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근 국방연구원 감사

역자는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이유에 관한 쏜턴의 관점에 공감하는 입장이다.

여기서 의문은 트루먼이 왜 웨이크섬 회동에서 맥아더에게 만주 폭격을 약속해주었으며, 이 같은 약속을 그 후 지키지 않으려 했을까, 그리고 이것이 트루먼의 맥아더 해임 이유가 될 수 있는가 등이다.

목표 달랐지만 방책 같은 맥아더와 트루먼

이 부분을 이해하려면 중소동맹 체결이 진행되던 1950년 초반 미국의 상황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미국은 중소동맹 체결로 중국이 아시아에서, 소련이 유럽에서 공산세력을 대거 확산시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미국은 그 대응 방안을 진지하게 논의했다. 첫째, 보다 심각한 상황이 제기되기 이전에 소련과 싸워야 할 것이란 관점, 둘째, 중국 대륙을 공산세력으로부터 빼앗아 장제스에게 되돌려주어야 할 것이란 관점, 셋째, 중국과 소련을 동시에 봉쇄해야 할 것이란 관점이 제기되었다.

첫째는 소련과 전쟁은 핵전쟁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가능하지 않았다. 트루먼과 에치슨이 세 번째 관점을 견지했던 반면 맥아더, 타임지 사주 루스(Henry Luce), 일부 공화당 의원을 포함한 차이나로비 세력들이 두 번째 관점을 견지했다. 당시 미국 내부에서 위세를 떨치고 있던 차이나로비 세력들은 중국과 대결 측면에서 먼저 한반도에서 미중이 격돌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트루먼은 공산세력 봉쇄에 필요한 미 국방비 대거 증액 측면에서, 맥아더는 중국 대륙 점령을 위한 전초전으로써 한반도에서 미중격돌을 염원했던 것이다. 여기서 보듯이 트루먼과 맥아더는 추구하는 목표는 달랐지만 한반도에서 미중격돌을 염원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맥아더를 이용할 필요가 있었던 트루먼

미중격돌 차원에서 트루먼과 맥아더는 한반도전쟁은 물론이고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을 염원하는 입장이었다. 유엔군의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이 필요했던 트루먼 입장에서 보면, 마찬가지로 38선 북진과 압록강 진격을 염원했던 맥아더를 적절히 이용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맥아더의 만주 진출 욕망을 고려하고, 중공군의 참전을 독려한다는 차원에서 마오쩌둥이 6.25전쟁 참전을 김일성에게 공지해준 1950년 10월 8일 이전까지 미국은 6.25전쟁을 중국 대륙으로 확전시킬 수 있을 것처럼 행동했다. 만주 폭격을 암시했다. 따라서 중국은 미군의 만주 진입 가능성을 고려하여 전진방어 차원에서 6.25전쟁 참전을 결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맥아더 또한 만주 폭격을 통한 만주 진출이란 본인의 염원으로 인해 중국에 대해 보다 호전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중국의 참전과 미중격돌에 기여할 수 있었다.

마오쩌둥이 참전을 결심한 10월 8일 이후 트루먼은 더 이상 중국에 참전을 종용할 필요가 없었다. 10월 9일 맥아더에게 하달한 지시문에서 유엔군의 만주 폭격을 트루먼이 어렵게 만들면서 6.25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키고자 노력했던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유엔군의 압록강 진격을 통해 미중격돌을 가능하게 하려면 중국 대륙 진입 차원에서 만주 폭격을 염원했던 맥아더의 호전성을 지속적으로 유지시킬 필요가 있었다. 트루먼이 웨이크섬 회동에서 맥아더에게 만주 폭격을 구두로 약속해준 것은 이 같은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약속해줄 당시에도 트루먼은 지킬 생각이 없었다. 만주 폭격은 6.25전쟁을 제한전으로 수행해야 할 것이란 본인의 의도와 배치되었기 때문이다.

맥아더 해임이 필요해진 트루먼

트루먼과 맥아더가 추구한 목표뿐만 아니라 방책이 전적으로 달라진 시점은 중공군과 유엔군이 대거 격돌한 1950년 11월 28일부터 11월 30일의 기간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만주 진출이란 본인의 목표 달성 측면에서 만주 폭격을 트루먼에게 요구해야 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트루먼은 본인의 목표 달성을 위해 전쟁을 한반도로 국한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맥아더의 만주 폭격 요구를 수용해줄 수 없었다.

맥아더의 만주 폭격 요구를 간과한 채 1950년 12월 1일 에치슨의 제안에 따라 12월 2일 이후 유엔군이 고속으로 평택 부근으로 남하했다. 남하 당시 맥아더는 만주를 폭격하지 않으면 유엔군을 한반도에서 철수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며 만주 폭격 필요성을 강조했는데, 이는 만주 진출 측면에서 만주 폭격이 필수적인 요소였기 때문이었다. 당시 맥아더는 본인에 대한 약속 이행을 트루먼에게 외치고 있었다.

트루먼이 1951년 4월경 38선 부근에서 전선을 고착시키면서 문제가 심각해졌다. 본인의 목표 달성 측면에서 트루먼은 38선 부근에서 지속적으로 중공군과 치열히 싸워야 하는 입장이었던 반면 맥아더는 만주 진출을 위해 만주 폭격을 주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트루먼은 이 같은 맥아더로 하여금 더 이상 유엔군을 지휘하게 할 수 없었다.

본인들의 지속적인 상황 조작으로 유엔군의 38선 북진 및 압록강 진격과 관련하여 도처에서 맥아더에게 비난이 제기되었다는 점에서 트루먼과 애치슨은 맥아더를 쉽게 해임시킬 수 있었다. 본인이 웨이크섬에서 한 약속을 놓고 볼 때 트루먼은 만주 폭격을 요구하기 때문에 맥아더를 해임한다고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70주년 맞이하는 6.25에 대한 재해석" 연재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