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조정위, 최근 5년간 94건 조정 결정 … 금융사 2018년 첫 거부 이후 반발 커져

"그동안 금융감독원 분쟁조정위원회에서 조정안을 권고하면 금융회사들이 대부분 수용했지만 즉시연금 조정안 거부 이후 금융회사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부실사모펀드 사태로 금감원에 접수된 분쟁조정 사건이 급증하고 있는 가운데 하나은행이 라임 무역금융펀드 '계약 취소' 조정안 수용 결정을 연기하면서 빨간불이 켜졌다.

22일 금융당국에 따르면 금감원 출범 이후 진행된 분쟁조정 사건 중 즉시연금과 키코사건 관련 배상 권고에 금융회사들이 거부 의사를 밝혔다.

금감원에 접수되는 분쟁민원은 매년 2만건이 넘는다. 2015년 2만2974건이던 분쟁민원은 2016년 2만5214건, 2017년 2만5205건, 2018년 2만8118건, 2019년 2만9622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건은 분쟁조정위원회(분조위)에 회부되지 않고 금감원의 합의권고 등으로 끝난다. 분조위에 회부된 사건은 기존의 조정례 또는 판례가 없거나 약관이 불분명해 다의적 해석 또는 법률적 판단이 필요한 경우 등 새로운 결정이 요구되는 사안들이다.


분조위 상정 안건수를 보면 2015년 26건, 2016년 14건, 2017년 19건, 2018년 17건, 2019년 18건 등 매년 20건 안팎이다. 전한덕 전주대 금융보험학과 교수는 "금융민원이 법원에 소송으로 비화되는 건수 대비 (분조위) 조정신청 건수가 매우 적다"며 "금융소비자가 분조위 조정결정을 통해 권리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와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즉시연금·키코 사건 = 즉시연금 사건은 금융회사가 금감원 분조위 결정을 거부하고 소송을 제기한 첫 사례다. 즉시연금은 가입자가 보험을 가입할 때 보험료 전액을 한번에 내고 그 다음 달부터 매월 연금을 지급받는 상품이다.

분쟁은 가입자들이 보험사가 상품 판매 당시 제시한 최저금액보다 적은 금액의 연금을 지급했다며 부족분을 돌려달라며 금감원에 민원을 신청하면서 촉발됐다. 하지만 보험사들은 지급 연금액에서 만기보험금 지급재원을 제외했기 때문이라며 맞섰다. 만기 때 보험료 원금을 돌려받는 만기지급형이라서 그렇다는 주장이다.

하지만 2017년 11월 금감원 분조위는 약관이 불명확해 즉시연금 가입자가 피해를 봤다며 미지급분을 일괄 지급하라고 보험사에 권고했다. 금감원은 분조위에서 판단한 신청인 1명 이외에 다른 가입자에 대해서도 일괄구제를 권고했다. 하지만 삼성생명은 분조위 결정을 받은 1명에 대해서만 보험금을 지급하고 일괄구제는 거부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채무부존재 확인 소송을 법원에 냈다.

키코 사건도 은행들이 배상을 거부한 대표적 사례다. 키코는 2007~2008년 환헤지 목적의 금융상품으로 수출 중소기업들이 가입했다가 막대한 손실을 입은 사건이다. 환율이 일정 범위를 벗어나면 중소기업들이 큰 손실을 보는 구조인데 2008년 금융위기로 예상치 못한 환율 급등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2013년 대법원은 은행들이 상품의 위험성을 제대로 고지하지 않았다면 불완전판매에 해당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다만 키코상품의 사기성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금감원 분조위는 대법원 판결을 근거로 은행이 피해기업들에게 손실액의 15∼41%를 배상하라고 권고했다. 하지만 은행들은 배임에 해당될 수 있다며 배상을 거부했다.

금감원은 "은행이 배상금 지급 여부에 따른 이해득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종국적으로 은행에 이익이 된다는 경영진의 신중한 판단 하에 지급을 결정하면 배임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지만 은행들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적 근거와 한계 = 분조위 조정은 금융위원회 설치법에 근거를 두고 있다. 분조위가 제시한 조정안을 신청인과 금융회사 모두 수용하면 조정안은 재판상 화해와 동일한 효력을 갖게 된다. 민사소송법상 재판상 화해는 확정판결과 동일한 효력이 있다. 금융회사가 조정안을 수락하고도 배상을 하지 않으면 피해 당사자는 법원에서 집행문을 받아 강제집행을 할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느 한쪽이라도 조정안에 불복하면 조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금융회사가 배상을 거부하면 금융소비자들은 소송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보험사는 즉시연금 가입자를 상대로, 가입자는 보험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2018년 제기된 소송은 아직 1심이 진행 중이다.

전 교수는 "정보력과 경제력이 막강한 금융회사는 언제든지 조정안을 거부하고 소송을 제기할 수 있기 때문에 금융회사의 부당한 횡포로부터 금융소비자가 피해를 볼 가능성이 매우 크다"고 말했다. 그는 "금융회사가 조정안 수락을 거부하면 오랜 기간 동안 조정절차를 진행한 것이 아무 의미가 없게 된다"며 "금융소비자로서는 소송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심각한 시간적·경제적·정신적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동원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분조위 조정안에 대해 금융소비자가 수락하면 금융기관은 반드시 조정안을 수락하도록 하는 일방적(편면적) 구속력을 부여해 조정 제도의 실효성 제고할 필요가 있다"며 "다만 헌법상 재판청구권 침해 논란이 있을 수 있어서 소액 분쟁(2000만원 이하)에만 적용하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 교수는 "금융분쟁과 같은 소액 및 다수의 사건의 경우, 일괄적으로 조정할 수 있는 제도의 도입이 필요하다"며 "조정이 성립한 경우 조정 당사자가 아니지만 피해를 입은 금융소비자에게 보상하도록 하는 집단 분쟁 조정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금감원 분쟁조정 '사모펀드 피해구제' 해법될까" 연재기사]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이경기 기자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