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에서 유일무이한 고문적 지위" … 이승만 탄핵 후 대통령 물망에도 올라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김가진의 망명과 의친왕의 망명 시도는 상하이 교민사회를 뒤흔들었다. 상하이의 민단은 1919년 12월 7, 14, 20일 세 차례에 걸쳐 시국강연회를 개최하였는데, 첫 번째 강연회의 첫 번째 연사는 바로 김가진이었다. 첫날 강연회에서 김가진의 뒤를 이어 연단에 오른 사람이 임시정부 법무총장 남형우와 도산 안창호였다는 사실은 그에 대한 교민사회의 기대감을 보여 준다. 김가진의 연설 '신구(新舊)에 대하야'의 요지는 '독립신문' 1919년 12월 27일자에 자세히 실려 있다.

상하이 시절의 김가진

김가진은 자신과 같이 말솜씨가 부족한 사람에게 연설을 청하는 것은 벙어리에게 노래 부르라는 것과 같다는 겸손의 말로 연설을 시작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단군 성조께서 개국하신 이래로 내치나 외교에 다 자주하였으나, 조선왕조 이후 문을 숭상하고 무를 천히 여기면서 점차 퇴락하여 마침내 일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고 말했다. 김가진은 3ㆍ1운동 이후 새로운 정부를 세운 것은 '대한동포의 피와 생명으로 얻은 것'이라며 우리의 성공을 위해 첫째, 국민이 내외일치하여 임시정부를 사랑하고 받들 것, 둘째, 한 마음 한 몸으로 독립을 향하여 용감히 나아갈 것, 셋째, 청년자제를 많이 외국으로 보내어 교육시킬 것 등 세 가지 사항을 동포들에게 당부했다.

임시정부의 공식 자료에 김가진이 임시정부의 고문으로 추대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는 않지만, 김가진이 고문이었다는 증언은 여러 군데에서 나온다. 나절로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언론인 우승규는 당시 상하이에 있었는데, 김가진이 "임정의 최고 고문으로 추대되고, 본격적인 항일구국운동의 전열에 참여했다"고 기록했다. 김가진의 지시를 받고 국내로 잠입하여 의친왕의 망명을 다시 시도하다가 체포된 월정사 승려 이대정이나, 역시 월정사의 승려로 상하이에서 김가진과 가깝게 지냈고 여운형이 도쿄에 가서 조선의 독립을 주장하여 조야를 뒤집어 놓았을 때 여운형과 동행했던 신상완 역시 김가진이 임시정부에 들어가 고문과 같은 일을 하고 있다고 발언했다. '경성신문' 사장 아오야기 난메이 역시 임시정부에서 김가진이 '유일무이의 고문적 지위에 있다'고 쓰고 있다.

1921년 임시정부 주최로 상하이에서 열린 3.1운동 2주년 기념식. 단상 왼쪽부터 신규식 ○○○ 박은식 김가진 김병조 이승만 장붕 이동녕 안창호 ○○○ 손정도 ○○○.


3.1운동 기념식

1920년 3월 1일은 3.1운동 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지금까지 백 번의 삼일절이 지나갔지만 가장 감격스러운 3.1절은 역시 1920년 1주년 때였을 것이다. 그 분위기는 '독립신문'의 기사만 봐도 풀풀 묻어나온다. 그날 '700명 대한의 자녀'가 상하이 올림픽 대극장에 모여 문자 그대로 피눈물을 뿌리며 감격의 기념식을 가졌다. 태극기와 만국기가 나부끼고, 붉은 비단에 금으로 '대한독립선언기념'이라고 써 붙이는 등 무대의 장식은 극히 숭엄했다. 이 무대의 서쪽 문으로 임시정부의 이동휘 국무총리를 선두로 이동녕 내무총장, 신규식 법무총장이 입장하고 그 뒤에 김가진이 들어왔다.

