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이탈리아 파도바대에 이르기까지 중세 유럽 대학들은 유럽을 휩쓴 흑사병에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이후 수십년 동안 학문의 질과 양에서 급격한 하락을 겪어야 했다. 이후 약 7세기가 지난 21세기, 전 세계 대학들이 그와 비슷한 운명에 처했다고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21일 진단했다.

현재 전 세계 수백 곳의 대학들은 코로나19 팬데믹 대응에 집중하고 있다. 대학 캠퍼스를 폐쇄하고 온라인 강의와 시험에 적응하면서도 교수진과 직원, 학생들의 복지를 유지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대학에 더 광범위한 격변이 일어날 것으로 예상한다. 구조조정은 물론 폐교 가능성까지 거론한다. 이는 코로나19가 발생하기 오래 전부터 대학 회의론자들이 예견한 수순들이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사회적 충격은 대학의 강의와 재정, 근무패턴 등에 변화를 촉구하고 있다. 어떻게 자금을 조달하고, 어떻게 가르칠지 등 대학의 모든 측면을 바꿀 수 있다.


미국 듀크대 빈센트 프라이스 총장은 FT에 "코로나19 이전에도, 대학들은 과감한 결정을 요구받고 있었다"며 "이제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부담에 시달리는 대학들이 늘어날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대학교육과 시장주의를 접목한 영미권 대학들이 취약하다는 분석이다. 미국과 영국 호주 캐나다 등이다. 이들 대학은 스포츠와 숙박 시설 등에 투자하기 위해 수업료를 올리고 빚을 과도하게 냈다. 영미권으로 유입되는 국제유학생 숫자가 계속 늘어날 것이라는 기대감에서다. 현재 전 세계 500만명 이상이 국경을 넘어 대학교육을 받고 있다. 일반적으로 국제유학생들은 자국 대학에서보다 더 많은 학비를 지불한다.

영국 대학 대표기구인 '유니버시티UK'는 "영국 대학들은 유학시장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다"며 "올해 국제유학생으로부터 약 70억파운드(약 10조6000억원)의 재정수입 감소가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이는 영국의 모든 대학들이 걷는 수업료의 1/3에 달한다. 영국 대학들은 최근 정부에 연구개발비 명목으로 20억파운드를 추가 요청했다.

호주 대학 대표기구인 '유니버시티 오스트레일리아'는 올해 대학 재정수입이 약 46억호주달러(약 3조5600억원)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다. 대학 총 재정수입의 약 14%다. 이 단체 대표인 캐트리오나 잭슨은 "향후 6개월 동안 대학에서 약 2만1000개의 일자리가 사라질 것이고, 그 이후엔 더 많은 감원이 있을 것"이라며 "개별 대학들은 이미 전반적으로 비용을 줄이고 있다. 운영비 지출 삭감과 주요한 시설 투자 연기, 선임 교수·직원의 보수 삭감 등이다. 하지만 이것으론 충분치 않다"고 전했다.

호주 야당인 노동당은 정부에 긴급자금을 요청했다 노동당 교육담당 대변인인 타냐 플리버섹은 "호주 대학들이 벼랑 끝에 내몰리도록 방치해서는 안된다"며 "연방정부가 지금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일부 대학이 폐교할 것이다. 중요한 연구개발 중단과 수천 개 일자리 삭감, 대학생들의 학위 취득 중단 등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시장주의' 영미권 대학 특히 취약

최근 수년 동안 중국을 비롯한 신흥국의 중산층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전 세계 주요 대학에 국제유학생이 급증했다. 약 100만명의 중국 학생들이 해외 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다.

올해 그 숫자는 급격히 감소할 전망이다. 중국의 많은 유학생들은 올해 춘절 이후 해외의 소속 대학으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 향후 여행제한이 풀린다 해도, 그 파급효과는 지속될 전망이다. 유학생 소속국 내에서 입학시험과 영어자격시험의 연기, 유학 마케팅 행사 취소, 비자 처리절차의 지연 등이다.

호주 총리실 재무수석을 지낸 맥쿼리대 마틴 파킨슨 총장은 "일부 대학들은 중국 유학생 비중이 너무 커 상당한 리스크에 노출돼 있다"며 "앞으로 외국 유학생 증가율이 상당히 둔화될 것이다. 아무도 집에서 나오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이 끝나면 대학들은 기존의 사업모델을 대대적으로 개편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기적으로 해외 대학에 대한 수요는 더욱 위축될 전망이다. 코로나19 감염 우려가 여전한 데다 경제적 충격으로 자녀들의 수업료를 감당하기 어려운 가정들이 속출할 것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 대학순위 조사기관은 'QS'가 최근 1만1000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응답자가 해외 유학 계획을 연기했다고 답했다. 또 나머지 20%는 유학갈 국가를 바꿨거나 아예 유학을 포기했다고 답했다.

