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쏜턴 조지워싱턴대 교수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군이 남침을 시작했다. 6.25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6.25전쟁은 왜 벌어진 것일까?

6.25전쟁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에 발간한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 of the Korean War)』이란 제목의 책에서 조지워싱턴대학 교수 리처드 쏜턴(Richard C. Thornton)은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소련 및 중국이 자국 입장에서 보다 유리한 입지를 점유하고자 노력하는 과정에서 6.25전쟁이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의 승리를 기반으로 지구상 모든 국가와의 대등한 관계 수립을 통해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고자 했던 마오쩌둥 △이 같은 중국을 자국에 예속시켜 대미 견제 수단으로 삼으려했던 스탈린 △미국인과 자유진영 국가 국민들에게 공산주의의 위험을 각인시킴으로써 공산세력에 대항한 봉쇄전략 구현에 필요한 미 국방비 400% 증액을 정당화시키고자 했던 트루먼, 이 세 사람의 전략적 계산이 한반도에서 6.25전쟁이란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스탈린이 미중관계 정상화를 자국 입장에서 최악의 상황으로 간주했다고 말한다. 스탈린이 한반도에서의 미중 격돌을 통해 미중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차단하고, 중국을 자국에 예속시키기 위해 김일성의 남침 요청을 수용했다고 말한다. 한편 저자는 트루먼이 스탈린의 북한군 남침 지원 노력을 미군 재무장과 동맹체제 강화 목적으로 방관했을 뿐만 아니라 유도하기조차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문제는 마오쩌둥의 미소 양다리 전략

마오쩌둥의 문제는 중소동맹 체결과 병행하여 미중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다는 사실에 있었다. 마오쩌둥의 미소 양다리 전략 추구가 문제였던 것이다.


국공내전에서 승리한 마오쩌둥은 19세기 당시 중국이 서구 열강과 체결한 모든 불평등 조약을 파기한 후 지구상 모든 국가와 대등한 관계를 수립하고자 노력했다. 마오쩌둥은 1945년 8월 스탈린이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와 체결한 중소조약을 대등한 형태로 바꿈으로써 이것을 여타 국가와 중국의 관계 측면에서 모델로 삼고자 노력했다.

마오쩌둥이 소련과 먼저 관계 정상화를 추구했던 것은 소련으로부터 대만 침공에 필요한 항공기와 함정을 얻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측면이 있었다. 마오쩌둥은 이들 항공기와 함정을 이용해 대만을 점령함으로써 국공내전 종료 후 미국을 포함한 모든 서방 국가들과 관계를 정상화할 것이라고 지속적으로 말했다. 이는 서방 국가의 자본과 첨단 과학기술을 도입해 중국을 세계 일류국가로 만들기 위함이었다. 마오쩌둥은 중국이 미국은 물론이고 소련에게조차 의존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중국이 완벽한 주권국가가 되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스탈린 칠순 생일잔치 참석을 이유로 모스크바에 도착한 1949년 12월 16일 마오쩌둥은 스탈린에게 기존 중소조약 개정 필요성을 거론했다. 마오쩌둥의 요구에 스탈린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그 후 며칠 동안 마오쩌둥과의 회동을 의도적으로 거부했다고 한다.

스탈린의 문전박대에 울화가 치민 마오쩌둥은 본인과 베이징의 중국 지도자들이 주고받는 전문(電文)을 스탈린이 감청하여 읽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여, 전문을 이용해 스탈린과 대화하기로 결심했다. 베이징의 지도자 류사오치(劉少奇)에게 보낸 12월 19일자 전문에서 마오쩌둥은 특정 자본주의 국가와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말한 자본주의 국가는 미얀마였다. 이어서 마오쩌둥은 본인이 허용해준 절차를 "모든 자본주의 국가들"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6.25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가 벌어졌던 화살머리고지에서 우리 군 장병들이 전사자 유해를 발굴한 뒤 거수 경례를 하는 모습. 사진 국방부 제공


마오쩌둥의 이 메시지는 스탈린에게 강력한 압박으로 작용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이 거론한 자본주의 국가가 미국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스탈린은 인도가 1949년 12월 30일, 영국이 1950년 1월 6일을 기점으로 중국을 인정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또한 미국이 미중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스탈린은 미중관계 정상화를 위한 노력이 막후에서 진지하게 진행되고 있으며, 이 같은 정상화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생각했다. 스탈린은 미중관계 정상화를 소련의 아태지역 안보구조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엄청난 사건으로 생각했다.

