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민족 정부가 있다는 얘기 듣고 왔다" … 의친왕 탈출 추진했으나 실패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1차대전 종전이라는 전환기를 맞아 국내외에서 독립만세 시위 준비가 한창이던 때, 돌발변수가 발생했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한 많은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전날까지도 고종의 상태가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주변에는 독살설이 파다했다. 김가진 역시 고종이 독살 당했다고 믿었다. 꼭 독살이 아니어도 고종의 죽음은 참으로 슬픈 일이었다. 조선 망국에 고종의 책임이 어느 정도였는가를 물을 상황이 아니었다. 형식적으로 조선은 1910년 8월 29일에 망했을지 모르나, 조선 사람들 마음에서는 고종의 죽음으로 조선이 진짜 망한 것이었다. 순종이 있었다고 하지만 고종은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군주였다. 식민지 백성들은 어쩌면 독살이었을지도 모를 마지막 군주의 죽음을 '조선독립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친 3.1운동으로 장송했다.

3.1운동은 무기력하게 강제 병합을 지켜보았던 조선 엘리트들 내부에 무언가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기운을 불러왔다. 고종 독살은 일제 작위를 받고 친일귀족이라는 오명을 썼던 일부 조선 대신들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개화파 원로로 자작을 수여받은 85세 김윤식이나 역시 자작을 수여받은 이용직은 3.1운동이 일어나자 조선의 독립을 청원하는 '대일본장서(對日本長書)'를 보냈다. 이 사건으로 김윤식과 이용직은 보안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고 작위를 박탈당했다. 강제병합 전야에 일진회에서 활동했던 인사들 중에서도 3.1운동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나타났다.

전협은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 송병준, 이용구에 이어 3번째로 서명한 대표적인 친일파였다. 전협은 최익환 등과 더불어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하고 스스로 단장이 되었다. 3.1운동 직후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일본 경찰 눈을 피하기 위해 한강에서 뱃놀이를 가장하여 동지들을 모았다. 광범위한 대중들을 끌어 모으기 위해서는 훨씬 더 지명도가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대동단원들은 대중적 지명도가 있고, 학문과 덕망이 일세를 풍미하며, 민족의 내일에 대해 진한 애정을 갖는 인물을 대동단 총재로 모시고자 했다. 수많은 사람들을 검토한 끝에 김가진이 적임자로 지목되었다. 1919년 4월 초순 전협은 김가진 며느리 정정화의 오빠 정두화와 함께 퇴락한 체부동 자택으로 김가진을 찾아갔다. 대동단 총재직을 맡아달라는 전협의 부탁에 김가진은 고개를 내저었다. 70살이 넘은 고령이, 일제가 준 작위까지 받은 자신이 지하비밀 독립운동 단체 수장을 맡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래도 전협은 끈질기게 설득하여 마침내 김가진의 승낙을 받아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

1919년 대동단 독립선언문│제2차 만세운동을 준비하며 김가진이 중국에서 기초 해보낸 독립선언문. 이 선언문에서는 '3월 1일에 선언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하였다'면서 날짜를 '대한민국 원년 11월'이라고 명기했다.

100년 전 74세는 지금으로 치면 90이 훨씬 넘은 나이다. 김가진은 대동단 총재직이 자신의 마지막 활동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김가진은 결코 명목상 총재에 머무르지 않았다. 김가진은 대동단의 '방략' '선언서' '결의' 등의 문건과 직제표 작성에 깊이 관여했다. 대동단 기구는 중견기관과 부설기관으로 나뉘는데 중견기관에는 통재부 추밀부 상무부 외무부 재무부 무정부 등을 두었다. 이렇게 정부기구를 방불케 하는 조직 구성은 지하비밀 조직에 걸맞다고 할 수는 없다. 이런 조직은 좋게 이야기하면 장차 독립운동 중추기관으로 성장했을 때를 꿈꿔본 것이라 할 수 있겠지만,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다. 대동단은 '결의'의 제3항에서 "완전한 독립정부를 성립할 때까지 가정부(假政府, 즉 임시정부)를 원조하고 국민사무를 처리할 것"이라고 하여 임시정부와 적극 협력하겠다는 뜻을 표했다.

