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만집 선생, 경상도 최초 만세운동 주도

교남YMCA 임원·간부 등 17명 독립서훈

'대구YMCA 80년사'에 따르면 1919년 2월 15일 대구는 3.1만세운동 정보를 최초로 접했다. 중국 상하이 신한청년단에서 특파된 김규식의 부인 김순애가 교남기독청년회 창립지도자 백남채를 만나 대구에서도 3월 1일 봉기할 것을 전달하면서다. 계성학교 교사였던 백남채는 이와 별도로 동생 백남규와 서병우 등으로부터 국제정세를 들었다.

이들이 3.1운동을 직접 제안받은 것은 2월 24일이다. 세브란스병원 사무원이며 기독교측 대구경북지역 독립선언서 배포책임자 이갑성이 대구에서 이만집, 김태련, 백남채 등을 만나 대구궐기를 권유했다. 독립성취에 회의를 가졌고 일본의 무력행사에 따른 민중 희생을 걱정했던 이만집은 처음엔 회의적이었다. 이갑성은 국내외 여론, 동향 등을 설명하며 이만집을 설득했고 2월 26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김대진을 보내 재차 권유했다. 그후 3월 1일 경성과 평양, 원산, 선천 등에서 만세운동이 개시됐고 3월 4일 세브란스 의전 학생 이용상과 최재화를 통해 독립선언서가 도착하면서 거사 준비가 본격화됐다.

대구독립만세운동 거점이었던 옛 교남YMCA건물. 최근 복원을 거쳐 대구3.1운동 기념관과 YMCA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사진 최세호 기자


3월 3일 최재화가 대구시위 주도를 거듭 간청하자 거사를 결심한 이만집은 동지부터 규합했다. 교남기청 총무 김태련, 계성학교 교감 김영서를 불러 만세운동 참여를 설명했다. 계성·신명학교 교사, 기독청년회장 경력과 활동으로 맺은 인맥을 활용해 많은 동지를 모았다.

이만집은 서문 밖 장날인 3월 8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남성정, 남산정, 신정교회 교인, 계성과 신명학교 학생 등이 참석키로 했다. 대구고등보통학교 학생과 동산성경학원 수강생도 합류하기로 했다.

김태련은 3월 7일 밤 자택에서 이만집으로부터 받은 독립선언서를 등사하고 태극기와 현수막도 준비했다. 낌새를 차린 일제 경찰의 경계는 삼엄했다. 3월 4일과 7일에는 천도교 대구교구장 홍주일과 백남채 등이 체포됐다. 하지만 3월 8일 시위는 차질 없이 진행됐다.

기독교계 지도자와 학생들은 장꾼 행세로 모여들었다. 계성학교 학생들은 한복을 입고 잠입했고 이선애가 이끈 신명여학교도 참여했다.

이만집과 김태련은 달구지에 올라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칠 계획이었다. 김태련이 숨겨온 선언문이 경찰에 압수당하자 다급해진 이만집이 '만세'를 불렀다. 기독교인, 학생, 일반인 등을 합쳐 만세운동 참여인원이 1000여명에 달했다. 만세 대열은 서문 밖 시장에서 동산교, 구 대구경찰서(현 중부경찰서), 종로, 남성정 파출소(현 약전골목), 달성군청(현 대구백화점 부근)까지 행진했다. 일제는 군경을 동원해 시위대 해산에 나섰고 이날만 157명을 체포했다. 대구만세운동은 9일과 10일에도 계속됐다. 12일부터는 경북 의성을 시작으로 경북 전역으로 확산됐다.

◆서문시장 장터서 '대한독립만세' = 옛 교남YMCA회관은 대구 약령시에 있다. 약령시는 1658년(조선 효종) 전국 한약재 수집을 위해 개설한 한약재 유통전문시장으로 715m 거리에 한약방들이 밀집된 곳이다. 당초 대구성 북문 근처에 1년에 두 번 개설되다 1908년 일본 상인들 요청을 받은 경북관찰사 박중양이 대구성벽을 철거하면서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독립운동 자금조달과 연락 거점이 되어 탄압을 받다가 결국 1941년 폐쇄됐다가 광복 후 다시 열렸다. 약령시 자체가 독립운동과 깊은 관계가 있는 셈이다.

약령시 중간에 위치한 옛 교남YMCA(대구시 중구 남성로 24)는 경상도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서울의 3.1만세운동 직후 지방인 대구에서 3.8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준비했던 독립운동의 성지라고 평가 받고 있다.

