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적용 가교업무 손놓은 고용부 … "정부 존재이유에 의문"

대기업 안전관리자 "적발위주 고용부 법집행에 불만 폭발직전"

"(고용노동부는) 산업안전보건법 위반 사업주를 제재하는 것만이 감독기관의 주된 역할인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지배적이고, 산업안전보건 행정인프라 구축업무에는 매우 소홀하다." 고용부 적폐청산을 위한 2018년 구성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이병훈 중앙대 교수) 보고서의 지적이다.

고용부가 산안법 적용을 도와주기보다 무분별하게 적발하는 데만 급급하다보니 일선 사업장은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최근까지 한 대기업 철강업체에 근무했던 안전임원 ㄱ씨는 "감독 나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해 법위반으로 적발해 가는 식"이라며 "말을 못해서 그렇지 현장에서 고용부 법집행에 대한 불만은 폭발 직전"이라고 말했다.

이재갑 고용노동부장관(사진 오른쪽에서 4번째)은 지난 1월 3일, 개정 산업안전보건법의 '도급인 책임 강화'와 관련해 현대제철, 삼성전자 등 제조업 7개 기업의 대표 및 임원들과 간담회를 가졌다. 고용부는 도급인 책임을 강화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도급인 안전조치 의무와 하청노동자 보호조항이 후퇴하는 등 크게 약화됐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사진 고용노동부 제공


◆14년째 변함없는 구닥다리 지침, 적용 못해 = 고용부가 산업안전 인프라 구축에 소홀한 증거 중 하나는 '표준'(종전의 기술상 지침)의 제·개정 업무를 하지 않고 있는 점이다. 기술상 지침이란 산안법과 사업장을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하는 일종의 가이드라인이다.

산업안전보건법 제13조는 고용노동부장관은 산재예방을 위해 표준을 정해 사업주에게 권고할 수 있도록 했다. 이 조항은 산안법 적용대상이 되는 사업장은 업종, 규모, 작업양태 등이 천차만별임에도 불구하고, 법령은 그 특성상 일정 정도 획일적·일반적인 경우가 많아 개별 사업장에서 이것만으로는 적용하기 쉽지 않기 때문에, 법과 사업장을 연결하는 중간 가교로서 '기술상 지침'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1981년 산안법 제정 시 포함됐다.

이후 고용부가 제정한 기술상 지침은 △가설공사 표준안전 작업지침 △가스누출감지경보기 설치에 관한 기술상의 지침 △감전재해 예방을 위한 기술상 지침 등 총 19개다. 이중 '가설공사 표준안전 작업지침'을 법제처에서 검색해보면, 2006년 개정 이후 현재까지 내용에 아무런 변경이 없었다. 2006년 이전에도 내용 변경이 있었는지 자료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 최소한 14년째 아무런 개정작업을 하지 않은 셈이다. '가설공사...' 지침뿐 아니라 19개 지침이 대부분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많은 위험요인이 새롭게 대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규로 제정된 기술상 지침은 단 하나도 없었다. 고용노동부 한 관계자는 28일 "기술상 지침을 관리하지 안 해 온 것은 사실"이라고 밝혔다.

산업안전보건을 둘러싼 내·외부 환경이 바뀌고 위험요인이 새롭게 발생하거나 변화하는 상황에 놓여 있는 기업은 십수년 전의 상황을 바탕으로 제정된 '기술적 내용'을 현장에 적용할 수 없었다. 고용부도 기업을 대상으로 기술상의 지침을 적용하도록 지도·권고하고 있지 않다. 국회에서 제정한 규정을 행정부가 별다른 이유 없이 사문화시켜 버린 것이다.


◆고용부, 문제 지적해도 개선의지 없어 = 고용부의 더 큰 문제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고치려고도 하지 않는 점이다. 2018년 9월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는 기술상 지침 문제를 지적했다. 행정개혁위원회 보고서는 "고용부 차원의 지침, 가이드 등의 개발·보급활동이 산업안전보건영역 전반에 걸쳐 취약하고 그 내용 또한 법령과 부합하지 않는 등 충실하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산안법 제27조(현 제13조) 기술상의 지침 및 작업환경 표준의 취지에 따른 기준제정위원회 운영을 통한 고용부 고시의 제·개정 작업이 정상화 및 활성화 되도록 조속한 조치를 취하라"라고 권고했다.