김가진의 뒤를 이어 이시영 재무총장, 뒤에 임시정부의 임시 대통령을 지낸 역사학자 박은식, 손정도 의정원의장, 그리고 현순 목사가 들어와 동쪽과 서쪽으로 나누어 팔자(八字) 모양으로 자리에 앉았다. 상하이의 대한민단 단장 여운형이 개식을 선언하자 모두들 애국가를 부르는 가운데 이날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대형 태극기의 게양이 시작되었다. 단상에 포진한 임시정부 국무위원들과 김가진, 박은식 두 원로가 줄을 당겼고 김원경, 안정근, 이광수, 신익희, 선우혁 등 각 단체 대표들이 태극기를 받들었다. 애국가 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태극기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태극기의 끝이 보이고 곧 궤가 보이고 태극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자 애국가 소리는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고 노래를 부르는 모든 사람의 뺨에는 뜨거운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태극기가 마침내 다 모습을 드러내자 목 놓아 통곡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장내에는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장한 광경'이 연출되었다. 모두 피눈물을 흘리며 국기에 대한 경례를 마친 뒤 여운형이 우리 민족이 노예가 된 지 벌써 10년이라면서 "동포여, 여러분은 저기 올라간 저 국기를 다시 땅에 떨구려 하십니까"라고 외치자 울음소리는 더욱 커졌다. 이동휘 국무총리는 "우리는 이 국기 하에서 금년에는 혈전을 단행하기를 작정합시다"라고 외쳤다. 단상에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본 김가진도 가슴이 터질 것 같은 벅찬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망국의 치욕을 안고 살던 제국의 대신은 이제 민국의 원로로 거듭나 젊은이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애국가를 부르고 원수 일본에 대한 혈전을 다짐했다.

안타깝게도 이날의 광경은 사진으로 남아 있지 않지만, 이듬해 1921년 3.1절 기념식은 사진이 남아 있다. 전체적인 분위기는 비슷하고 김가진의 모습도 단상 중앙에 또렷이 보인다. 1921년 기념식에는 임시정부 대통령 이승만도 참석했다. 임시정부가 1920년과 1921년 3.1절 기념식 단상 중앙에 김가진을 모신 것을 보면 상하이의 독립운동가들이 김가진을 어떻게 예우했는지 알 수 있다. 1922년 기념식에 관한 기사는 '독립신문'에 보이지 않는다. 대신 김가진이 "원컨대 우리 민족이 더욱 단결하여 / 하루빨리 조국산하가 일제의 지배를 벗어난 것을 보게 되기를"이라 노래한 '3.1절 유감'이라는 시가 실려 있다.

김가진 명의의 군자금 모집증과 신임장


대동단의 군자금 모집 활동

당시 임시정부와 상하이 교민사회에서 김가진과 박은식 두 사람이 원로 대접을 받았다. 62세의 박은식이 원로였으니, 75세의 김가진은 상노인 중의 상노인이었다.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은 김가진보다 25~30년 가량 아래였다. 그렇지만 김가진이 목숨을 걸고 상하이로 온 것은 원로 대접 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대동단 총재 김가진은 현역이었다.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를 상하이로 옮기면서 의친왕의 망명과 제2의 독립만세 시위를 준비했었다. 안타깝게도 김가진 자신의 망명만 성공했을 뿐, 의친왕은 실패했고 국내에 남아 시위를 준비하던 대동단 단장 전협 등 간부진은 모두 체포되었다. 이제 김가진은 상하이에서 새로운 출발을 해야 했다. 1920년 초 국내에서 대동단으로 활발히 활동하던 나창헌이 일제 당국의 검거를 피해 상하이로 망명해 김가진을 찾아오면서 대동단은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1920년 3.1절 기념식 직후인 3월 6일 김가진은 대동단 본부의 상하이 이전을 선포하면서 국내외의 동포들에게 혈전을 촉구하는 '포고문'을 발표했다. 김가진은 직접 쓴 포고문에서 "단원 제군이여, 혈전의 시기는 눈앞에 박두했음을 각오하라"면서 "가일층 단결을 굳혀 준비를 완성하고 애국의 열성을 부분적으로 사용치 말라. 우리의 임시정부에서는 혈전의 준비를 방금 급속히 진행 중에 있으며, 본 총부에서는 최후의 행동에 대한 획책을 불원간에 발현할 것이니 일생일사를 우리 민족의 사명에 맡긴 제군은 더욱 일도ㆍ일진ㆍ일퇴를 모두 총부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라"고 당부했다. 이 포고문을 보면 김가진은 대동단이라는 독립운동 단체를 유지하면서도 그 역량을 임시정부에 모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김가진은 국내의 지주나 자산가들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갹출하기 위해 '갹금권고문'을 작성했다. "왜적의 속박을 탈피하고 반도 강산에 태극기를 휘날리는 날이 목전에 임했도다"고 선언한 대한민국 2년(1920년) 3월 10일자로 된 이 권고문에는 대동단 총부 총재 김가진 이외에 무정부장 박용만, 상무부장 나창헌, 외교부장 손영직, 재무부장 고광원 등이 같이 서명했다. 대동단은 '갹금권고문'에서 "북으로는 모지에 연락을 취하고 남으로는 모방의 후원을 얻어 방금 혈전을 개시할 것을 결정했다"고 했는데, 일제의 다른 자료에 의하면 대동단은 "북쪽으로는 러시아 과격파(레닌 정권)와 연락하고 남쪽으로는 중국 남방파(쑨원 정권)와 연결되어 있다"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이 갹금권고문을 발표하기 이전에도 대동단과 김가진은 국내로 사람을 보내 군자금 모금을 위해 노력했다. 북감리교회 목사 김유화는 임시정부 내무총장 이동녕으로부터 3.1운동 1주년이 되는 1920년 3월 1일 국내에서 시위를 조직해보라는 지시와 아울러 김가진으로부터 자금 모집에 관한 편지를 받아 국내로 들어와 시위를 준비하다가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김가진으로부터 직접 김가진 명의의 포고문과 신임장을 받은 대동단원들이 자산가를 찾아다니며 군자금을 모금한 사례는 매우 많이 발견된다. '대동단 조선총지부장'이라 칭하는 신덕영은 경성과 전남 일대를 오가면서 재력가들에게 먼저 김가진의 포고문과 대동단 본부의 통고문 등을 우편으로 보낸 뒤 이들을 찾아가 돈을 달라고 요구했다. 전남 보성에 사는 임양균이 구례와 하동 일대의 명망가들을 방문하여 대동단 가입을 권유하다가 1920년 3월 체포되기도 했다.