양다리 전략 차단 - 스탈린의 전략적 대응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미·소 양다리 전략을 자국 입장에서 최악으로 간주했다. 이 같은 전략을 차단하기 위해 김일성의 남침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심했다. 그런데 1949년 초반 이후 스탈린은 수차례에 걸친 김일성의 남침 지원 허용을 거부한 바 있었다.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미중관계 정상화를 허용해준 듯 보였던 1949년 12월 19일자 마오쩌둥의 전문을 보며 북한군의 남침 지원 요청에 대한 스탈린의 입장이 180도 바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스탈린은 기존 중소조약을 최적의 형태로 바꾸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이제 소련의 주요 적국인 미국과 중국의 관계 정상화란 보다 큰 위기가 도래할 가능성이 있어보였던 것이다. 스탈린은 이것을 어떠한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저지해야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탈린이 미중관계 정상화 저지 차원에서 선택한 대안은 한반도전쟁이었다. 스탈린은 마오쩌둥의 대만 점령 이전에 한반도전쟁을 도발해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격돌하게 함으로써 중국의 미중관계 정상화 노력을 차단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마오쩌둥과 중소동맹 개정을 추구하고 있던 당시에서조차 스탈린은 북한군의 남침 지원 문제를 놓고 골몰했다. 1950년 1월 18일 이주연(李周淵)의 중국주재 북한대사 부임을 축하하기 위한 모임에서 김일성은 남침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스탈린을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Terenti Fomitch Stykov)에게 요청했다. 이 같은 김일성의 요청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북한군 남침 지원 문제와 관련하여 김일성과 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내용의 전문을 1월 30일 스티코프에게 보냈다.

중소 봉쇄 - 트루먼의 전략적 대응

트루먼 또한 마오쩌둥의 미소 양다리 전략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중소동맹을 체결한 중국과 소련을 동일체로 간주하여 봉쇄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핵무기와 전략폭격기를 독점하고 있었다. 미국은 모스크바에 인접한 터키와 같은 국가에 이들 무기를 배치하는 방식으로 지구상 도처에서의 소련을 포함한 공산세력의 위협을 억제할 생각이었다. 가능한 한 국방예산을 줄여 국가기반시설과 경제 건설 분야에 투입할 생각이었다. 이 같은 이유로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군사력을 대거 삭감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1200만명 병력과 900억달러의 국방비를 유지하고 있던 미국은 1949년 당시 120만 병력과 130억달러 수준의 국방비를 유지하고 있었다.

1949년 9월 소련 핵실험 성공과 10월 1일의 중국대륙 공산화로 이 같은 미국의 구상은 의미를 상실했다. 더 이상 미국이 핵무기에 의존하여 안보를 지킬 수 없게 된 것이다.

미국은 소련의 핵무장과 중국 대륙 공산화에도 불구하고 공산중국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거나, 적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 재무장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중국이 소련과 동맹을 체결하면 문제가 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 이 경우 소련이 유럽에서, 중국이 아시아 지역에서 효과적으로 공산세력을 확산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 같은 노력을 통해 이들 국가가 일본 및 독일과 같은 국가의 과학기술 능력에 접근하는 경우 향후 이들이 미국을 위협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마오쩌둥이 모스크바를 방문한 1949년 12월 16일 미국이 긴장했던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하라는 의미의 마오쩌둥이 류샤오치에게 보낸 1949년 12월 19일 자 전문이 발송된 직후인 12월 23일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이간시키기 위한 노력을 시작했다. 1949년 12월 말경 미국은 중국이 소련과 동맹을 체결하지 않으며, 적어도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경우 대만을 점령하게 해줄 뿐 아니라 미중 경제관계를 강화할 것이란 내용의 정책 문서인 NSC 48/2를 서둘러 작성했다. 이를 1950년 1월 5일 트루먼이, 1월 12일 에치슨이 공식 발표했다.

이 같은 미국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이 중소동맹 체결을 결심하자 미국은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봉쇄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런데 이 같은 전략을 구현하고자 하는 경우 미 국방비의 대거 증액이 요구되었다. 미국인들이 국방비 증액을 원치 않았다는 점에서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트루먼은 미국인들이 국방비 대거 증액에 동의하게 만들도록 하려면 미국이 핵전쟁에 못 미치는 수준에서 공산세력과 장기간 동안 치열하게 싸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는 공산중국과의 싸움이며, 싸울 수 있는 곳은 중국의 주요 관심 지역인 한반도란 것이다. 한반도전쟁에서 미군이 압록강을 겨냥해 진격하는 경우 중국이 자국 안보 측면에서 자동 참전하게 될 것이며, 이렇게 되면 중국과 치열하게 장기간 동안 싸울 수 있을 것으로 미국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군의 남침을 허용해줄 것이란 1950년 1월 30일자 스탈린의 전문이 있은 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은 1월 31일 트루먼은 중국과 소련 모두를 봉쇄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 구상을 지시했다. 미군이 중국과 한반도에서 격돌하도록 만들고자 하는 경우 북한군의 남침을 조장 및 유도해야 할 것이라고 미국이 생각했다는 것이다.

새로 정립된 미국의 전략을 담고 있는 NSC 68이란 문서에 따르면 130억달러 규모의 미 국방비를 500억달러 규모로 늘릴 필요가 있었다. 당시 미국의 1년 GDP가 2300억달러 수준이었다는 점에서 이는 미국인들이 공산주의의 위험을 절감하기 이전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런 이유로 6.25전쟁이 장기간 동안 치열한 방식으로 진행될 필요가 있었다.

다음 호에서는 한반도전쟁 발발을 위한 소련과 미국의 노력을 살펴볼 것이다.


쏜턴 교수는 | 퇴역 미 공군중령이자 1967년부터 지금까지 53년 동안 미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55년부터 6년 동안 일본의 아시야 비행장에서, 그 후 1년 동안 오산비행장에서 중국의 전문(電文)번역 요원으로 근무했다. 10년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예비역 신분의 공군정보 장교로 근무한 뒤 중령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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