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 제재완화 가시화에 대비 필요

국제사회에선 '신탁기금' 방식 거론

최악의 핵위기였던 한반도 정세가 올 들어 대화국면으로 급전환하면서 북한의 경제개발사업과 관련한 공적개발원조(ODA)의 역할이 주목받고 있다.

당장은 북미대화가 침체국면을 맞아 답답한 형세이지만, 지금의 고비를 넘어 북한 비핵화가 진전을 이루고 대북 제재 완화가 가시화하면 북한 경제의 재건과 개발 지원, 이를 위한 재원조달 방안 마련이 화두가 될 것이란 관측이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물론 대북 제재가 완전히 풀리면 북한이 국제통화기금(IMF) 등 국제금융기구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문제가 풀릴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3차 남북정상회담 직후인 지난 9월 25일 미국외교협회(CFR)에서 한 연설에서 '대북 제재 해제'를 전제로 "북한은 IMF(국제통화기금)나 세계은행(World Bank) 같은 여러 국제기구에 가입함으로써 개혁·개방으로 나설 뜻이 있음을 확인했다"고 밝힌 바 있다.

지난 15일 남북 철도조사단이 북한 두만강철교에서 조사를 마치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사진 통일부 제공


하지만, 대북 제재 해제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가늠하기 어렵고, 국제금융기구 가입 자체에도 수년이 소요된다는 점에서 ODA를 활용한 대북 협력이 우선 실천 가능한 방법으로 거론되고 있다.

◆ODA로 북 인프라 개발이 우선 과제 = 전문가들은 대북 제재가 완화되는 단계에 들어서면 북한 개발자금 수요가 급증해 일본의 ODA 자금, 중국의 일대일로 (一帶一路·육해상 실크로드) 자금, 미국의 의약산업 자본 등이 몰려들 것이라고 예상한다. 북한은 ODA 자금을 투입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는 지역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북한 개발이 본격화될 경우 글로벌 경쟁이 격화되고 한국이 국제경쟁에서 뒤쳐질 수 있다는 예상도 나온다.

대북 개발협력은 당장 인프라 개발에만 150조원을 훌쩍 웃도는 자금이 드는 대규모 사업이다. 금융위원회는 지난 2014년 북한의 주요 인프라 개발에 필요한 자금을 약 1400억달러로 예상했다. 철도(773억달러), 도로(374억달러), 전력(104억달러), 통신(96억달러), 공항(30억달러), 항만(15억달러) 등이다.


이는 현재 조성돼 있는 남북경협기금만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다. 올해 남북경협기금은 9600억원 가량이고 내년은 15% 증액된 1조130여억원으로 잡혀 있다.

북한처럼 기초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빈곤국가에 민간투자나 상업차관을 곧바로 기대하기는 힘들다. 북한 비핵화가 실질적으로 진전된 후 5~10년 사이의 중단기적 관점에서 볼 때 ODA를 활용한 '국제 공적 재원'이 자금원이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ODA를 통해 도로·철도·항만·전력 등 기초적인 인프라를 구축해야 민관협력이나 민간투자를 위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한국 등 OECD DAC(개발원조위원회) 가입국을 포함해 국제사회가 공여하는 ODA 자금을 활용하는 방안이 모색되는 배경이다.

◆코이카 설립목적에 '북한' 명시 법 개정안 = 이와 관련해 천정배 의원(민주평화당, 광주 서구을)이 이달 4일 발의한 한국국제협력단법 개정안은 관심을 가질 만하다. 무상원조 기관인 한국국제협력단(KOICA·코이카)의 설치 근거인 한국국제협력단법을 고쳐 코이카가 북한 개발협력 사업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마련코자 했다.

코이카의 설립목적을 명시한 제1조는 '대한민국과 개발도상국가와의 우호협력관계 및 상호교류를 증진시키고 개발도상국가의 경제·사회발전을 지원하기 위하여 한국국제협력단을 설립하여'로 돼 있다. 여기에서 '개발도상국가와의'를 '개발도상국가 및 북한과의'로, '개발도상국가의'를 '개발도상국가 및 북한의'로 바꾸자는 것이다.

현재 한국국제협력단법은 원조 대상을 개발도상 국가로 규정하고 있고, 국제사회는 북한을 국제사회의 개발협력이 필요한 저소득 국가로 분류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 헌법 제3조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규정과 남북관계 발전에 관한 법률 제3조제2항 '남한과 북한간의 거래는 국가 간의 거래가 아닌 민족내부의 거래로 본다'는 법조항 등으로 인한 논란으로 코이카는 북한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고 있다.

천 의원은 "북한의 개혁과 개방이 본격화될 경우, KOICA는 그 자체로 풍부한 개발협력 노하우를 갖추어 남북협력 사업의 효율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북한과 다른 국제개발협력기구 사이에서 상호 소통 창구로서 역할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한국이 코이카와 수출입은행의 대외경제협력기금(EDCF)를 통한 유·무상 ODA를 지난 30여년간 추진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사회의 양자 간 공적개발원조(ODA) 자금을 주도적으로 모으는 역할을 할 조건을 만들자는 취지다.

◆"사회제도 등 북 제도개선 중요" = 은성수 수출입은행장은 지난 7월 기자간담회에서 북한이 IMF 등 국제경제질서에 편입되기 전 '북한개발 신탁기금(Trust Fund)'이 조성돼 개발지금이 조달될 것으로 내다봤다. 은 행장은 "회원국이 아닌 곳에 자금을 공급하는 '북한개발 신탁기금' 만들 수 있을 것"이라면서 팔레스타인의 (IMF) 가입 전 재건 신탁기금, 이라크 재건 기금 등을 전례로 들었다.

앞서 6월 20일 아주대 아주통일연구소가 주최한 국제개발협력 관련 국제회의에서도 마찬가지 의견이 나왔다.

칸탄 샹카 세계은행 취약분쟁국지원그룹 총괄매니저는 "세계은행은 비회원국에 직접 금융지원을 하지 않지만 '신탁기금'을 통하면 기술, 분석, 연수, 자문 지원을 제공하는 일이 가능하다"고 밝히고, 이사회 승인을 통해 코소보, 남수단, 티모르에 신탁기금을 제공한 사례를 소개했다.

한편, 세계은행(WB), 아시아개발은행(ADB),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 등 다년간 저개발국 및 개발도상국의 경제 발전을 유도해온 국제금융기구 담당자들이 참석한 이날 회의에서는 대북 경제개발 지원이 자금 조성과 인프라 개발에만 치중할 게 아니라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요아힘 폰 암스베르크 AIIB 부총재는 "사회제도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대규모 인력과 물자를 동원해야 하는 인프라 개발은 불가능하다"면서 "북한의 사회제도 개선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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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범 기자 clayki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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