교남YMCA는 3.1독립만세운동 당시 주요 지도자들의 회합 공간이었으며 물산장려운동, 농촌운동, 신간회 운동 등 기독교 민족운동의 거점공간으로 사용돼 대구 근대사에서 차지하는 의미가 크다.

옛 교남YMCA의 주요 임원과 회원 17명이 건국훈장 애국장 등 3·1운동과 임시정부 관련 독립유공자훈장을 받은 사실이 이를 입증하고 있다.

약전골목에서 가장 오래된 근대 건축물인 옛 교남YMCA 건물은 미국 북장로교 대구선교지회(선교사 블레어)가 1914년 청년전도를 위해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1층과 2층 사이는 돌림띠로 장식하고 창 상부는 아치, 하부는 받침대 장식에 사각창문을 설치하는 등 동서양 양식이 결합된 1910~20년대 근대건축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1938년에 '조선약업 주식회사'에 매각된 뒤 주인과 용도가 여러 번 바뀌었다. 1955년 '한국흥업은행'에 경매 됐고 1968년에 외과의원으로, 1973년엔 정형외과 입원실로 사용되기도 했다.

2008년에는 '현대백화점 대구점'이 들어서면서 철거 위기에 몰렸다. 인수한 건물주가 도시형 생활주택을 짓기 위해 2015년 건축허가를 신청했다.

당시 이 부지에는 옛 교남YMCA 회관(119㎡)외에 한옥(178.5㎡, 1961년 준공) 1채와 2층 철근 콘크리트구조인 이해영 정형외과의원(364.5㎡·1966년 준공) 등 각각 다른 3가지 건축구조와 양식의 건물이 있었다.

철거 위기를 넘긴 것은 민관이 함께 나서면서다. 대구 중구는 건물의 역사성과 건축 가치를 높이 평가했고 재단법인 대구YMCA 유지재단과 합심해 해당 건물을 모두 매입(2011년 12월 16일), 새로운 공간으로 보존키로 했다.

대구YMCA는 자체 예산 2억원과 시민모금 3억원 등 5억원을 모아 2013년초 옛 교남YMCA회관을 인수했다. 중구는 27억7000만원으로 한옥과 이해영 정형외과의원 건물을 매입했다.

현재는 대구YMCA가 옛 교남YMCA건물을 대구3.1운동 기념관과 YMCA 100주년 기념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거 위기 독립운동 거점, 민·관이 보전 = 건물 외부에는 대구 3.1만세운동기념관 현판과 대구 옛 교남YMCA회관 안내표지판, 신간회 대구지회 비서, 경북서원 간판 등이 걸려 있다. 1층에는 3.1운동의거 대구조직연락도와 대구시위도, 경북도와 경남도의 3.1운동 궐기도, 김용해 비석내용, 독립선언문, 대구복심법원 판결문, 고등경찰요서 등이 전시돼 있다. 1914년 건축 당시 모습으로 복원된 2층에는 교남YMCA출신 독립운동 유공자인 17명과 3명의 선교사 흉상과 활동경력이 소개돼 있다.

옛 교남YMCA회관은 선교사들이 영어와 일어강습을 하는 강의실과 독서실, 성경공부방 등으로 운영됐다. 이곳에는 이만집, 김태련, 최종철, 박영조, 이희봉, 백남채, 최경학, 정광순, 김만성 등과 같은 기독교회의 젊은 청년들이 몰려들었다.

이들 청년들은 1915년 교남기독청년회를 조직했고 이후 1919년 3.1운동에 이어 터진 3.8대구만세운동의 주역이 됐다. 당시 대구에서 3월 8일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대부분의 인물이 대구 기독교계 지도자이면서 교남기독교청년회 청년들을 교육한 사람들이다.

옛 교남YMCA의 창립발기인은 12명이었다. 외국인선교사 3명을 제외한 9명 가운데 이만집을 비롯 김태련, 김영서, 백남채, 정광순, 권희윤, 이재인 등 7명이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들은 최소 6개월 이상 징역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했다. 이들 중 이만집과 김태련은 만세운동 준비부터 시위까지 전면에 참여했다.

김영민 대구YMCA 사무총장은 "옛 교남YMCA 발기인들의 만세운동 주도는 민족의 운명과 함께하는 선교공동체, 지역사회 주민의 애환을 외면하지 않고 고통을 함께 나눈 기독교사회운동체로서 뿌리내린 소중한 역사적 유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라고 말했다.

[관련기사]
[기고│김영민 대구YMCA 사무총장] "대구는 경상도 만세운동 진원지"
경상도 만세운동 주도한 이만집

[신년기획] 100년 전 그날, 현장을 가다 연재기사

최세호 기자 seho@naeil.com

최세호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