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미 세일오일에 선전포고

국제유가 직격탄, 30% 넘게 폭락

1991년 걸프전 이후 최대 낙폭


세계 3위 산유국 러시아가 글로벌 석유전쟁의 뇌관을 당겼다. 지난 6일 사우디아라비아 등 OPEC(석유수출국기구) 회원국 14곳과 러시아 등 비회원 산유국 10곳의 모임인 OPEC 플러스 회의에서 감산을 거부하면서다.

국제유가는 9일(현지시간) 20% 이상의 대폭락을 기록하면서 미국 월가를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와 같은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날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4월 인도분 서부 텍사스산 원유(WTI)는 전 거래일보다 배럴당 24.6% (10.15달러) 떨어진 31.13달러, 두바이유는 15.7% 하락한 32.87달러에 거래를 마쳤다. 배럴당 30달러대에 겨우 턱걸이를 한 것이다. 하루 낙폭 기준으로는 걸프전 당시인 1991년 이후 최대다. WTI는 전 거래일인 6일에도 산유국들의 감산 합의 불발 소식에 10.1%나 급락한 바 있다. 골드만삭스는 “OPEC과 러시아의 원유 가격 전쟁이 명백히 시작됐다”면서 2분기와 3분기 브렌트유 가격 전망을 배럴당 30달러로 낮췄으며 최저 20달러까지 추락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코로나19 여파로 글로벌 공급망 붕괴라는 난관에 부딪힌 세계경제가 설상가상 석유 쇼크라는 메가톤급 연쇄 충격파까지 겹친 형국이다.

2016년 이후 OPEC 플러스 회원국들은 감산 정책을 협의해 유가를 배럴당 50~60달러 선에 맞춰 생산량을 유지해 왔는데 이 틀이 깨진 것이다.

러시아의 선전포고에 8일 2위 산유국 사우디가 다음 달부터 증산하겠다고 보복성 맞불을 놨다. OPEC의 맹주 사우디가 증산에 나서면 가격 하락은 불 보듯 뻔하다. 국제 원유 시장은 급속도로 패닉에 빠져들었다. 코로나19로 글로벌 원유 수요가 급감할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OPEC 플러스의 두 축인 러시아와 사우디가 치킨게임에 나선 것이다.

한국석유공사 관계자는 “아람코를 상장까지 한 사우디로서는 저유가 장기화는 권력의 위기를 초래할 수 있어 이 전쟁은 불가피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외형적으로는 러시아와 사우디가 맞붙은 형국이지만 배경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다음 달 장기 집권을 위한 개헌 국민투표를 앞두고 원유 증산을 통해 구멍 난 재정을 메움과 동시에 트럼프 대통령과 미국 셰일 업계를 정면 겨냥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그동안 푸틴 대통령은 원유 감산이 미국 셰일 업체의 배만 불린다는 주장을 해왔다. 러시아가 증산으로 유가를 낮은 수준으로 계속 유지하면 원가 경쟁력에서 밀리는 미국 셰일 업체들은 줄 파산으로 몰리게 된다. 러시아의 행보는 독일까지 천연가스를 수송하는 ‘노드스트림2’ 가스관 구축 사업 확대를 견제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을 직접 겨냥했다는 해석도 있다. 지난해 말 트럼프 미 대통령은 이 사업이 러시아 가스에 대한 유럽의 의존도를 심화시킬 것이라며 사업에 참여하는 기업을 제재하는 내용이 포함된 2020회계연도 국방수권법(NDAA)에 서명했다.

미국 셰일 업체들은 코로나19의 팬데믹에 따른 석유 수요 둔화와 유가 폭락으로 자금조달이 어려워지는 가운데 빚더미에 앉은 업체들이 버티지 못하고 쓰러지는 줄도산 위기에 놓였다. 국제신용평가사인 무디스에 따르면 미국 셰일 업계가 올해부터 오는 2024년까지 상환해야 할 부채 규모가 860억달러(약 104조원) 에 달하는 것으로 분석됐다. 8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즈(FT)는 “러시아는 경쟁국인 미국의 셰일 산업은 물론 미국 경제까지 타격을 가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전했다.

["'코로나19(COVID-19)' 위기 확산" 연재기사]

안찬수 이재호 기자 khaein@naeil.com

안찬수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