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냉전 연구자의 경고

미국과 중국 간의 전방위적 갈등에 대해 새로운 냉전의 시작이라고 보는 시각들이 많다. 대표적으로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보고서는 중국을 ‘적’으로 규정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해체하고 중국 중심의 다른 질서를 수립하려는 ‘적’이다. 행정부뿐 아니다. 올해 초 ‘현존위험위원회’(CPD·Committee on the Present Danger)가 다시 출범했다. 1940년대 후반 처음 출범해 미군 상비군 체제를 촉구한 뒤 해체했다가 1970년대 다시 등장해 소련과의 전면적 대결정책을 부추기던 민간 로비조직이었다. CPD는 “이제 중국과 사활을 걸고 대결할 때”라며 미국인을 조직하고 있다.

30년 가까이 미소 냉전을 연구한 버지니아대 명예 역사학 교수 멜빈 P. 레플러는 미 시사월간 ‘애틀랜틱’ 최신호 기고에서 “중국의 영향력과 군사력이 커지면서 미국 내에서 중국을 냉전 시기 소련과 동일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며 “하지만 중국을 소련처럼 대하는 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지적했다.

레플러 교수에 따르면 냉전은 동시에 2개의 강대국이 존재했기 때문에 벌어진 게 아니다. 1945년 이후 미국이 직면한 독특한 환경 때문에 벌어진 것이다. 그는 “현재 국제무대 권력 배치와 경쟁체제의 이념적 호소력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다”며 “1940년대 공산권 봉쇄정책으로 출발한 냉전 시대 정책은 지금 시대에 불필요할 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보다 위험하게 만든다”고 경고했다.

결정적으로 중국은 미국식 삶의 양식을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1940년대 소련과는 확연히 다르다. 중국은 자본주의 시장체제의 근본적 특성들을 받아들였다.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공감하는 기후변화 대책에도 비슷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으며, 테러와의 전쟁이나 유행병 확산 저지에도 힘을 합치고 있다.

물론 중국은 미국의 거대한 경쟁자다. 하지만 없어선 안될 협력자로도 바라봐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근 양국의 긴장이 높아졌지만, 2차 세계대전 이후 미소 경쟁보다 훨씬 덜 위험하다. 그리고 양국의 협력관계는 미중 양국의 복지에도, 글로벌 공동가치 수호에도 매우 중요하다.

냉전이 시작됐을 때는 전 세계가 30년 동안 전쟁 참화와 대공황을 겪고 난 이후였다. 1차 세계대전 때 800만명이, 2차 세계대전 때 6000만명 이상 죽었다. 1945년 당시 강대국들 사이에 오랜 기간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고 상상한 미국인은 거의 없었다. 또 막대한 군비지출의 부산물인 ‘전쟁 특수로 인한 번영’이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 자신한 미국인도 거의 없었다.

반면 유럽과 아시아는 폐허가 됐다. 논과 밭은 침수됐고, 둑은 무너졌다. 가축은 도륙됐고, 다리는 무너졌다. 철도는 망가졌고 공장은 잿더미가 됐다.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대표하던 산업강국 독일과 일본은 황폐화됐고 점령됐다. 영국은 거의 파산했고 프랑스의 사기는 크게 꺾였다.

전 세계적으로 민주적 자본주의 체제는 나쁜 평판을 얻었다. 1, 2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의 주범으로 인식됐다. 미국의 명망 있는 평론가 월터 리프먼은 1955년 “자유민주주의에 반대하는 대중들이 반혁명을 이끄는 시대에 살고 있다”며 “서구가 20세기 빈곤과 불안을 해결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은 2차 대전 직후 전 세계 금의 3분의 2, 자본의 4분의 3, 제조능력의 절반 이상을 가졌다. 미국의 국내총생산(GDP)은 소련의 3배, 영국의 5배였다. 미국의 공군은 하늘을, 해군은 바다를 지배했다. 항공모함과 해병대는 오대양에서 거칠 것이 없었다. 원자폭탄을 가진 유일한 나라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미 외교가의 핵심 인사들은 ‘미국의 파워가 아무리 막강해도 영원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우려를 갖고 있었다.

소련도 전쟁으로 폐허가 됐다. 미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했다. 그럼에도 공산체제는 살아남아 독일에 승리했고, 국제무대에서 일정 지분의 영향력을 확보했다. 스탈린은 유럽의 권력 공백에서 기회를 엿봤다. 동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보한 그는 이란에 압박을 행사했고, 터키해협의 통제권을 확보하려 했다.

전 세계에 걸쳐 소련의 이념적 호소력은 상당했다. 독일 항복 이후 두 달도 안돼 영국 국민들은 국민투표에서 윈스턴 처칠을 내쳤다. ‘민주주의를 지킨 용감한 우상’이라던 처칠 대신 복지국가 구현과 핵심산업 국유화를 공약한 사회주의 정부를 택했다. 영국 노동당은 소련 공산주의를 싫어했다. 하지만 다른 나라의 좌파 유권자들은 그렇지 않았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선거에서 공산당은 20~40%를 득표했다. 유고슬라비아에서 티토의 지지자들이 권력을 잡았다. 중국의 마오쩌둥은 대륙의 통제권을 착실히 확보하고 있었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민족주의적 혁명세력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무장했다. 공산당 이데올로기는 이들 나라의 낙후 원인을 제국주의 국가들의 무차별 착취 탓으로 돌렸다. 스탈린의 계획경제는 빠른 경제개발과 현대화, 튼튼한 국방력을 약속했다.

미국이 2차 세계대전에서 얻은 전략적 교훈은 유럽과 아시아의 자원을 적에게 내줘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1937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나치와 일본은 양 대륙의 상당 부분을 점령해 원자재와 산업 인프라, 숙련 노동자들을 약탈했다. 이런 자원을 갖고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 추축국들은 미국을 공격하거나 장기전을 수행하려 했다.

"중국은 존중받기 원하는 일반국가" 로 이어짐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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