옥스퍼드대 사이먼 마긴슨 교수는 "해외 유학생을 끌어들이는 데 적극적인 호주와 영국, 미국 등의 영미권 국가들은 상대적으로 코로나19에 뒤늦게, 느슨하게 대처했다"며 "이는 한국과 싱가포르 등이 자국 대학에 대한 투자를 강화하면서 아시아권 학생들을 끌어들이는 상황과 맞물리고 있다. 영미권 대학에 대한 중국 학생들의 관심이 사그라드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마긴슨 교수는 "코로나19로 중국 학생들이 해외로 덜 나가려는 한편 인도나 나이지리아 등 유학시장의 나머지 수요를 메우던 기타 신흥국 가정들이 비싼 수업료를 감당하기 어려워지면서 영미권 대학들을 중심으로 한 글로벌 유학시장이 공급 우위에서 수요 우위로 전환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대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중국은 유학을 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고, 인도는 유학을 올 능력이 안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 상황은 인구변동 압력과도 맞물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에서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10대 후반 학생들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게다가 최근 수년 동안 저소득 가정 출신 학생들의 대학 입학률이 늘어나는 추세였지만,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이 가중되면 그같은 흐름이 반전될 수 있다.

대학의 다른 재정수입원도 위협받고 있다. 영국의 많은 대학들에서 코로나19 위기로 대면수업을 받지 못하는 학생들이 수업료 감면을 요구하고 나섰다. 대학들은 기숙사와 회의 유치, 훈련 프로그램 등에서 얻는 수입이 없어졌다. 기부금은 물론 투자수익도 줄었다.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미국 공립대학의 신용전망을 '부정적'으로 낮췄다. 무디스는 이달 "각 주정부의 세수가 줄어들면서 공립대 자금조달 방안이 취약해졌다"고 경고했다. 이들 대학은 주의회로부터 총수입의 1/4 정도를 보조받는다.

무디스는 "미국의 공립대는 다른 나라 대학들보다 재정조달 측면에서의 리스크가 더 크다. 주정부가 보건의료 등 더 절박한 부문에 지출을 늘려야 하기 때문에 공립대에 대한 지원을 줄일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인 레베카 윈스롭은 "대학교육의 개편이 불가피하다. 올해는 대학들이 큰 충격을 받을 것이다. 연방정부가 대학교육을 지원하기 위해 무엇을 할 것인지가 가장 큰 의문"이라고 말했다.

대학 연구개발 능력 약화 우려

수업료에 더해, 투자자금 조달 압박도 대학의 주요 기능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바로 연구개발이다. 연구개발력은 전 세계 대학 순위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이 부문 점수가 높아야 국제유학생과 저명한 교수, 학자들을 끌어들이는 데 유리하다. 국내 학생 수업료와 정부의 연구개발비 지원으로는 대학 운영비를 댈 수 없다. 때문에 국제유학생으로부터 받는 후한 학비가 그 간극을 메웠지만, 코로나19로 그마저도 어렵게 됐다.

코로나19 바이러스 연구에 선두에 선 임페리얼칼리지런던의 앨리스 개스트 총장은 "대학의 중요한 연구 비용을 메우기 위해 유학생 학비와 같은 재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추세를 정부가 바꿔야 한다"며 "사회 전체가 연구개발을 지원할 필요가 있다. 코로나19 위기는 이를 매우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의 연구개발비를 어떻게 마련할지, 해외유학생 의존도를 어떻게 줄여나갈지 재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영국의 연구개발 공식 자금지원처인 'UKRI'는 최근 대학의 연구프로젝트 지원 기한을 6개월 연장했다. 많은 대학원생 연구자들에게 단기간이나마 숨쉴 여지가 생겼다. 하지만 영국 대학들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인해 EU가 과학 분야 연구개발을 촉진하기 위해 만든 940억파운드 규모의 '호라이즌유럽기금'을 더 이상 이용할 수 없다. 영국 정부는 연구개발 지원을 대폭 증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얼마나 지켜질지는 미지수다.