김가진은 기호흥학회나 대한협회 시절에는 사재를 털어 운영자금을 댔지만, 이 무렵은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한 처지였다. 대동단의 자금은 김가진에게 대동단 총재를 맡을 것을 권유한 사돈 정두화와 보부상 수령 양정, 활명수로 유명한 동화약방의 민강, 김천의 부호인 권태석 등이 댔다. 이들이 상당한 자금을 대왔음에도 불구하고 활동자금은 늘 부족했다. 대동단 단장인 전협은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인쇄 책임자인 최익환과 주요활동가 이능우, 권태석 등을 상하이로 도피시키려 하였다. 문제는 이들의 여비를 마련하려는 과정에서 일이 잘못되어 최익환 이능우 권태석 등이 엉뚱하게도 사기죄로 검거된 것이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대동단 명의의 각종 유인물을 자신들이 만들었을 뿐 배후는 없다고 잡아뗐다. 단원들의 1차 검거에도 불구하고 대동단 조직은 드러나지 않았다.

최익환 등의 1차 검거에도 불구하고 대동단은 비밀인쇄소를 차리고 지하유인물 '대동신보'를 고종 탄생일인 음력 7월 15일을 기하여 1만여 부 인쇄하여 양정의 보부상 조직을 통해 배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기획했다. 대동신보는 대동단의 선언서와 방략, 기관 등과 그간의 활동을 담았는데, 안타깝게도 창간호만 발행했을 뿐 더 이어지지는 않았다.

대동단은 1919년 9월 강령을 개정하였는데, 놀랍게도 제3항을 "사회주의를 철저히 실행한다"로 수정했다. 대한제국 대신이었던 김가진이 총재로 있던 대동단이 사회주의의 철저한 실행을 강령으로 채택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전협의 조서를 보면 전협은 부호들에게 독립운동자금을 내라고 권하면서 "요즈음 세계는 점차로 공산주의가 되어 현재 러시아는 그것을 실행하고 있으므로 조선도 장차 그렇게 될테니 재산가는 차제에 돈을 내면 좋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김가진이나 전협에게서 사회주의에 대한 깊은 이해나 사회주의가 구현하고자 했던 이상을 공유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대동단이라는 명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중국에서 유행했던 캉유웨이의 대동사상에서 따온 것이다. 유교의 전통적인 평균주의적 사고에 바탕을 두고 사회주의를 유교식으로 단순하게 받아들였다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대동단에 관계했던 김사국이 서울파 사회주의자들의 지도자가 되었고, 권태석과 최익환이 서울파 조선공산당의 주요 당원으로 활동한 것을 보면, 대동단의 사회주의 표방은 단순한 에피소드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할 것이다.

대동단 본부의 상하이 이전

대동단 조직정비를 마친 김가진은 보다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서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옮기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하고 중국으로의 망명을 모색했다. 김가진이 상하이 망명을 위해 접촉한 사람은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였다. 임시정부에는 김가진이 대한협회 회장으로 있을 때 같이 활동했던 신규식과 조완구 등이 있었다. 대한제국 조정에서 같이 중신으로 활약한 이시영도 있었다. 그런데도 망명 창구로 안창호를 선택한 것은 안창호가 연통제 조직의 책임자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가진으로부터 상하이로 망명하겠다는 밀서를 받은 안창호는 즉시 연통제 일을 보고 있던 승려 출신 이종욱을 김가진에게 밀파했다. 이종욱이 서울로 들어와 김가진을 접촉한 것은 대동단이 강령을 개정한 1919년 9월경이다. 김가진은 이때 대동단 본부의 상하이 이전과 함께 고종 아들인 의친왕 이강 공의 망명, 그리고 일본 천황 생일에 맞춰 제2의 만세시위를 준비하고 있었다.

김가진은 의친왕과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1906년 여름에는 의친왕이 7주일간이나 체류할 예정으로 김가진의 정자 백운정을 찾은 일도 있었다. 1846년생인 김가진과 1877년생인 의친왕은 한 세대 가량 나이 차이가 나지만, 자식을 늦게 둔 김가진과 일찍 자식을 둔 의친왕 사이에 자녀들의 혼담이 오갔다고 한다. 망명을 결심한 김가진은 아들 의한을 시켜 의친왕에게 "소인 지금 상하이로 갈 계획인데 전하께서 이에 따라 왕림하시길"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다. 의친왕도 망명이라는 큰 결단을 내렸지만, 왕족이다 보니 모든 것을 다 버리기로 한 망국의 노대신보다 몸이 무거웠다.

1919년 10월 24일 김가진은 허름한 의복에 틀니도 뺀 초라한 행색으로 길을 나섰다. 출발지는 남의 이목이 번잡한 경성역 대신 인적이 드문 일산역. 아들 의한과도 일산역에서 합류하기로 할 만큼 은밀한 출발이었다. 당대의 시인이었던 김가진은 망명길에 두 수의 시를 남겼다.

