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T "전염병보다 경제위기가 먼저 닥쳐"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 5일자에 따르면 25세 와라 멘도자는 볼리비아 서부 고산도시 엘알토에서 리모컨을 팔아 생계를 꾸린다. 엘알토는 수도 라파즈의 위성도시로, 제멋대로 뻗어나가는 빈민지역이다. 멘도자의 모친은 재래시장에서 볼리비아의 대표음식 '살테냐' 파이를 팔고, 부친은 바퀴자국이 깊이 패인 거리를 따라 택시를 운전한다. 지난달 말부터 시행된 전면 봉쇄조치에 따라 무장경찰들이 사람들의 이동을 막기 위해 도시 전체를 감시하고 있다. 멘도자 가족 누구도 밖에 나갈 수 없다. 때문에 볼리비아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비공식 경제부문이 거의 멈춰설 지경에 이르렀다.

멘도자는 "코로나19 확산을 막는 정부 정책을 이해하지만, 먹고 살기 위해 어떻게든 밖에 나가 일을 해야 한다"고 호소했다. 그와 마찬가지로 볼리비아의 수백만 노동자들은 어떻게든 하루하루를 버텨내려 몸부림치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스페인, 미국 등 서구의 부유한 국가들은 몇달 전부터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과 그로 인한 경제위기에 맞서 싸우고 있다. 이제 싸움의 전선은 새로운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서방 국가들보다 자금력이 부족한 아프리카와 중남미, 아시아 전역의 개발도상국들이 이제 막 코로나19 전쟁에 나섰다. 전염병 확산을 막는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생존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이들 나라가 방역과 경제 두 가지 전선 모두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는 불확실하다. 유럽과 미국 등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먼저 퍼진 곳에서는 공공보건 대응법을 강제하고, 이후 심각한 위기가 경제를 강타하면 대규모 재정·통화 부양책을 쓰고 있다. 개발도상국 많은 곳에서는 순서가 뒤바뀌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이 전염병 확산보다 먼저 나라 전체를 강타하고 있다.

이미 재정적으로 빠듯한 개도국들은 글로벌 경제활동이 갑작스레 멈추면서 충격이 배가되고 있다. 서구 방식의 대처법을 따라할 자금이 줄어들고 있다. 아프리카와 중남미의 중소 규모 산유국들은 브렌트 유가가 올 1월 배럴당 70달러에서 최근 30달러 아래로 떨어지는 데 속수무책이다. 국가재정이 무너질 위기다.

강력한 봉쇄·격리정책이 시행되기 전인 지난달 21일(현지시간) 볼리비아 수도 라파즈의 한 전통시장에 사람들이 과일을 사기 위해 몰려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신흥국 시장 자산에 대해 전례를 찾기 힘들 수준의 투매가 이뤄지고 있다. 국제금융협회(IIF)에 따르면 외국 투자자들은 코로나19 위기가 본격화된 올 1월 21일 이후 신흥국 증시와 채권시장에서 950억달러를 뺐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같은 기간 평균 자본유출액의 4배다.

게다가 서방국가 대도시에서 호텔 직원이나 셰프, 운전사, 가정부 등으로 일하던 개도국 해외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고 있다. 필리핀에서 나이지리아까지 경제의 생명수와 마찬가지인 해외발 송금액이 줄어들고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다. 항공편이 취소되면서 케냐 농부들은 더 이상 깍지완두나 화초를 유럽 전역 슈퍼마켓에 판매하지 못하고 있다.

여행업계도 붕괴하고 있다. 페루의 잉카유적지 마추픽추와 같은 여행지가 폐쇄됐다. 동아프리카의 동물보호구역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다. 태국의 동물 사육사들은 "관광수입이 없다면 먹이를 살 돈이 없어 코끼리 등이 굶어죽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인도는 3월 초부터 코로나19 감염자가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이미 침체된 경제가 더욱 암울해지고 있다. 나렌드라 모디 총리는 최근 전 국민을 대상으로 21일 동안의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봉쇄조치가 임박했다는 사전 경고를 하지 않아 인도 기업들은 가장 필수적인 업무를 유지하기조차 불가능한 상황이다. 식음료품과 의약품, 비누, 소독제 등 기초 생필품 공급망이 무너지고 있다. 영국 경제분석기관인 '캐피털 이코노믹스'는 14억명의 인구대국인 인도가 올해 단 1% 경제성장률에 그쳐 40년래 최저치를 기록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브라질 대통령 자이르 보우소나루는 최근 코로나19 전염병이 '단순한 훌쩍거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했지만, 2억1000만명 인구 중 2억명을 관장하는 지자체장들은 '필수적이지 않은 사업장을 폐쇄하고 시민들은 집에서 자가격리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글로벌 경제 멈춰서면서 충격 배가

개도국들에겐 경제위기가 먼저 닥친 뒤 코로나19 바이러스가 왔다. 한 달 전 확진자가 사실상 전무했던 아프리카는 현재 8000명 이상이 감염됐다. 전체 54개국 중 거의 모든 나라에서 감염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브라질에서만 최근 확진자가 4배 폭증해 1만1000명을 넘어섰다. 여전히 유럽과 미국의 확진자 수보다는 적지만 속도가 매우 빠르다. 공공의료 전문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이 사람들이 밀집한 빈민가와 일부 도시의 비공식 정착촌을 휩쓸 수 있다"고 우려한다.