다른 수입원도 줄어들고 있다. 영국 자선단체인 '캔서리서치'의 레스젝 보리시비치 대표는 "코로나19 여파로 현재까지 지원 예산을 4300만파운드 줄였다. 대학 연구개발을 돕는 다른 자선단체들도 지원액을 줄일 것이다. 투자수익과 기부금이 감소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영국 에든버러대 피터 매티슨 부총장은 대학교육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각국 정부가 코로나19 위기를 맞아 전문가들의 과학적 조언을 경청하고 있는 상황을 환영한다"며 "코로나바이러스 돌발이라는 이례적인 상황에서 대학들이 이와 관련한 연구개발에 믿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대응하고 있다. 대학이 사회와 국가에 어떤 기여를 하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에든버러대 연구진들은 코로나19와 관련한 치료제 개발과 임상실험을 진행하고 있다. 다른 대학들은 보호장비를 기부하고 검진키트를 생산하며 공공의료서비스인 NHS로 몰리는 환자들을 분담하기 위해 치료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외형뿐 아니라 내용도 바뀐다

뉴욕 바드대학교의 리온 봇스타인 총장은 "코로나19로 바뀌는 건 대학들의 외형만이 아니다. 대학의 교육콘텐츠도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코로나19로 인해 일반적인 대학교육 수요는 물론 인문학, 보건의료 등의 응용학문에 대한 수요가 늘어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는 "대학의 문제는 재정이 무너지는 것을 넘어선다. 우리가 어떤 공동체에서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문화적 충격이 가해지고 있다. 교육을 보편적 복지로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부를 창출하는 도구라고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뉴욕 사립종합대 '뉴스쿨'의 데이비드 반 잔트 총장은 미국 안팎의 학생들이 과연 다음 학기에 학교로 돌아올 것인지 우려한다. 그는 "많은 대학들에게 이번 가을학기는 살아남느냐 망하느냐 갈림길이 될 것이다. 이전처럼 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지 또는 부분적으로나마 학교를 열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코로나19 바이러스는 가속장치일 뿐이다. 불타는 장작에 뿌리는 석유와 같다. 변화와 개혁이 필요한 많은 대학들에게 행동에 나설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같은 변화에는 인력감축과 합병, 폐교 등도 포함될 수 있다.

하지만 마냥 암울한 것만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케임브리지대의 경우 흑사병 이후 신학에 몰두하던 학풍이 의학과 같은 응용학문으로 전환됐다. 또 사회적 부의 재분배로 대학에 대한 기부금이 늘었다. 이는 새로운 대학 설립으로 이어졌다.

케임브리지대 부총장을 역임한 레스젝 대표는 "세계적 대유행 전염병은 주요한 흔적을 남긴다"며 "역사적으로 살아남은 대학들을 살펴보면, 사회의 변화에 잘 적응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원격학습 대세 될까

향후 대학들이 직면한 가장 큰 문제는 온라인 원격 강의를 어떻게 배치하고 운영하는지다. 코로나19에 따른 자가격리와 봉쇄로 전 세계 수백만명의 대학생들이 강의실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훨씬 많은 학생들에게 원격으로 강의를 제공하게 되면 대학에 가해지는 수업료 인하 압박을 어느 정도 상쇄할 수 있을지도 궁금한 사항이다.

일부 학교는 코로나19로 강제된 변화를 기회로 받아들이고 있다. 영국 엑서터대 스티브 스미스 부총장은 "우리는 기존과 다른 방식으로 가르치고 있다"며 "코로나19 위기로 대면 강의 대비 온라인 강의의 장점과 가치를 적극 검토하게 됐다"고 말했다.

미국 애리조나주립대와 같은 대학들은 온라인 강의 체제를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학비가 저렴한 것은 물론 3~4년으로 고정된 학위 과정에 융통성을 줄 수도 있다.

스페인 IE대학교는 수년 전부터 온라인 강의에 투자하고 있다. 이 학교 관계자는 "원격 학습에 임하는 학생들은 '같은 반'이라는 정체성 개념을 더욱 강하게 갖고 있다. 수업 협력도가 높아졌다. 대면 수업보다 기술을 개발하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 관계자는 "원격 수업을 잘하기 위해서는 비용의 저렴성으로만 접근해선 안된다. 또 온라인과 대면 강의를 계속 혼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국연방 대학연합'(ACU) 조애나 뉴먼 대표는 대학들의 온라인 파트너십 네트워크를 거론한다. 동아프리카 지역 대학들과 연계해 공통의 교육콘텐츠와 학습법 개발, 자격시험 등을 연계하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혜택을 받는 수많은 학생들은 다른 나라의 대학에 갈 여유가 없다"며 "교육 수요가 크지만 그에 따른 공급이 어려운 개발도상국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호주 울런공대 테오 파렐 부총장은 "우리는 대학교육 서비스와 관련해 역사상 가장 급격한 변천을 목도하고 있다. 코로나19 위기가 끝나도 이전으로는 되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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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광 기자 powerttp@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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