동자. 최근에는 요양 보호사, 보육교사 등의 돌봄 서비스나 경찰, 사회복지사들의 민원처리 업무까지도 이 직종에 포함한다.

사회 서비스가 다양화되면서 감정노동으로 분류되는 직종과 숫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한 취업포털이 직장인 62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응답자 77.7%가 자신을 감정노동자라고 답했다. 직무별로는 서비스(87.7%) 분야가 1위였다. 이어 구매·자재(82.8%), 광고·홍보(81.8%), 인사·총무(78.4%) 등의 순이었다. 이들은 감정노동을 한다고 느끼는 순간으로 '화가 나거나 서운하더라도 감정을 숨겨야 할 때'(66.1%, 복수응답)를 가장 많이 꼽았다. 뒤를 이어 '상대의 기분에 맞춰줘야 할 때'(64.8%) '항상 친절해야 할 때'(40.1%) '폭언에 아무 대응을 못 할 때'(30.7%) 등의 순이었다. 빈도는 '자주 겪는다'(38.4%)와 '늘 겪는다'(38.4%)가 나란히 상위에 올라 일상 속에서 감정노동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끔 겪는다'는 응답은 23.1%였다.

최근에는 직장 내 상사로 인한 감정노동 피해를 호소하는 사례도 증가하고 있다. 실제로 감정노동을 주로 하게 되는 상대는 '상사'(75.5%, 복수응답)라는 응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어 '고객'(35.2%), '동료'(27.8%), '고객사 등 협력업체'(25.2%), '경영진'(23.1%) 등 순이었다.

LG유플러스 고객센터(아인텔레서비스)는 심리상담실과 블루박스(사내소리함)를 운영하는 등 감정노동에 지친 직원들에게 다양한 복지정책을 실시하고 있다. 이 결과 직원 만족도는 90%에 달하고 장기 근속인원들의 이직률이 절반 수준으로 감소하는 성과를 거뒀다. 사진 LG유플러스 제공


◆장시간 스트레스에 노출 = 문제는 감정노동자들이 스트레스에 따른 신체적·정신적 문제, 특히 장기간 스트레스 상황에 노출되면서 억눌린 감정을 해소하지 못한 채 우울증 등을 겪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해 극단적 선택을 하는 노동자들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김인아 한양대 의대 교수가 통계청 자료를 분석해 지난 5월 발표한 '노동자 과로자살 현황 및 대책' 보고서에 따르면 2016년 자살 사망자 1만3092명 중 15~64세 노동자는 4470명(34.1%)이었다. 이들을 직업군별로 구분하면 '서비스 및 판매종사자(28.52%)'가 가장 많았으며 단순노무 종사자(16.55%), 전문가 및 관련종사자(14.18%), 사무종사자(13.11%) 등의 순이었다.

하지만 같은 해 통계청 전체 근로자 직업분류표를 보면 '서비스 및 판매종사자'는 114만6734명으로 전체 근로자의 11.2%에 불과했다. '서비스 및 판매종사자' 근로자에 비해 자살율이 훨씬 높다는 게 통계로 확인된 것이다. 이는 폭언 등에 시달리는 감정노동자들이 고객들로받은 스트레스를 해소하지 못해 우울증 같은 정신질환으로 발전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높은 수준의 감정노동을 요구받는 노동자의 자살 충동은 그렇지 않은 노동자에 비해 남자가 2.07배, 여자가 1.97배 높다는 연구결과도 있다.

◆노동당국·기업도 문제 인식 = 최근 감정노동자 문제에 적극 대응하려는 기업들의 발걸음도 바빠지고 있다. 사고가 발생하면 기업의 이미지가 실추되고 있고 직원들의 스트레스 축적이 생산성을 저하시킨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LG유플러스 고객센터(아인텔레서비스)는 심리상담실과 블루박스(사내소리함)를 운영해 감정노동으로 지친 노동자의 '마음지킴'에 힘쓰고 있다. 또 음란·욕설·업무방해 등 악성 고객들로부터 '감정보호'를 위해 고객센터 상담전화 연결음에 실제 상담사 가족이 직접 녹음한 음성을 넣은 '마음 연결음'을 적용했다. 실내 공기질 관리와 사내 카페 운영을 통해 상담 맞춤 환경을 조성하고 사옥에 피트니스센터와 요가실, 안마실 휴게실을 운영해 감정노동 근로자의 육체적·정신적 건강 유지 환경을 조성했다.

LG유플러스의 고객센터 복지 제도에 따라 직원 만족도는 90%에 달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인상 장기 근속인원들에 대한 이직률 역시 절반 수준으로 감소했다.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반얀트리호텔)는 다양한 심리지원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이 회사는 업종 특성상 노동자 대부분이 고객과 접촉하고 있다. 또 2~3교대 근무로 인한 불규칙한 수면 패턴 등으로 상대적으로 스트레스에 취약하다.

이 회사는 지난해 감정노동수준과 직무스트레스평가를 실시하면서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올해는 웃음치료, 미술 치료, 분노조절 카드게임, 풍선 터트리기(분노발산), 걷기 마일리지, 건강행태 개선 교육 등 심리지원 프로그랜을 본격화했다. 또 외부전문가들을 초빙해 직무스트레스·감정노동관리 교육도 실시하고 있으며 희망자에 대해서는 외부 전문가와의 상담치료도 지원한다.

이에 대해 김유리 에이블현대호텔앤리조트 보건관리자는 "회사측의 적극적인 지원 덕분에 큰 어려움없이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었다"면서 "초기인데도 이직률이 낮아지고 병가를 신청하는 직원들이 줄어들면서 생산성 향상 효과도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노동당국의 발걸음도 함께 빨라지고 있다. 감정노동자 보호조항을 담은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이 지난 10월부터 시행되면서 고용노동부와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 등은 관련 정보를 알리고 국민적 관심을 높이는 활동을 시작했다. 비대면 특성상 감정노동이 빈번하게 발생하는 콜센터 등 고위험 업종 대상으로 건강보호 컨설팅도 실시하고 있다.

박두용 안전보건공단 이사장은 "우리 사회에 감정노동자가 존중받는 문화가 정착돼 폭언과 폭행으로부터 이들이 상처 받지 않고 안전하고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야 한다"면서 "고용부와 함께 감정노동자들에게 욕설을 하거나 무리한 요구를 한다든가 또는 말도 안 되는 주장을 한다든가 하는 것이 더 이상 우리사회에서 용납되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산시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노동계 일각에서는 고객이나 민원인에게 밝은 미소를 보여야 하는 긍정적 감정노동자뿐 아니라 카지노 딜러, 장의사처럼 무표정한 중립적 감정노동자나 조사관, 보안경비와 같이 단호한 목소리와 태도로 일관하는 부정적 감정노동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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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남진 장세풍 기자 sp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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