가난한 나라들은 촘촘한 보건의료망이 없다. 아프리카는 경제적으로 넉넉지 않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아프리카 대륙 각국의 정부가 지출하는 국민 1인당 연 평균 의료비는 12달러에 불과하다. 영국은 4000달러 정도다. 나이지리아 전직 재무장관인 응고지 오콘조 이웰라는 "모든 사람들이 인공호흡기의 필요성을 말한다"며 "인공호흡기 보유량이 100개도 안되는 나라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개도국의 젊은 인구 비중이 상대적으로 높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코로나19 사망자가 줄어들 수 있다고 기대한다. 아프리카 인구의 중앙값에 해당하는 나이는 19.4세다. 인도는 27세, 중남미는 31세, 유럽은 40세다. 아프리카 대륙 12억명 인구 가운데 60세 이상은 약 5000만명에 불과하다. 또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고온다습 기후에서 느리게 확산한다는 가설도 있다. 물론 이에 대한 증거는 아직 확실치 않다.

그와는 반대로 우려할 지점도 많다. 아프리카에는 영양 섭취가 불충분하거나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 등으로 면역력이 낮은 사람이 많다. 코로나19 감염으로 목숨을 잃을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는 의미다. 빌 게이츠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봉쇄되지 않는다면 아프리카에서만 1000만명의 인구가 사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코로나19 사망자가 6만명을 넘은 가운데 영국 런던 임페리얼칼리지는 최근 "전 세계가 공동으로 대응하지 않는다면 총 사망자수는 4000만명을 넘을 것"이라고 추산했다.

이런 상황에서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은 공공보건 대처와 경제붕괴 가능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취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시릴 라마포사는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나오기 전, 3주간의 봉쇄조치를 취했다. 케냐 정부는 완전한 봉쇄정책을 꺼리고 있다. 대신 사회적 거리두기와 야간 통행금지를 택했다. 케냐 국적의 만평가인 패트릭 가타라는 서구 방식의 완전 봉쇄가 지속가능할지, 사람들이 폭동을 일으키지 않을지 우려한다. 그는 "봉쇄와 격리를 말하는 건 쉽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집에서 굶어죽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는가" 반문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나이지리아 국적 언론인으로 현재 남아공에서 거주하는 델레 올로제데는 '아프리카 국가들의 딜레마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각국의 판자촌이나 남아공 내 흑인밀집 지구인 타운십 등에서는 음식을 사재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를 할 만한 여윳돈이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역시 제한된 기간에 걸쳐 사회를 봉쇄하는 것만이 코로나19 위기에서 시간을 버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남아공 정부의 단호함이 인상 깊다고 말했다. 남아공은 최근 45분 만에 코로나19 확진 여부를 검사할 수 있는 67대의 이동검진 차량을 전국에 배치했다. 2014년 에볼라 전염병을 신속히 진압했던 나이지리아 정부는 2월부터 라고스공항에 입국하는 사람들을 상대로 정밀검사를 시작했다. 당시는 미국 공항에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을 때였다.

하지만 베네수엘라 출신 하버드대 경제학 교수인 리카르도 하우스만은 큰 희망을 품지 않고 있다. 그는 "선진국 상황은 개발도상국들이 직면한 현실에 견줘 보면 훨씬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다자주의 협력 부재로 위기 심화

나이지리아 전 장관 오콘조 이웰라는 현재 '세계백신면역연합'(GAVI) 이사회 의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는 "보건과 경제에 대한 충격은 서로 맞물려 있다"며 "보건 부문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면, 경제는 완전히 붕괴되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아프리카 국가들이 시행하는 다양한 조치들을 주목하고 있다. 긴급지출안과 세금감면, 양적완화 실험 등이다. 일부 나라는 생존싸움을 벌이는 국민에게 모바일로 지원금을 송금할 계획이다.

오콘조 이웰라 의장은 "하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이 취한 조치의 규모는 GDP의 약 0.8%에 불과하다"며 "그보다 많은 재정을 투입할 여력이 없다. 이런 국가들이 위기를 타개하려면 서구에서 시행중인 다양한 부양책과 비슷해야 한다 .GDP의 10% 정도는 써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인 크리스탈리나 게오르기에바는 전 세계 신흥국들에 약 2조5000억달러를 지원해야 할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개도국 상황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보다 심각하지만, 현재까지의 국제적 공조는 그때보다 훨씬 부족하다. 부유한 국가들은 코로나19 팬데믹에 싸우면서 모든 출입구를 닫아걸고 있다. 양대 강대국인 미국과 중국은 코로나19 발원과 팬데믹 원인을 놓고 갈등하고 있다. 국제적 공조 노력에 김을 빼고 있다.

IMF는 원조를 신청한 85개국에 500억달러 긴급자금을 제공했다.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는 1조달러 어치의 신규 특별인출권(special drawing rights)을 발행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부유한 국가들이 할당액을 분담해 가난한 나라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

UNCAD 개발전략국장인 리처드 코절 라이트는 "선진국들은 이런 조치를 인도주의적 차원이 아니라 자기 보험의 차원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며 "코로나19가 지구 남반부(개발도상국)에서 해소되지 않는다면, 선진국 역시 그 파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지적했다.

UN 아프리카 경제이사회 국장 베라 송웨는 "식음료 가격 인플레이션이 개발도상국 전역에서 폭동을 유발할 수 있다"며 "하지만 이에 대한 글로벌 공조는 부족하다"고 실망감을 표했다. 그는 "다자주의 협력 부재가 어떤 모습을 띨 것인지 사례를 찾는다면, 오늘날의 국제사회를 보면 된다"며 "우리 중 한 명이 바이러스에 걸린라면, 결국 우리 모두가 바이러스에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하버드대 하우스만 교수는 "개발도상국들은 코로나19 대처에서도, 경제적 충격 대처에서도 모두 곤경에 빠져 있다. 심지어 가장 좋은 시절에도 개도국들은 재정적으로 한계상황이었다. 이번엔 그런 호시절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코로나19(COVID-19)' 비상" 연재기사]

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김은광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