특히 박제웅(박종봉)은 대동단 총재 김가진 명의의 내지특파원 신임장과 임시정부 교통총장 대리 김 철 명의의 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임시교통사무국 특파원 신임장을 갖고 김가진 명의의 군자금 모집증을 갖고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검거되었다. 박제웅이 갖고 간 군자금 모집증은 국내의 자산가들에게 전재산의 1/50을 군자금으로 낼 것을 촉구했다. 이와 같이 김가진 명의로 된 군자금 모금 증서를 갖고 국내에 잠입한 사례가 많다는 것은 국내외의 독립운동가들이 그를 독립운동의 수령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철혈단과 임시정부의 갈등

1920년 3월 당시 김가진과 나창헌은 독립전쟁에 대해 상당히 급한 마음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동단은 '포고문'에서 지난 1년 여 동안 우리 민족이 취하여온 "평화적 수단은 도리어 문약무혈(文弱無血)이라는 환각을 주었을 뿐"이라고 비판했다. 길은 오직 '혈전'뿐이었다. 사실 안창호 계열의 '실력양성론'도 독립전쟁을 위해서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지 독립전쟁 자체를 부인한 것은 아니었다. 안창호 자신이 '독립신문' 1920년 신년호에 '신년은 전쟁의 년'이라는 글을 게재한 것을 비롯해 '독립신문'은 독립전쟁을 고취하는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그러나 문제는 방법이었다. 임시정부 수립 이후에 그 소식을 듣고 큰 기대를 안고 망명한 김가진이나 나창헌의 기대와는 달리, 당시 임시정부는 심각한 내분에 빠져 있었다. 그것은 노선상의 차이이기도 했으며, 출신지역을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으며 또한 독립운동 자금의 모집방법과 분배를 둘러싼 갈등이기도 했다. 조금 뒤의 기사이지만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문'에 따르면 임시정부에는 문치파와 무단파가 있는데 무단파 내에서도 "김가진을 수령으로 하고 나창헌 등이 실권을 잡고 있는 대동단은 문치파의 주장과 절대 반대일 뿐만 아니라 이동휘 등의 주장도 오히려 느려터지다"고 비판했다고 한다.

김가진의 며느리 정정화의 수기에 의하면 김가진과 김의한이 "상해를 떠나 만주로 갈 것을 희망했다"고 한다. 김가진과 일가였던 북로군정서 총사령 김좌진은 김가진에게 만주로 오시라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김가진이 연로하여 건강이 좋지 않았으며 세 식구가 만주로 옮겨갈 여비를 마련할 수 없어 만주행을 포기했다. 국가보훈처가 발굴한 대한군정서 간부명단을 보면 김가진이 대한군정서의 '명예고문'으로 되어 있다.

임시정부의 내분이 심화되고 독립전쟁이 구호에 그칠 뿐 착수의 조짐도 전혀 보이지 않자 김가진과 나창헌은 다른 길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임시정부와의 관계도 매우 복잡해졌다. 그 핵심에는 70대 중반 고령의 김가진보다는 20대 중반의 혈기방장한 나창헌이 있었다. 나창헌은 임시정부에 큰 기대를 갖고 망명했으나, 임시정부는 민족운동의 최고지도부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심각한 내분에 빠져있었던 것이다. 1920년 6월 초 나창헌은 임시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청년불평당' 약 58명을 모아 철혈단을 조직했다. 일제의 자료는 김가진이 이들 청년들의 수령이었다고 쓰고 있다. 철혈단은 임시정부 간부들에 대한 성토문에서 "우리의 독립운동가들 중에는 부패한 분자가 적지 않고 독립운동이라는 미명 아래 자기의 명예를 넓히고자 하는 야심가가 있으며" "왜구를 물리치기보다 동족을 멸시하는 자가 있다"고 비난했다. "이와 같은 분자는 우리 독립을 방해하는 악마"로 마땅히 소탕되어야 했다.