나라는 깨지고 임금은 죽고 사직은 기울었도다 (國破君亡社稷傾)
치욕을 견디며 죽지 못해 살아 지금에 이르렀구나 (包羞忍死至今生)
이 늙은 마음에 아직 하늘을 찌를 뜻이 있나니 (老心尙有衝?志)
한 번 날아올라 만리 길을 가노라(一擧雄飛萬里行)
백성과 나라의 존망 앞에 어찌 이 한 몸 돌볼까 (民國存亡敢顧身)
하늘과 땅에 깔린 감시망을 귀신처럼 빠져 나왔네 (天羅地網脫如神)
그 누가 알리오, 3등 객차 속 저 나그네 (誰知三等車中客)
깨진 갓에 거친 옷 두른 옛 제국의 대신임을 (破笠襤衣舊大臣)

의친왕의 망명 좌절

김가진과 의친왕의 망명을 보도한 매인신문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안동에 도착한 김가진 일행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이륭양행(怡隆洋行)이란 회사를 경영하던 조지 쇼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향했다. 천신만고 끝에 김가진은 1919년 10월 29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상하이에 도착한 김가진은 사람들에게 "나는 이곳에 우리 민족의 정부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왔노라. 나는 우리 정부가 있는 이곳에서 죽는 것이 바라는 바로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김가진이 망명을 결행한 보름 후 의친왕도 건봉사 승려였던 대동단원 정남용과 함께 망명길에 올랐다. 의친왕 망명에는 우여곡절이 심했다. 의친왕은 김가진과 뜻을 함께 하긴 했지만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더구나 김가진 망명 이후 일제의 감시는 더 엄중해졌다. 전협 등 대동단 간부들이 감시망을 뚫고 의친왕과 망명의 세부계획을 세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전협 등은 의친왕의 측근인 정운복에게 약간의 기망과 협박을 섞어 의친왕을 밖으로 모시게 했다. 의친왕은 대동단원들의 갑작스러운 망명 권유에 처음에는 망설였지만 과거 김가진과 뜻을 함께 한 일인지라 결단을 내렸다. 의친왕은 마침내 11월 10일 오전 신의주 건너편 중국 안동으로 향하는 열차 3등칸에 평민 복장을 하고 몸을 실었다.

이 무렵 이미 조선총독부 경무국은 의친왕이 사라졌다고 발칵 뒤집혔다. 의친왕은 조선을 벗어나 무사히 안동에 도착했으나 딱 거기까지였다. 신의주 경찰서 요네야마 경부는 과거 종로경찰서 근무 시절 창덕궁을 드나들어 의친왕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임시정부의 연락거점 이륭양행과 안동역은 그리 멀지 않은 거리였으나, 의친왕은 안동역에서 일본 경찰에게 적발되고 말았다. 품 안에는 미처 부치지 못한 임시정부에 보내는 친서가 들어 있었다. "독립된 우리나라의 평민이 될지언정 일본의 귀족이 되기를 원치 않는다"며, 임시정부와 손잡고 생사를 함께 하겠노라는 내용이었다.

김가진과 대동단은 의친왕의 망명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대한민국 대신 대한제국의 부활을 꿈꾼 '복벽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것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의친왕이 독립된 우리나라의 평민이 되겠다는 뜻을 임시정부에 분명히 밝힌 점이나, 대동단이 대한민국 연호를 쓰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김가진과 대동단을 복벽주의에 갇혀 있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안동(단동)의 이륭양행 모습│압록강을 건너 안동에 도착한 김가진 일행은 아일랜드 출신으로 이륭양행(怡隆洋行)이란 회사를 경영하던 조지 쇼의 도움을 받아 상하이로 넘어갔다.


