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쏜턴 조지워싱턴대 교수

6.25전쟁 관련 주요 쟁점에 '정보 실패' 논란이 있다. 대부분 6.25전쟁 전문가들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남침과 1950년 10월의 중공군 참전을 트루먼 대통령이 전혀 모르고 있던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당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쏜턴(Richard C. Thornton) 미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는 전술정보 측면에서 일부 실패가 존재했을지 모르지만 북한군 남침 또는 중공군 참전에 관한 정보와 같은 전략정보 측면에서 트루먼 행정부의 정보 실패는 없었다고 주장했다.


쏜턴 교수는 트루먼이 미 국방비 400% 증액을 위해, 맥아더 사령관이 마오쩌둥으로부터 중국 대륙을 빼앗아 장제스에게 되돌려주기 위해 한반도에서 미중격돌을 염원한 결과 북한군 남침과 중공군 참전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간과했다고 주장했다.

쏜턴은 북한군 남침 징후에 관한 충분한 정보가 존재했음을 다음과 같이 입증해 보였다. 6.25전쟁 발발 당시 미 중앙정보국장 힐렌퀘터(Roscoe Hillenkoetter)와 같은 권위 있는 인사들이 정보 실패를 부인했다. 6.25전쟁 당시 미국이 중국과 소련의 주요 결심을 인지한 상태에서 이들 결심에 대한 반응 차원에서 결심했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다수 있다. 이는 미국이 감청 등을 통해 이들 국가의 정보를 대거 수집했음을 의미한다.

미국의 정보 능력과 한반도의 중요성을 고려해볼 때 북한군 남침 관련 정보를 획득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없다. 쏜턴은 충분히 많은 정보가 있었지만 트루먼과 맥아더가 북한군 남침과 중공군 참전 관련 정보를 의도적으로 간과했다고 주장했다.

북한군 남침 징후 관련 증언과 보고

미 중앙정보국(CIA) 국장 힐렌퀘터는 북한군의 남침이 있은 다음날 미 상원에서 증언했다. 힐렌퀘터의 상원 증언은 미 국무장관 에치슨이 북한군 남침 관련 정보가 전혀 없었다며 상원에서 정보 실패를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에치슨의 정보 실패 주장에 미 상원세출위원회가 힐렌퀘터를 소환했다. 힐렌퀘터는 38선 부근 북한 주민 이주 현황, 전차를 포함한 주요 전력의 38선 부근 집결 현황 등 북한군 남침 징후를 보여주는 6월 19일자 정보보고서를 포함한 많은 자료를 갖고 설명했다. 그러자 상원세출위원장은 이들 정보를 트루먼 행정부의 고위급 인사들에게 제공해주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힐렌퀘터는 트루먼 등 미 행정부 주요 인사들에게 관련 정보를 모두 배포했으며, 이들이 해당 정보를 수령했음을 보여주는 확인서를 증거로 제시했다. 그러자 힐렌퀘터의 상원 증언에 참석했던 미 공화당과 민주당 의원 모두 미 중앙정보국의 훌륭한 임무 수행을 칭찬했다.

『강대국 국제정치와 한반도: 트루먼, 스탈린, 마오쩌둥 그리고 6.25전쟁의 기원(Odd Man Out: Truman, Stalin, Mao and the Origin of the Korean War)』

한편 맥아더 후임 유엔군사령관 리지웨이는 다음과 같은 정보보고서를 읽은 사람 가운데 북한군 남침 임박 사실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그 정보보고 내용은 "… 38선 이북 지역에서 방대한 부대가 이동했다. 38선 부근 모든 북한 주민이 38선 이북 2킬로미터 너머 지역으로 이주했다. 원산에서 철원으로 가는 모든 민간화물 노선이 전적으로 군용화물 운송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무장한 군인들과 방대한 규모의 탄약과 장비가 38선 부근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1950년 4월 중순 미 공군 특수수사대(OSI)는 소련이 "북한군의 남침을 명령했음이 분명하다"고 보고했다. 1950년 5월 초순 미 육군 정보당국은 "38선을 겨냥한 북한군의 점진적인 남진은 … 공세적 행위를 준비하기 위함일 수 있다"라고 말했다. 5월 23일에는 "언제라도 한반도에서 분쟁이 벌어질 가능성이 있다"라고 말했다.