임시정부와 김가진을 따르는 청년들 간의 충돌은 곧 현실화 되었다. 1920년 6월 9일, 나창헌과 김가진의 아들 김의한 등 철혈단은 40여명이 임시정부 내무부를 습격하는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당시 임시정부 경무국장이었던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이 사건은 일본영사관의 사주를 받은 황학선이라는 자가 "나창헌 등의 애국 열정을 이용하여 정부의 각 총장과 경무국장 김구까지 전부 암살할 무서운 계획을 꾸몄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라고 기록했다. 황학선을 처단한 김구는 황학선의 자백 내용을 나창헌 등에게 보여 주었다. 이에 나창헌은 철혈단과의 관계를 끊고 임시정부에 적극 가담했다. 1925년 3월 임시의정원의 탄핵심판위원장이 되어 대통령 이승만의 탄핵을 주도한 사람은 나창헌이었다.

도쿄에서 생 마감할 계획도

통합 임시정부의 대통령에 선임된 이승만이 상하이에 부임하지 않은 것도 분란의 원인이었지만, 정작 그가 상하이에 도착하자 임시정부의 분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김가진은 원래 독립협회 시절부터 이승만과 가까운 사이였다. 이승만 자신도 '독립정신'에서 김가진을 자신의 미국행을 주선해준 사람의 하나로 꼽고 있고, 정정화는 김가진이 여비를 보태주었다고 증언했다. 김가진이 상하이로 망명해 오자 이승만은 상하이의 측근 안현경에게 김가진을 만나라고 지시했다. 이승만과 안현경이 주고받은 서신을 보면 김가진의 마음은 이승만보다는 이승만과 대립관계에 있는 이동휘나 안창호 쪽에 기울어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승만에 대해 '독립정신이 불철저한 썩은 대가리'라고 극언하던 이동휘는 이승만의 고압적인 태도에 반발하여 국무총리직을 사퇴했다. 1921년 1월 무렵 홍 진, 최창식 등은 김가진의 대동단 계열과 함께 이승만을 비판하는 문서를 살포했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수많은 민중들이 거둬 준 독립운동자금을 이승만이 호화생활을 하며 낭비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동휘에 이어 김규식, 노백린, 안창호 등 각원들로 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자, 이승만도 상하이를 떠나 난징으로 가버렸다. 혼란 끝에 임시의정원은 1922년 4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진로를 모색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결의했다. 독립운동가들은 당연히 대통령을 새로 뽑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일제의 자료에 의하면 1922년 6월 새로운 대통령으로 김가진, 백준(대종교의 백순의 오기로 보인다), 박은식 등이 추천되었으나 결국 안창호를 추천하기로 낙착되었다고 한다. 1922년 6월이면 김가진이 세상을 떠나기 한 달 전의 일이었다.

김가진이 세상을 떠나기 직전 마지막으로 추진했던 일이 하나 있다. 이승만의 측근인 장 붕이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김가진이 노인동맹단의 지도자였던 이 발(이동휘의 아버지)과 함께 도쿄로 가 일본의 조야에 독립을 역설하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할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김가진이 상하이에 도착한 직후인 1919년 11월 여운형이 일본으로 건너가 제국의 심장부에서 조선의 독립을 역설한 일이 있다. 당시 여운형은 독립운동 진영의 떠오르는 별이었지만, 일본의 조야에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가 일본에서 일본 정계의 요인들을 상대로 조선독립을 당당히 외친 '조헌문란(朝憲紊亂)' 사건은 일본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만약 일본주차 조선공사를 5년간 지냈고, 제국일본의 남작이었던 김가진의 방일이 성사되었다면 그 파장은 여운형의 조헌문란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크지 않았을까? 안타깝게도 김가진은 마지막 불꽃을 불사르기에 너무나 기력이 쇠해 있었다.
 

한홍구 교수는

△성공회대 교수(한국현대사), 민주자료관장 △서울대 국사학과 및 동 대학원 △워싱턴대학교 사학과 Ph.D. △국정원 과거사위 위원(전) △평화박물관 건립추진위원회 상임이사(전) △반헌법행위자열전편찬위원회 책임편집인(현)

△저서 : '대한민국사 1~4' '유신' '사법부' 외 다수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 특별기획 - 임정의 국로 동농 김가진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