고용부 한 관계자는 28일 "행정개혁위의 기술상 지침 정상화에 대한 권고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라며 "미이행에 대한 특별한 이유는 없다"라고 말했다. 장관이 바뀌자 뚜렷한 이유 없이 행정개혁위의 권고를 검토조차 하지 않은 것이다.

문재인정부는 산재 사망자를 절반으로 줄이겠다며 예산과 인력을 집중 투입하고 있는 중이다. 실제 산재예방 의지가 있다면 행정개혁위원회 권고가 없더라도 산안법이 현장에서 작동하도록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하지만, 행정개혁위원회와 연구자가 문제점을 알려줘도 고용부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초법적인 고용부 예규 = 고용부는 기술상 지침을 제정하는 업무는 내팽개친 채, 산업안전보건공단이 기술상 지침을 만들기 위해 구성된 표준제정위원회를 통해 자체 가이드(코샤 가이드)만을 만드는 주객전도 현상을 수수방관하고 있다. 공단 역시 그동안 이 문제를 개선하려는 움직임이 한 번도 없다는 점에서 책임으로부터 비켜갈 수 없다.

정 교수는 "산안법에 코샤 가이드 제정에 대한 근거를 두고 있지 않음에도 고용부가 예규(표준제정위원회 규정)에서 코샤 가이드 제정 근거를 두는 것은 위임입법의 한계를 벗어난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기술상 지침은 산안법에 따라 고용노동부장관이 제정하는 반면, 코샤 가이드는 법적 근거가 없어 대외적 효력도 없고 공단 이사장도 아닌 기술이사가 결재권자라는 점에서 질적으로 확연히 다르다"며 "코샤 가이드는 내용의 충실성과 절차적 정당성 측면에서도 기술상의 지침에 비해 많이 약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부실한 내용 많은데 사업장에 강요" = 현장에서는 고용부의 직무유기와 코샤 가이드에 대한 불만이 동시에 나오고 있다.

모 외국계 대기업 부장 ㄴ씨는 "고용부가 기술상의 지침 제·개정을 방치하는 것은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의 현주소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며 "아마 고용부는 자신들이 무엇을 게을리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 전자업계 대기업 안전부서장 ㄷ씨는 "정부는 현실성도 없는 새로운 것 자꾸 만들려고만 하지 말고 기술상의 지침 제·개정과 같은 기본적인 사항만이라도 충실해 주었으면 좋겠다"며 "이런 것을 보면 정부의 존재이유에 근본적인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경기도 소재 안전컨설팅사 부장 ㄹ씨는 "안전보건공단 직원 상당수가 아마도 코샤 가이드가 기술상의 지침에 해당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을 것"이라며 "날림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부실한 내용도 많은 데 사업장에 강요하다시피 한다"고 말했다.

산업안전감독관이나 공단 직원들도 문제를 지적했다. 서울지역 산업안전감독관 ㅁ씨는 "본부부터가 기술상의 지침에 관심이 없다. 아니 잘 모른다"며 "적발 잘 하는 직원을 유능하다고 보는 시그널이 있는 상태에서는 기술상의 지침을 가지고 지도·권고할 근로감독관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 안전보건공단 지역본부장 ㅂ씨는 "안전보건공단 직원들은 코샤 가이드가 강제기준이라도 되는 것처럼 작업장 현실은 알려고도 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적용하여 무조건 지키라는 식"이라며 "공단은 코샤 가이드를 무분별하게 만들기보다 기술상의 지침 초안을 충실하게 만드는 본연의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안전보건공단 한 관계자는 "기술상의 지침에 대한 제·개정은 위원회에서 심의할 필요가 있지만 이것은 고용부에서 결정할 사항이고, 공단은 위원회를 구성·운영하는 행정상의 절차만을 수행하고 있다"고 해명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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