중국과 소련의 주요 의사결정 통신감청

쏜턴은 1949년과 1950년 당시 미국의 한반도 관련 주요 의사결정을 보면 트루먼이 소련과 중국의 주요 결심을 잘 알고 있었음이 분명하다고 주장했다. 그 증거로 쏜턴은 다음과 같은 3가지 사례를 제시했다.

첫째, 마오쩌둥이 모스크바 방문 당시 베이징의 류사오치에게 보낸 1949년 12월 19일자 전문이 발송된 지 4일 뒤 에치슨은 미중관계 측면에서 매우 매력적인 제안을 담고 있던 NSC-48/1란 문서를 작성했으며, 이것을 12월 30일 NSC-48/2로 발전시켰다. 당시 전문에는 중국이 미국과 관계 정상화를 할 수 있음을 시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1950년 1월 5일 트루먼이, 1월 12일 에치슨이 이들 문서에 입각하여 연설했다. 이전의 NSC-48 문서의 초안이 반공 성격이었던 반면 이들은 중국의 태도 여하에 따라 중국의 대만 점령을 허용해줄 것임을 암시했다.

이 같은 점에서 보면 마오쩌둥이 모스크바에서 베이징으로 보낸 12월 19일자 전문에 대한 반응 차원이었음이 분명했다.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이 스탈린과 협상이 여의치 않자 미중관계 정상화 가능성을 담고 있는 전문을 베이징으로 보내 스탈린을 깜짝 놀라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둘째, 1950년 1월 30일 스탈린은 북한군의 남침을 허용해줄 것이란 내용의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이 전문이 발송된 지 48시간이 지나지 않아 트루먼이 공산세력 봉쇄 차원에서 미 국방비 400% 증액을 요구하고 있던 NSC-68이란 정책문서의 작성을 지시했으며, 이 문서가 6.25전쟁을 통해 구현되었다.

셋째, 마오쩌둥이 김일성에게 중공군 참전 관련 전문을 보낸 1950년 10월 8일 이전 트루먼은 중공군 참전과 관련해 별다른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중공군 참전이 결정된 다음날인 10월 9일 트루먼은 그 장소와 무관하게 한반도에서 유엔군과 중공군이 교전할 수 있도록 맥아더에게 권한을 부여해주었다.

쏜턴은 이러한 미국의 주요 의사결정이 중국 또는 소련의 유사한 의사결정 직후 있었다는 사실은 미국이 통신감청을 통해 이들 국가의 의사결정을 잘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정보 능력과 한반도의 중요성

트루먼은 당시 미국의 정보능력이 미미한 수준이었으며 한반도가 주요 정보 수집대상 지역이 아니라서 북한군 남침을 감지하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쏜턴은 미 정치가들이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고 반박했다. 쏜턴은 1947년에 미 중앙정보국과 국가안전보장국(NSA)이 창설되면서 미국의 정보 능력이 상당히 증진되었다고 말했다. 결과적으로 적은 미국의 활동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반면 미국은 적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6.25전쟁이 벌어지자 트루먼 행정부는 더 이상 그처럼 주장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왜냐하면 미국이 한반도는 물론이고 한반도 주변 지역의 정보를 매우 성공적으로 획득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군 남침에 관해 했던 것과 동일한 주장을 중공군 참전과 관련해 전개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군 남침과 관련해 "항상 가능한 상태이지만 1950년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중공군 참전과 관련해서 또한 "항상 가능한 상태이지만 1950년에는 가능성이 없다"고 주장했다.

