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성평가 무지 … 도입 7년인데 여전히 표류

"하라니까 마지못해 시늉하는 곳이 대부분일 것"

전문가들은 산업안전의 양대 축으로 법적기준 준수와 자율안전관리를 꼽는다. 그중 자율안전관리의 핵심은 '위험성평가'다. 사업주가 스스로 사업장 위험요인을 찾아내고 위험성의 크기를 판단해 이에 대한 감소대책을 마련하는 위험성평가는 안전분야의 국제기준이다. 위험성평가를 내실 있게 한다면 산업재해를 상당부분 예방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제도를 앞서 도입한 재해예방선진국은 위험성평가의 중요성을 높이 평가하고 이를 법적 의무사항으로 강제하고 있다.

고용부가 탄핵정국의 혼란을 틈타 2017년 1월 지방관서에 슬그머니 보낸 '안전보건관계자 업무 미수행에 따른 과태료 부과시 유의사항 알림'이란 제목의 비공개 지침 사본. 고용부는 이 지침에서 '위험성평가 미수행을 이유로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도록 유의하라'는 황당한 지시를 했다.

◆선진국은 산업안전관리 초석으로 간주 = 위험성평가제도는 1990년대 초반 유럽연합에서 시작됐다. 유럽연합은 이 제도를 산재예방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 수단으로 여겨 회원국에게 의무도입을 추진했다. 각 회원국은 자국 법에 제도 도입을 명시해야만 했고, 1996년까지 모든 회원국이 도입했다. 제도 도입으로 산재예방 효과가 나타나자 다른 나라로 확산됐다. 일본은 2005년에, 우리나라는 그보다 늦은 2013년 도입했다. 정부 입법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을 개정해 사업주에게 위험성평가 의무를 부과했다.

구체적으로 사업주는 안전보건관계자(안전보건관리책임자, 관리감독자,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 안전보건총괄책임자)로 하여금 업무에 기인하는 유해·위험요인을 찾아내 위험성을 평가하고 노동자를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했다.

고용노동부에 따르면 위험성평가제도 도입 이후, 도입사업장 재해율은 2013년부터 2015년까지 평균 28%로 크게 감소했다. 큰 성과를 냈지만 여전히 산업현장에서 위험성평가는 형식적으로 수행되는 등 정착되지 않고 있었다. 제도를 활성화하고 실질화해야 할 시점에서 고용부는 지방관서에 이해할 수 없는 지침을 내렸다.


◆법이 부과한 의무, 지침으로 무장해제 = 2017년 1월 4일 고용부(장관 이기권)는 산재예방정책과장 전결로 '안전보건관리체제 위반과 관련해 처벌을 삼가라'는 내용의 비공개 지침을 지방관서에 시달했다. 지침은 '특히, 처벌규정이 없는 사항의 미수행만을 이유로 안전보건관계자 업무 소홀로 사업주에게 과태료를 부과하지 않도록 유의하라'고 지시했다.

지침의 가장 큰 문제는 내용이 위법적이라는 점이다. 산안법상 위험성평가 조항 자체는 처벌조항이 없지만, 모든 안전관계자의 직무에 명시적으로 포함돼 있다.(표 참조) 사업주는 물론 안전보건관리책임자, 관리감독자, 안전관리자, 보건관리자뿐만 아니라 안전보건총괄책임자(하청을 주는 경우)에게 위험성평가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데도 처벌규정이 없다고 보는 것 자체가 잘못된 법해석이다. 안전관계자의 직무 중 1개 위반은 괜찮고 2개 이상 위반은 처벌대상이라는 것도 근거가 없는 자의적 해석이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사업주가 안전보건관계자의 명시적이고 핵심적인 직무인 위험성평가를 실시하도록 직무수행여건을 조성하지 않았거나 지도감독 등을 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과태료 부과대상"이라며 "위험성평가 미수행만을 이유로 과태료를 부과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전혀 법리에 맞지 않는 초법적인 해석"이라고 지적했다.

◆위험성평가 강제화 아직 '감감' = 고용부의 지침 시행 배경도 의문이다. 통상 규제완화를 추진하면 사업자측의 요청에 따른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2018년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 조사결과, 경총은 해당 내용을 요청한 사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경총 등 사업주 측의 요청도 없는데 고용부가 왜 해당 지침을 시행했는지 의문이다.

시행시점도 탄핵안 국회통과로 박근혜 전 대통령의 직무가 정지돼 황교안 국무총리의 권한대행시절이다. 정책의 변화보다는 유지관리를 하던 때에, 주요 정책을 아무런 대책 없이 무력화시키는 지침을 시달한 점은 많은 의문을 낳는다.

또한 고용부 훈령인 '고용노동부와 그 소속기관 위임전결규정'에 따르면 파급효과가 큰 중요사항 및 신규사항은 '실장' 전결사항으로 돼 있다. '과장' 전결로 파급효과가 큰 위험성평가 미실시에 대한 처벌불가 방침을 내린 조치는 훈령위반인 셈이다. 만약 이를 파급효과가 크지 않은 사항으로 보았다면 위험성평가에 대한 무지의 소치라고 볼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고용부가 학자나 노사단체는 빼고 법률사무소에만 '위험성평가 미실시에 대한 과태료 부과 여부'에 대한 법률자문을 받은 것으로 확인돼 그 배경도 석연치 않다.

고용부 한 관계자는 "위험성평가 안한 것만 가지고 과태료를 부과해, 다른 것도 종합적으로 판단해서 하라는 의미였다"며 "위험성평가를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라고 해명했다. 그는 또 "위험성평가를 강제할 수 있는 방안을 아직 마련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연구용역을 진행 중이다"고 밝혔다. 강제화 방안에 대해 행정개혁위에서 권고한 지 2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연구용역 중이라는 것이다.

◆고용부 무관심, 활성화 걸림돌 = 고용부 지침이 시행된 후 위험성평가가 사실상 요식행위로 전락했다는 게 현장 관계자들의 증언이다. 모 대기업 본사 안전환경팀장 ㄱ씨는 "우리나라에서 위험성평가를 제대로 수행하는 기업은 거의 없을 것"이라며 "지도기관인 고용부와 안전보건공단부터 위험성평가를 잘 모르고, 정부의 위험성평가 지침도 디테일과 다양성에 있어 많이 빈약하고 부실하다"고 말했다.

한 대형조선소에 근무하는 안전관리자 ㄴ씨는 "고용부 감독관부터 위험성평가에 관심에 없고 잘 모르는 상황에서 이 분들이 사업장을 지도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고용부 직원부터 위험성평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모 공기업 안전팀장 ㄷ씨는 "김용균씨 사망사고 이후 공공기관 경영평가항목에 위험성평가가 포함된 것은 바람직하다"면서도 "문제는 고용부가 2019년 9월에 시달한 공공기관 위험성평가 이행·점검 매뉴얼이 이론과 현실 양 측면에서 문제투성이고, 지침 자체가 잘못돼 있다 보니 기업에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매우 혼란스러운 상태이다. 장담하건대, 하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시늉만 하는 곳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진우 교수는 "위험성평가 제도를 산안법에 도입한 지 7년이나 지났고, 제도 도입 당시 이를 실시하면 산재보험료를 20% 깎아주는 조치도 하였는데, 위험성평가 실시를 여태껏 강제하지 않고 있는 것은 고용부가 위험성평가에 대한 전략과 의지가 없는 증거이기도 하고 그간 위험성평가 활성화 노력을 게을리 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라고 비판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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