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근 국방연구원 감사

역자는 6.25전쟁에서 정보 실패가 없었다는 쏜턴 교수의 주장에 공감하는 입장이다.

쏜턴 교수에 따르면 6.25전쟁 이전 미국의 정보 능력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또한 브루스 커밍스가 2011년 출판한 『6.25전쟁(The Korean War)』과 하든(Blaine Harden)의 2017년 저서『스파이 왕: 한반도에서 미 스파이 대장 이면의 군림(King of Spies: The Dark Reign of America's Spymaster in Korea)』에 따르면 당시 미 정치가들은 한반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이 같은 이유로 1947년 1월 미국이 38선에 '봉쇄의 선'을 그었으며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결심했던 것이다. 이는 미국이 남한 중심의 통일뿐만 아니라 북한 중심의 통일 또한 용납하지 않을 것이란 의미였다.

정보 실패는 거의 불가능한 일

또한 미 육군, 공군, 중앙정보국, 극동군사령부가 한반도에서 독자적으로 정보를 수집 및 생산해 관련 부서에 배포할 정도로 한반도는 미국에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이 상대적으로 많은 외교관, 500명의 군사고문단과 700명의 전문가를 유지하고 있었다.

남한과 북한은 동일 언어를 사용하는 동일 민족이었다. 한반도 지형 특성상 북한 지역으로의 첩보원 침투가 매우 용이했다. 6.25전쟁 당시 북한은 여러 곳에서 동시 통합된 형태로 남침을 시작했는데 이는 적어도 1개월 이상 사전 준비가 필요했다.

따라서 북한군 남침 동향 정보는 쉽게 획득 가능했다. 북한군이 1950년 6월에 남침할 것으로 보인다는 1950년 3월 10일 정보보고서를 포함해 북한군 동향에 관한 상당히 많은 정보가 미 행정부의 주요 부서에 배포되었다.

에치슨과 맥아더 정보실패 주장하는 이유

1950년 6월 25일 미 상원 증언에서 에치슨은 북한군이 쥐도 새도 모르게 기습적으로 남침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미국의 저명 언론인 스톤(I. F. Stone)이 1952년에 저술한 『6.25전쟁 비사(The Hidden History of the Korean War)』에 따르면 6.25전쟁 관련 1차 및 2차 백악관 회의에 참석했고 한반도 관련 유엔결의안 작성과 유엔안보리 상정을 주도했던 미 국무성차관보 히커선(John D. Hickerson)은 1951년 6월 5일 미 상원의원들의 유도심문에 북한군 남침 실상을 토로했다.

미 국무성이 북한군 남침을 예상해 유엔결의안을 사전에 작성했으며, 남침과 동시에 이것을 유엔안보리에 상정할 예정이었다는 사실, 남침 당일 30명의 미 국무성 요원이 출근해 소련대표 말리크의 유엔 복귀 가능성과 유엔결의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가능성에 대비해 준비했음을 증언했다. 거의 유사한 시점 에치슨은 북한군 남침 당일 본인의 상원 증언과 정반대되는 증언을 했다. 북한군 남침과 관련해 정보 실패는 없었다고 미 상원에서 증언한 것이다. 맥아더 또한 북한군 남침이 본인이 전혀 모르는 가운데 기습적이었다고 주장했지만 그는 미 국무성처럼 남침에 대비하고 있었다.

스톤에 따르면 중공군 참전 관련 정보 또한 마찬가지였다. 1950년 10월 15일의 웨이크섬 회동 이후부터 중공군이 갑자기 자취를 감춘 1950년 11월 7일의 기간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 사실을 은폐 또는 축소했다. 예를 들면, 10월 26일 온정리 부근에서 중공군 3개 연대에 포위되어 있다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의 보고에 10월 28일 유엔군사령부는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런데 11월 7일 유엔군사령부는 중공군이 10월 16일과 20일 압록강을 도강해 참전했다는 사실을 유엔에 보고했다. 이처럼 맥아더는 중공군 참전 사실을 알면서도 은폐했다. 그러면서 정보 실패를 주장한 것이다. 그 이전의 은폐 및 축소와 달리 그후 맥아더는 참전한 중공군 숫자를 대거 과장했다.

미국은 왜 정보 실패 주장했나

트루먼과 에치슨은 물론이고 맥아더는 왜 북한군 남침과 중공군 참전 징후를 의도적으로 간과했을까? 그후 정보 실패를 주장했을까? 정보는 정치적 목표를 겨냥해 운용하기 때문이다. 하든은 한반도에서 생산한 북한군 남침 동향 정보를 워싱턴과 극동군사령부가 간과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는 쏜턴의 말처럼 추구하는 정치적 목표로 인해 트루먼과 에치슨은 물론이고 맥아더가 북한군의 남침을 염원했기 때문이었다.

미국은 북한군이 남침하는 경우 유엔군 형태로 참전해 낙동강까지 후퇴한 후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반격할 것이란 내용의 전쟁계획인 SL-17을 1949년 9월 작성했으며, 이 계획을 전쟁 발발 1주일 전인 1950년 6월 19일 모든 관련 부서에 배포했다. 이는 미국이 북한군의 남침을 염원했음을 보여주는 주요 증거이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북한군 남침 징후를 의도적으로 간과했다. 이처럼 간과한 후 충분한 정보가 있었다고 말하는 경우 후속 질문에 대한 답변이 곤란해진다는 점에서 정보 실패를 주장했을 것이다.

쏜턴의 주장처럼 미국의 많은 전문가들이 6.25전쟁에서의 정보 실패 운운하고 있다. 이는 패권경쟁 측면에서 오늘날에도 한반도가 대단히 중요한 지역이란 사실과 관련이 있다. 미국이 관련 정보가 충분한 상태에서 북한군 남침과 중공군 참전을 유도했거나 적어도 묵인했다고 말하면 한국인들 반응은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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