미 정보당국이 능력은 있었지만 중공군의 참전을 예견할 수 없었다는 주장과 관련하여 쏜턴은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상당한 규모의 중공군이 한만국경 부근에 전개되어 있었으며 베이징과 이들 중공군 간에 점차 교신이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이들 교신 내용을 미국이 감청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중국이 한반도전쟁 참전을 준비하고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주는 부분이었다.

의도적인 간과인가 조작인가

쏜턴에 따르면 미국의 지도자들은 북한군의 남침을 사전 경보해줄 수 있는 다수의 구체적이고도 전술적이면서 야전에서 확인한 사항들을 북한군 남침 이전의 일정 기간 동안 간과하거나 무시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언론은 이들 사항을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반면 중국의 대만 침공에 관해서는 엄청날 정도의 비문 및 평문 수준의 경보가 있었다. 이는 당시 가장 의문스러운 부분이었다. 예를 들면, 역사학자 쿨덴(Joseph C. Coulden)이 주목한 바처럼 1950년 3월 1일부터 6월 25일까지의 미 중앙정보국의 일일보고에는 한국 관련 내용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1950년 5월 10일 신성모 국방부장관은 외신기자들을 상대로 북한군이 18만3000명의 병력, 173대의 전차와 195대의 항공기를 보유하고 있다고 말했다. 북한군 남침 이후 확인해보니 신성모의 발표는 거의 사실이었다. 그런데 뉴욕타임스만이 신성모의 발표를 간략히 보도했다. 1950년 5월 12일의 이승만의 기자 회견을 미국은 전혀 보도하지 않았다.

당시 이승만은 "북한군이 38선 부근으로 집결하고 있다"며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이 문제를 유엔과 미국을 통해 해결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1950년 4월 20일 북한군의 비약적인 전력 증강을 거론하며 한국군 전력 증강의 필요성을 에치슨에게 강조했던 주한미국 대리대사 드럼라이트는 신성모의 북한군 남침 임박 관련 5월 10일자 기자회견을 폄하했다. 미국으로부터 보다 많은 원조를 받기 위한 터무니없는 것으로 치부했다. 쏜턴은 미 국방비 400% 증액을 위한 NSC-68 문서가 트루먼의 결재를 받은 1950년 4월 15일 이후 주한미국 대사관이 미국으로부터 모종의 지시를 받은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미국은 중공군 참전 징후 또한 간과했다. 유엔군의 1차 압록강 진격이 진행되던 1950년 10월 24일 이전에 중공군이 한반도에 진입하고 있음이 다방면에서 목격되었다. 1950년 10월 26일 한국군은 중공군과의 접전을 보고했다. 그런데 유엔군사령부는 이것을 터무니없는 주장으로 치부했다. 쏜턴은 웨이크섬 회동에서 맥아더가 중공군 참전 사실을 조기에 인정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쏜턴에 따르면 미국이 이처럼 북한군 남침과 중공군 참전을 간과했던 주요 이유는 미국이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 측면에서 미중이 한반도에서 격돌할 필요가 있었으며, 이처럼 격돌하고자 하는 경우 먼저 북한군의 남침이 필수적이기 때문이었다. 북진 과정에서 중공군의 참전 사실을 조기에 발표하는 경우 우방국들의 우려로 중공군과 접전이 불가능해질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중공군과 대거 접전 이후 참전을 기정사실화하기 위함이었다.


쏜턴 교수는 | 퇴역 미 공군중령이자 1967년부터 지금까지 53년 동안 미 조지워싱턴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그는 1955년부터 6년 동안 일본의 아시야 비행장에서, 그 후 1년 동안 오산비행장에서 중국의 전문(電文)번역 요원으로 근무했다. 10년 동안 미 국방성에서 예비역 신분의 공군정보 장교로 근무한 뒤 중령으로 예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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