제2의 만세시위를 준비

전협이 의친왕과 함께 상하이로 가지 않은 이유는 국내에 남아 제2의 만세시위를 주도하려 했기 때문이었다. 김가진과 전협 등 대동단 간부들은 김가진의 망명 이전부터 다이쇼 천황의 생일인 천장절(10월 31일)에 3.1운동에 이은 대대적인 시위를 준비 중이었다. 대동단이 준비한 제2회 독립선언에서는 민족대표에 여성도 들어가야 한다고 보고 기독교 전도사인 이신애와 박정선 등 여성들을 포함시켰다. 그런데 최익환 등의 1차 검거로 김가진의 망명이 앞당겨졌고 이어 의친왕까지 11월 10일 망명을 하게 되면서 시위계획은 다소 연기되었다. 의친왕의 망명이 좌절되고, 전협 마저 11월 19일 체포되자, 시위의 성사 자체가 불투명해졌다. 포위망을 피한 나창헌과 이신애 등은 만난을 극복하고 시위를 준비했다. 일제가 비밀에 부치던 의친왕의 망명이 언론에 보도된 다음 날인 11월 28일 대동단은 마침내 시위를 결행했다. 대동단 본부의 상하이 이전과 의친왕의 상하이 망명에 맞추어 3.1운동의 뒤를 잇는 대대적인 만세시위를 준비했던 대동단의 포부에 비하면 시위의 규모는 보잘 것 없었다.

이때 발표된 선언문은 김가진이 중국에서 기초하여 국내로 보낸 것이다. "3월 1일에 선언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하였다면서 날짜를 '대한민국 원년 11월'이라고 명기했다. 선언문은 또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이천만 민중의 성충을 장하여"라고 3.1 독립선언서의 한 구절을 직접 인용했으며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의 일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일전을 불사코져 이에 선언"한다고 썼다. 선언문은 3.1 독립선언서와 마찬가지로 33인이 서명했다. 처음 이름을 올린 사람이 의친왕 이강이고, 2번째 서명자는 김가진이었다. 처음 김가진이 선언문을 보낼 때는 해외 인사들이 서명을 받아서 보냈다고 하나, 국내에서 시위를 준비하던 대동단원들이 서명자를 국내 인사 중심으로 바꿨다고 한다. 1919년에 나온 주요 독립선언서 중 2.8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이광수나 3.1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최남선이 변절한 반면, '대동단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김가진만은 독립운동진영에 끝까지 남았다.

일제의 회유공작

의친왕의 안타까운 탈출 실패와 김가진의 상하이 도착은 국제적인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1919년 11월 11일 의친왕의 탈출 시도는 일제의 엄격한 보도통제에도 불구하고 11월 16일과 11월 19일 중국신문 '시사신보'에, 11월 19일에는 일본의 '요미우리' 신문에 실리는 등 외국 신문에도 널리 보도되었다. '시사신보'는 11월 16일자에 의친왕의 탈출실패를 자세히 보도하면서 '한국의 큰 원로가 상하이에 왔다'는 제목으로 김가진의 망명을 전하면서 김가진이 쓴 두 편의 한시를 실었다. 11월 19일자에서는 "한국의 모 남작이 위험을 무릅쓰고 상하이로 망명" 했다는 제목으로 김가진이 "3등 열차편으로 한성을 탈출한 뒤, 늪과 물을 건너고 산과 들판을 전전한 끝에 8일 만에 겨우 위험지대를 벗어날 수 있었다"고 보도했다. '요미우리' 신문도 중국의 '차이나 프레스' 보도를 인용하여 쿠리로 변장한 조선의 전 대신 김가진이 30리 이상의 늪지를 걸어서 횡단해서 상하이로 왔다고 보도했다. 일제는 김가진 망명에 크게 당황했다. 일제는 김가진 망명을 비밀에 부쳤다가 11월 27일 의친왕 망명 사건을 보도하면서 처음으로 보도했다.

한편 일본의 지배정책을 적극 전파하던 '경성신문' 사장 아오야기 난메이는 '조선독립소요사론'에서 음탕무도한 김가진이 미첩에 빠져 가정불화로 아들이 자살하고 본처도 여러 번 자살을 기도했으며, 김가진이 애첩과 함께 망명했다고 터무니없는 사실로 헐뜯었다. 아오야기는 김가진이 옛날의 김가진이 아니고 지금은 먹이를 구하려 미친 듯이 울부짖는 야윈 이리와 같다고 조롱했지만, 김가진이 임시정부에서 유일무이한 고문의 지위에 있다는 점까지 부인하지는 못했다.

교활한 일제는 김가진의 작위를 박탈하지 않았다. 대신 일제는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김가진을 회유하여 귀국시키려했다. 임시정부는 김가진의 처소에 임정의 눈으로 볼 때 밀정으로 보이는 정병조나 선우전 등이 드나드는 사실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특히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가 시아버지를 모시기 위해 상하이로 올 때 8촌 오빠 정필화가 동행했다. 정필화를 의심한 김구는 임시정부 경무부에서 정필화를 검거하여 심문한 결과 그의 자백을 받아내고 교수형에 처했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