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쏜턴 조지워싱턴대 교수

6.25전쟁에서 트루먼은 이승만 중심의, 스탈린은 김일성 중심의 남북통일을 추구했다는 관점이 보편적이다. 그러나 미 조지워싱턴대학 쏜턴(Richard C. Thornton) 교수는 남북통일은 명목상의 목표였으며, 이들이 추구한 실제 목표는 미국과 중국의 격돌이었다고 주장한다. 쏜턴 교수에 따르면 스탈린은 미국 견제 목적으로 중국을 자국에 예속시키기 위해서, 트루먼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공산세력의 위험을 절감케해 공산세력 봉쇄에 필요한 미 국방비 증액에 동의하도록,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에서 격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쏜턴은 한반도에서 미중이 격돌하게 하려면 스탈린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첫째, 중국의 대만 점령 이전에 북한군을 남침시켜야 한다. 북한군 남침 이전에 중국이 대만을 점령하는 경우 미국과 중국이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대결이 아닌 타협을 추구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군의 남침을 한국군이 저지할 수 없게 해야 한다. 한국군이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하는 경우 미군의 참전이 불필요해지면서 미중격돌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셋째, 미군이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몰아낼 수 있게 해야 한다. 미군이 압록강 부근으로 진격해야 중공군의 참전 가능성이 높아지며, 미국과 중국이 격돌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넷째, 중공군 참전을 강요해야 한다. 다섯째, 참전한 중공군이 소련의 참전을 요구할 수 없게 해야 한다. 소련이 참전하면 세계대전이 초래되면서 미중격돌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 호국보훈의 달 6월을 하루 앞둔 31일 경북 영천시 고경면 국립영천호국원 6.25 참전용사 묘역에서 유족들이 성묘하고 있다. 영천=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쏜턴은 한반도에서 미중이 격돌하게 하려면 트루먼 입장에서 다음과 같이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첫째,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구상 최강인 미국이 남침을 저지할 것으로 판단되면 북한군의 남침이 처음부터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군을 약화시켜야 한다. 셋째, 참전한 미군이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시킬 수 있게 해야 한다. 넷째, 중국에게 참전과 미중대결을 강요해야 한다.

6.25전쟁과 관련해 스탈린과 트루먼이 취한 조치는 정확히 일치했다.

스탈린의 한반도전쟁 준비와 지도

스탈린은 첫째, 중국의 대만 침공 이전에 북한군이 남침토록 했다. 스탈린은 중국의 대만 침공에 필수적인 항공기와 함정 제공을 지연시킨 반면 북한군의 전력을 대거 증강시킴으로써 중국의 대만 침공 이전에 북한군이 남침할 수 있게 했다.

둘째, 한국군이 남침을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북한군 전력을 증강시켰다. 1950년 1월 8일 스탈린은 국공내전에서 국민당군대에 대항해 중공군과 함께 싸웠던 북한군 전력의 귀환을 마오쩌둥에게 요청하라고 김일성에게 지시했다. 모스크바에 있던 마오쩌둥은 스탈린이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에서 김일성의 이 요청을 거부할 수 없었다. 또한 스탈린의 지원으로 남침 당시 북한군은 항공기 211대, 전차 242대를 보유하고 있었던 반면 한국군은 항공기 22대, 전차 0대 등 매우 미약한 수준이었다. 1950년 2월 스탈린은 전쟁경험이 풍부한 군사고문단을 파견해 북한군의 남침을 준비시켰으며, 그 후 북한군 남침계획을 작성하게 했다.

셋째, 북한군 남침에 대항해 미군이 참전할 수 있게 했으며, 38선 너머로 북한군을 몰아낼 수 있게 했다.

1950년 1월 초순 스탈린은 몇가지 이유를 들어 유엔주재 소련대표 말리크를 유엔에서 퇴장시켰다. 스탈린은 유엔군의 한반도전쟁 참전 관련 모든 결의안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과한 1950년 8월 이후에 말리크의 유엔 복귀를 허용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미군이 유엔군 일환으로 한반도전쟁에 참전할 수 있게 했다. 말리크가 거부권을 행사했더라면 미군 참전은 쉽지 않았다.


또한 북한군이 고속으로 진격해 부산을 점령하는 경우 미군의 참전이 곤란해진다는 점에서 스탈린은 북한군을 서울에서 1주일 정도 지체시켰으며, 3사단, 4사단 및 6사단으로 구성된 남진의 주력을 약화시켰다. 6사단을 천안에서, 4사단을 대전에서 호남 방향으로 진격시켰으며, 3사단만 부산을 겨냥해 진격하게 했다. 이 같은 방식으로 미군이 부산에 교두보를 설치할 수 있게 해주었다. 낙동강 방어선에 도착한 북한군에 충분한 전력을 제공해주지 않아 후방지역 경계에 신경 쓰지 못하게 함으로써 유엔군의 반격과 인천상륙을 가능하게 했다.

한편 1950년 5월 스탈린은 도쿄의 소련군 대장 데레프양코(Kuzma Derevyanko)을 본국으로 소환함으로써 맥아더가 북한군에 대항해 주일 미군기지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주일 미군기지에서 이륙한 항공기 지원이 없었더라면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몰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넷째, 중공군의 참전을 강요했다. 스탈린은 북한군이 승승장구하던 1950년 7월 초순부터 마오쩌둥에게 중공군의 참전 준비를 요구했다. 스탈린의 요구에 마오쩌둥은 대만 침공을 준비하고 있던 중공군을 만주지역으로 급파했다. 그 후 김일성 입장에서는 인천상륙작전이 이뤄지기 전에 중공군 참전이 성사되는 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었지만 스탈린은 이 시기까지는 중공군의 참전을 요구하지 않았다.

