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쏜턴 조지워싱턴대 교수

6.25전쟁 관련 주요 논란 중 트루먼 대통령의 맥아더 사령관 해임이 있다. 맥아더가 해임된 주요 이유는 트루먼의 명령을 어기며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 등 주요 작전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 권한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미 조지워싱턴대학 쏜턴(Richard C. Thornton) 교수는 맥아더가 트루먼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월권한 적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쏜턴 교수는 명령 불복이나 월권으로 알려진 부분은 맥아더를 해임하기 위해 트루먼과 애치슨이 지속적으로 꾸며낸 것임을 암시했다.

쏜턴은 그의 저서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진 맥아더 해임 사유가 조작된 것임을 입증해보였다. 쏜턴에 따르면 트루먼은 공산세력을 봉쇄하기 위한 미 국방비 대거 증액을 위해 미중이 한반도에서 제한전 수준에서 격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중공군 참전을 유도하기 위해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트루먼의 이러한 속내를 참전국들이 알아채면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은 불가능해지고, 중공군의 참전을 유도하지 못했을 것이다.

67년 만에 가족 곁으로 | 3일 대구 남구 충혼탑에서 열린 6.25 참전용사 고 김진구 하사의 '호국의 영웅 귀환 행사'에서 참석한 장병들이 김 하사를 기리며 묵념하고 있다. 김 하사는 2사단 31연대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1953년 7월 13일 화살머리고지 4차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국방부는 밝혔다. 대구=연합뉴스 김현태 기자


맥아더는 평소 중국 대륙을 공산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장제스(蔣介石)에게 되돌려주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을 염원했다. 이를 가장 잘 알고 있던 트루먼은 맥아더를 적절히 이용했다. 즉 중국을 자극해 참전을 유도할 때까지 맥아더와 공동보조를 취한 뒤 막상 중공군이 참전한 뒤에는 본인 의도에 역행하면서까지 이들 사건을 초래했다고 뒤집어씌워 맥아더를 제거한 것이다. 트루먼은 미중격돌을 통해 미 국방비의 대거 증액이란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맥아더를 제거하는 토사구팽(兎死狗烹)을 달성했다.

쏜턴 교수가 저서에서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키기 위해 상황을 조작했다고 주장한 내용과 1950년 12월 2일 이후 유엔군 후퇴 과정을 살펴보면 상황은 더욱 명백해진다.

6.25 70주년 현수막 내건 주한미대사관 | 16일 오전 서울 종로구 주한 미국대사관 외벽에 한국전쟁 70주년 관련 현수막이 걸려있다. 연합뉴스 한종찬 기자

논란이 된 맥아더의 대만 방문

1950년 7월 말경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의 유엔군을 공격하기 시작했지만 미 증원군은 한반도에 대거 전개되지 않았다. 유엔군은 풍전등화의 처지였다. 당시 미국은 만주에 상당한 규모의 중공군이 포진해 있으며, 이들이 5일에서 10일 이내에 낙동강방어선에 투입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트루먼은 유엔군이 취약한 상태에서 중공군이 참전하면 심각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중공군이 한반도전쟁에 참전하면 장제스 군대가 중국 본토를 곧바로 공격할 수 있음을 암시하기 위해 맥아더를 대만에 보내 장제스로 하여금 중국 해안의 중공군을 맹렬히 공격하게 했다.


그런데 에치슨 국무장관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장제스의 공격으로 중공군 참전이 억제되는 것이 아니고, 참전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에치슨의 주장에 공감한 트루먼은 대만의 중국 본토 공격을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맥아더가 본인의 허락을 받지 않고 대만을 방문해 장제스로 하여금 중국 본토를 공격하게 했다는 내용을 참모들을 통해 언론에 흘려 뒤통수를 쳤다.

해외참전용사에게 보낸 맥아더의 서신

1950년 8월 25일경 트루먼은 인천상륙작전을 앞둔 상황에서 중공군이 참전해 서울-인천 지역에 투입되면 심각한 문제가 초래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은 중공군 참전을 억제하기 위해 이번에는 대만이란 '당근'을 중국에 제시한다.

그런데 1950년 8월 25일경 맥아더는 대만을 결코 포기하면 안 된다는 상반된 내용의 메시지를 시카고 해외참전용사 모임에 보냈다. 맥아더가 10일 전 이 메시지를 미 육군성에 보냈지만 당시는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맥아더가 본인의 메시지를 해외참전용사 모임에 보낸 시점부터 이 메시지가 시중에 공개되기 직전인 8월 말경의 기간 동안 트루먼은 중국에 대만이란 당근을 제시해줌으로써 중공군의 한반도 전쟁 참전을 억제하고자 했다. 하지만 대만을 포기하면 결코 안 된다는 맥아더의 메시지는 트루먼의 정책에 어긋난 것이다. 이 메시지는 언론에 유포되어 회수가 곤란했다. 트루먼은 본인의 권위와 '당근 정책'을 재차 강조하기 위해 맥아더로 하여금 해당 메시지를 취소한다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게 했다.

