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증가 우려도 무시하고 과태료로 바꿔

사업주 처벌강화입법, 고용부 반대로 무산

산업안전보건법은 사업장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사업주에게 부담지우고 있다. 하지만 안전보건조치를 제대로 하지 않아 사망사고가 발생해도 최고경영자인 대표이사가 처벌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현장에서의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관리감독이 대표이사가 아니라 수임자인 안전보건관리책임자에 의해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질적 권한에 관계없이 안전보건관리책임자로 선임된 자만이 안전보건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으로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도 이러한 관행에 한몫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당초의 취지를 살리면 산안법으로도 최고경영자를 처벌할 수 있다. 최고경영자에게 안전보건관리체제를 확립하고 제대로 작동하게 할 책임이 부여돼 있기 때문이다.

이재갑 장관 '공사 전 적정 공사기간 산정해 무리한 단축 시 형사처벌'│이재갑 고용노동부 장관이 6월 18일 오전 세종시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건설현장 화재안전 대책' 관계부처 합동브리핑에서 대책 발표를 하고 있다. 하지만 고용부는 산재예방에서 가장 중요한 대표이사의 안전보건관리체제 위반에 대해서는 과태료 부과를 고집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주형 기자


◆안전보건관리체제 작동이 가장 중요 = 산재예방을 위해 안전보건관리체제의 작동은 매우 중요하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정진우 교수는 "사회가 고도로 복잡해지고 시스템화돼 가고 있는 상황에서 많은 중대사고가 조직의 관리문제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이는 '조직사고' 또는 '시스템사고'인 점을 감안할 때, 안전보건관리체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라며 "기업의 조직사고에 대해 중하위 관리감독자를 문제 삼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날 것이 아니라 기업의 안전보건관리시스템을 문제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기업으로 하여금 예상가능한 사고 메커니즘을 사전에 예측하고 적절한 안전보건관리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안전보건관리체제 구축을 기업의 중요한 책임으로 설정해야 한다"며 "우리나라 산안법과 유사한 안전보건관리체제를 규정하고 있는 영국이나 일본 등은 안전보건관리체제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부실하게 운영할 경우 행정질서벌이 아니라 형사범죄로 취급해 형사처벌로 규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우리나라도 1981년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당시부터 안전보건관리체제 위반을 형사처벌로 규정했다.

하지만 2002년 당시 노동부 주도로 사업주 형사처벌 조항이 행정질서벌인 과태료로 전환돼 해당 조항은 사실상 실효성을 상실했다.

◆'경미한 위반'이라는 노동부 인식 = 김대중정부 말기인 2002년 3월, 당시 노동부(현 고용노동부)는 국회에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제출했다. 노동부는 개정사유에서 '안전보건관리체제 규정이 안전보건과 직접 관련이 없는 사항'이라며, 형벌로 규정하고 있던 안전관리자 선임의무 30건의 의무규정 위반사항을 과태료로 전환했다. 당시 범정부차원으로 형벌의 행정질서벌화 정책에 편승한 것으로 판단된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전문위원은 제동을 걸었다. 당시 박용판 전문위원은 법안 검토보고서에서 "과태료로 전환되는 규정인 '근로자의 안전보건과 직접 관련성이 적은 경미한 규정위반'이란 기준이 모호하고, 재해근로자와 사망근로자가 해마다 증가하는 현실에서 행정형벌을 행정질서벌로 전환하는 것은 사업주에 대한 경각심과 산재사고 및 안전불감증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저하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에서 개별 조항을 검토한 후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노동부는 "현행 산안법은 경미한 법위반 행위도 과다하게 형벌로 규정해 전과자만 양산하는 문제가 있고, 현실적으로 실제 양형이 소액의 벌금형에 그쳐 사업주의 준법의식 고취효과도 미흡하다"며 "형벌의 과태료 전환은 사업주에 대한 경제적 제재강화로 법집행의 실효성을 제고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형벌의 과태료 전환이 제재강화'라는 노동부의 주장은 어불성설임에도 국회는 이를 그대로 통과해 확정했다. 2002년말 산안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산재 사망자는 2002년 2605명에서 2003년 2923명, 2004년 2825명으로 치솟았다.

◆안전책임자 미선임, 1200건 적발 = 해당 조항을 바로잡기 위한 또 한 번의 시도가 있었다.

2016년 12월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이 산안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산재 신고의무의 강화와 함께 사업주가 사업장에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두지 않거나 업무를 총괄관리하도록 하지 않는 경우 과태료에서 벌금으로 강화하는 내용이다.

2017년 2월28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 소위원회 회의록에 따르면, 당시 고용노동부 고영선 차관은 "당초 사업주로 하여금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책임자를 두도록 규정한 취지 자체가 어떤 행정적 시스템을 갖춰놓으라 하는 그런 의미"라며 "현재와 같이 과태료로 남겨두는 것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고 차관은 이어 "안전보건관리책임자 미선임과 관련해 지난 3년간 1200건이 넘는 건, 35억원 정도 과태료를 부과했다"며 "행정실적도 부족하지 않다"고 밝혔다. 그 발언에 의원들이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아 해당 조항은 개정되지 않았다.

고 전 차관 발언은 고용부가 안전보건관리체제를 형식적으로 구축하기만 하면 되는 경미한 사항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사후책임보다 예방책임 더 중요" = 문재인정부 출범 이후 고용노동행정의 적폐청산 일환으로 설립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도 2018년 9월 활동결과보고서에서 이 점을 지적했다. 보고서는 "사고발생 후의 책임을 묻는 것보다 예방에 대한 책임을 묻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예방법학적 관점을 살리기 위해서도 안전보건관리체제는 매우 중요한 조항"이라며 "안전보건관리체제 규정 위반에 대한 제재를 현행 과태료 부과에서 형사처벌로 전환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고용부 산재예방정책과 한 관계자는 10일 "산재예방을 위한 안전조치 및 보건조치 위반이 아닌 사업장의 자율적 재해예방을 위한 체제구축 미흡에 대한 제재는 징역형 등 형사처벌을 부과할 정도의 위반행위에 해당하지 않는다"며 "제재의 실효성에 대한 고려 없이 사업주에 대한 처벌만 강화하는 경우, 기업은 대표이사 등 경영책임자가 책임을 회피할 수 있도록 안전관리 업무에서 배제하는 등 구조적 회피로 대응해 결과적으로 산재예방에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에 정진우 교수는 "안전보건관리제체 규정은 산안법의 다른 조항에 규정돼 있는 구체적·특정적인 안전보건조치 규정만으로는 산재예방에 많은 한계가 있어 이를 메우거나 보완하기 위한 것이고, 또 구체적인 조치는 현장 차원에서 중하위 관리감독자를 통해 이루어질 수 있지만, 물적 설비, 인적 체제 등 안전보건관리를 확립하는 것은 경영진만이 할 수 있는 점을 고려한 것"이라며 "법 자체에도 문제가 있지만 법집행기관인 고용부의 무지와 몰이해가 산안법을 형해화시키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답변"이라고 지적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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