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숙 민법전문박사 법무법인 산우

어린 영화배우와의 '불륜'을 당당히 고백했던 한 영화감독의 이혼청구가 2년 7개월 만에 기각되면서, 유책배우자가 이혼청구를 할 수 없도록 하고 있는 법원의 '유책주의'를 두고 연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실질적으로 이미 부부관계가 파탄에 이르러 되돌릴 수 없는 상황에서 굳이 한쪽의 이혼청구를 막을 이유가 있냐는 것이다.

현재 우리 법원은 상대방 배우자와 자녀가 받은 고통을 상쇄할 만큼의 충분한 보호와 배려가 이루어진 경우나 파탄의 책임을 묻기 힘들만큼 오랜 시간이 경과한 경우 등 특별한 사정이 있는 때가 아니면 유책배우자의 이혼청구를 허용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유책주의'는 법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1965년 대법원 판례에서 인정된 이래로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부정을 저지른 배우자에게까지 이혼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우리 혼인제도가 요구하는 도덕성과 신의성실원칙에 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부부관계가 이미 파탄에 이르렀다면 책임을 따지기보다 원만한 혼인의 해소를 위해 부부쌍방에게 이혼청구를 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파탄주의'가 힘을 얻고 있는 모습이다. 이에 따르면 부부관계는 양쪽 배우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한 것으로 그 관계가 파탄에 이른 것에 어느 한쪽의 책임만을 묻기 어렵고, 무엇보다 이미 '불행'해진 혼인생활을 원만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라도 부부 모두에게 이혼청구권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그래야 당사자들과 자녀들에게 모두 '덜 상처가 되는 이혼'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덜 상처받는' 재판상 이혼은 없다. 만약 덜 상처받고자 한다면 유책배우자와 그 상대방배우자 사이에 충분한 대화를 통해 서로 용서하고 용서받아 관계를 정리하고 충분한 보상을 통해 혼인관계를 끝낼 수 있는 '협의상 이혼'을 하면 된다. 그러나 법원에 '이혼청구'를 통한 이혼을 택했다는 것은 부부 사이에 대화와 이해만으로는 풀지 못한 문제들이 남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이혼청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은 '유책주의'의 예외에도 해당하지 않는 상황으로서 객관적으로도 여전히 잘잘못을 따져봐야 할 문제들이 남아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방의 '행복'을 위해 다른 일방이 모든 '불행'을 떠안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파탄주의'의 가장 큰 문제는 '축출이혼'을 막기 어렵다는 점이다. 과거에 비해 많이 평등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편의 경제적, 사회적 지위가 아내에 비해 우월한 우리나라의 경우 '파탄주의'는 주로 유책배우자의 입장인 남편에게는 면죄부가, 아내에게는 남편의 배신이라는 아픔과 함께 이른바 '축출이혼'까지 당했다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특히 재판상 유책배우자가 지급하는 위자료의 수준이 3000만원에서 많아야 5000만원인 우리나라에서 '축출이혼'까지 막지 못하게 된다면 남편의 '새로운 사랑'과 '행복'을 위해 이혼당해야 하는 아내들은 누가 보호해 줄 수 있을까.

혼인이 개인의 자유이듯 이혼 또한 개인의 자유에 의해야 한다. 하지만 신뢰와 약속으로 형성한 부부관계를 일방이 파괴한 경우라면 문제가 다르다. '파탄주의'의 도입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유책배우자의 '책임'을 재판과정에서 손해배상이나 재산분할의 비율조정 등을 통해 물을 수 있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기대일 뿐이다. 유책배우자의 상대방 배우자와 자녀가 받았을 정신적인 고통을 단순히 금전적 보상들로 대신할 수도 없다.

물론 '유책주의'가 완벽한 제도는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파탄주의'를 도입하는 것은 더 큰 사회문제와 불합리성을 불러오는 계기가 될 수 있음에 주의해야 한다.

[임경숙 변호사의 가족법 이야기 연재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