스탈린은 유엔군이 북진을 준비하기 시작한 10월 초순부터 지속적으로 중공군의 참전을 요구했다. 저자는 이것이 스탈린이 북한군의 승리가 아니고 미중격돌을 염원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라고 말하고 있다.

다섯째, 중국이 소련 참전을 요구할 수 없게 했다. 한반도전쟁을 결심한 후 스탈린은 당초 생각과 달리 마오쩌둥에게 중소조약의 전면 개정을 요구했다. 기존 중소조약에서는 중국 또는 소련이 제3국과 '분쟁' 상태에 있는 경우 나머지 국가가 자동 개입하게 되어 있었다. 스탈린은 중국 또는 소련이 제3국과 '전쟁' 상태에 있는 경우에만 이처럼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이런 본인의 주장을 새로운 중소조약에 관철시켰다.

미국 극비문서에 따르면 미군은 북한군 남침에 전쟁 수행이 아닌 경찰 활동 차원에서 참전했다고 시종일관 주장했다. 개정된 중소조약으로 인해 중공군이 참전하더라도 미국과 중국이 전쟁 상태에 놓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중국은 소련에 참전을 요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트루먼의 한반도전쟁 준비와 지도

트루먼은 첫째,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했다. 미국은 북한군 남침 준비에 관한 1950년 6월 19일자 미 중앙정보국 보고서 등 남침 준비 현황을 간과했다. 미국은 중공군의 대만 침공 준비와 관련해선 빈번히 경고했던 반면 북한군의 남침 징후가 상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침묵을 지켰다. 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남침 가능성을 부인했다.

더욱이 북한군의 남침을 유도했다. 한국을 자국의 아태지역 방어선에서 제외시킨 1950년 1월 12일의 에치슨 연설은 북한군 남침을 유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편 1950년 5월 미 상원외교위원장 코널리(Tom Connally)는 인기 시사주간지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한국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승만은 이것을 남침 유도와 다름이 없다고 생각했다. 1950년 1월 미 의회는 한국지원 법안을 부결시켰는데 이는 1930년 이후 미 의회가 대외지원 법안을 부결시킨 최초 사례였다. 소련은 미국의 이 조치에 특히 주목했다.

둘째, 북한군의 남침을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군을 약화시켰다. 1950년 2월 에치슨은 한국의 인플레 극복 차원에서 국방비를 대거 삭감하지 않으면 지원을 전면 중지할 것이라고 위협했다. 한국정부는 국방비 대거 삭감을 약속했다. 또한 미국은 1950회계연도 군사원조 1024만달러 가운데 2/3는 1951회계연도에, 1/3은 1952회계연도에 집행되게 했다. 1950년 1년 동안 통신라인 구입 목적으로 단지 108달러만 지원했다. 미국은 항공기와 같은 공격용 무기는 물론이고 대전차포 및 대전차 지뢰와 같은 남침 저지용 무기조차 제공해주지 않았다. 북한군 전력이 대거 증강되던 당시 미국의 이들 조치로 한국군의 북한군 남침 저지는 불가능해졌다.

셋째, 북한군 남침 이후 참전한 미군이 북한군을 38선 너머로 격퇴시킬 수 있도록 준비시켰다. 이미 1949년 6월 27일 미국은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유엔군의 일환으로 경찰 활동 형태로 참전할 것이란 극비문서를 작성했으며, 1949년 9월에는 유엔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한 후 인천과 또 다른 2곳 지역에서의 상륙을 통해 반격할 것이란 의미의 계획을 작성했다. 미군이 부산에 교두보를 마련하기 이전에 북한군이 전차를 필두로 부산을 점령하여 남한 점령을 기정사실화할 가능성을 우려한 미국은 북한군 전차를 확인한 1950년 5월 중순 북한군의 고속 진격에 대비한 3군 합동훈련을 실시했다. 전쟁 발발 며칠 전 맥아더는 유사시 일본의 특정 기지가 아니고 일본의 모든 지역이 한반도전쟁을 지원할 수 있게 조치했다. 또한 트루먼은 북한군에 대항한 육군, 해군 및 공군 전력과 더불어 유엔군을 준비시켰다.

넷째, 중국에 참전과 미중대결을 강요했다. 중공군이 참전하면 유엔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던 인천상륙작전 이전까지는 중공군 참전을 저지하기 위해 노력했던 미국이 인천상륙작전 이후 중공군의 참전을 강요하기 위한 조치를 본격적으로 취한 이유, 미군이 38선을 넘으면 참전하지 않을 수 없다는 중국의 지속적인 경고에도 유엔군이 북진한 이유, 북진 과정에서 8군과 10군단의 지휘를 양분한 이유, 청천강 이북 지역에 중공군이 대거 포진해 있음을 잘 알고 있던 상태에서 유엔군이 압록강으로 진격한 이유 모두는 미중격돌을 위해서였다.


쏜턴 교수는 | 퇴역 미 공군중령이자 1967년부터 지금까지 53년 동안 미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55년부터 6년 동안 일본의 아시야 비행장에서, 그 후 1년 동안 오산비행장에서 중국의 전문(電文)번역 요원으로 근무했다. 10년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예비역 신분의 공군정보 장교로 근무한 뒤 중령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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