이 같은 트루먼의 요구에 맥아더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상당히 반발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후 트루먼은 언론을 통해 맥아더가 대통령의 뜻을 거역하며 문제의 메시지를 해외참전용사 모임에 보냈다는 논란에 휩싸이게 만들며 맥아더를 흔들었다.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

에치슨은 회고록에서 "맥아더가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이라는 악몽을 연출할 당시 우리는 전신이 마비된 토끼처럼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라고 말하며,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 책임을 맥아더에게 돌렸다. 6.25전쟁에 관한 전통적인 시각은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은 맥아더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쏜턴 교수는 트루먼과 에치슨이 상황을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에 관한 미국의 노력은 6.25전쟁 참전과 동시에 시작되었다. 1950년 7월 1일부터 숙고를 시작해 8월 24일 최종 채택된 NSC-73/4란 극비문서에 따르면 미국은 한반도에서 중국과 싸울 예정이었다. 이 문서에 따르면 미중이 격돌하는 경우 미국은 한반도 안팎에서 중국을 겨냥해 적정 수준의 공중 및 해상 조치를 취할 예정이었다.

한편 1950년 7월 중순부터 트루먼은 38선 북진이 가능하도록 "이 지역에서 무력침략을 격퇴하고 국제평화와 안전을 복원한다"라는 유엔결의안 문구를 이용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다. 7월 15일 미 동북아실 실장 엘리슨(John Allison)은 "이 지역에서 국제평화와 안전을 복원하기 위한 유일한 방안은 유엔의 비호 아래 남북을 통일시키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9월 11일 트루먼은 유엔군이 남북통일을 추구할 것이란 내용을 담고 있던 NSC 81/1이란 문서에 서명했다. 9월 27일 트루먼은 38선 북진 관련 지시를 맥아더에게 하달했다.

한편 에치슨의 노력으로 1950년 10월 7일 남북통일을 염두에 둔 유엔결의안이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통과했다. 유엔결의안에 입각해 10월 8일 유엔군이 38선 북진을 시작했다. 이 순간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국 본토에 대한 공중 및 해상 폭격 가능성을 시사해 6.25전쟁을 중국 대륙으로까지 확전시킬 것임을 암시했다.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트루먼이 6.25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킬 것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 징표는 마오쩌둥이 중공군의 참전을 김일성에게 알려준 10월 8일 다음날 맥아더에게 내린 지시문이었다. 이 지시문에서는 기존 전력으로 한반도 전 지역에서 중공군과 대적할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만주 폭격은 트루먼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게 엄격히 제한했다. 만주라는 성역(聖域)을 중공군에 허용해주는 가운데 제한된 전력으로 중공군과 지속적으로 싸울 것을 요구한 것이다. 이 지시문은 맥아더가 압록강 진격을 주저하게 할 수 있는 성격을 담고 있다.

트루먼은 맥아더의 우려를 불식시켜 압록강 진격을 추진하기 위해 1950년 10월 15일 태평양 웨이크 섬에서 맥아더와 비밀리에 회동했다. 트루먼은 1950년에는 중공군 참전이 없을 것이라는 정보보고서를 보여주면서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을 촉구했다. 그 후 인터뷰에서 맥아더는 트루먼이 유엔군의 만주 폭격을 비밀회동에서 허용해주었음을 시사했다. 그러나 트루먼은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으로 중공군의 참전이 없을 것이며, 참전하는 경우 곧바로 무력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맥아더의 주장 때문에 추진된 것이라고 상황을 조작했다.

한편 2차 압록강 진격이 시작되기 이전인 11월 9일과 21일 유엔군이 추구해야 할 목표를 재논의하기 위해 국가안전보장회의가 개최되었다. 당시 회동에 참석했던 마샬 국방부장관은 맥아더뿐만 아니라 에치슨이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을 염원하고 있었음을 기록에 남겼다. 그런데 에치슨은 본인은 압록강 진격을 원치 않았는데 맥아더의 압록강 진격 요구가 너무나 강력하여 어찌할 수 없었다고 변명을 했다.

1950년 12월 2일 이후 유엔군의 후퇴

유엔군의 2차 압록강 진격 이후인 1950년 12월 1일 미국은 에치슨의 제안을 수용해 38선 부근에서 휴전협정을 체결하기로 결정했다. 유엔군은 11월 30일 저녁 신안주(新安州)에서 접전한 후 1달 이상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후퇴만 거듭 했다. 1951년 4월 초순까지도 소규모 접전만이 있었다. 후퇴 당시 유엔군은 중공군 인해전술 운운했지만 1950년 12월 28일경에도 중공군은 평양 부근에 있었다.

1951년 1월 4일 유엔군이 서울까지 포기하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맥아더사령부는 서울 포기 이유로 흥남 부근의 중공군이 향후 원주를 점령한 후 서울을 포위할 가능성을 우려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월 15일 미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38선 부근으로의 이동을 지시했다. 평택 부근까지 철수했던 유엔군은 1951년 3월 중순 재차 38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4월 11일 트루먼은 맥아더를 해임했다.

지금까지 논의에서 보았듯이 명령 불복종 또는 월권으로 트루먼이 맥아더를 해임시켰다는 기존 주장은 타당성이 없어 보인다. 쏜턴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트루먼은 중공군이 참전하는 경우 만주 폭격을 허용해줄 것이라는 본인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려고 맥아더를 전격 해임했다.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이라는 목표를 달성한 트루먼에게 만주 폭격을 고집하는 맥아더는 토사구팽의 대상일 뿐이었다.


쏜턴 교수는 퇴역 미 공군중령이자 1967년부터 지금까지 53년 동안 미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55년부터 6년 동안 일본의 아시야 비행장에서, 그 후 1년 동안 오산비행장에서 중국의 전문(電文)번역 요원으로 근무했다. 10년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예비역 신분의 공군정보 장교로 근무한 뒤 중령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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