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율안전관리 핵심은 '안전보건경영체제' 구축

선진국은 정부가 확산 총력, 한국은 기본인식도 없어

"위험요인으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고 업무 관련 사망, 부상 및 건강장해 근절을 목적으로 사업장의 안전보건수준을 지속적으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조치인 법적기준의 준수와 더불어 사업장의 자율적인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세계노동기구(ILO)가 2001년 산업재해로부터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안전보건경영체제(OSHMS, Occupational Safety & Health Management System) 구축을 위한 가이드라인'에서 지적한 말이다.

안전보건경영체제는 사업장의 안전보건관리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으로 평가받는다. 안전보건경영시스템을 확산시키는 것은 시대적 과제로 국제기구와 대부분의 선진국은 정부와 전문기관이 합심해 오래 전부터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주무부서인 고용부가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기본인식조차 없고, 산하기관인 산업안전보건공단에 모든 것을 맡기고 있다. 공단에서 하는 것은 인증업무뿐이고, 안전보건경영체제를 보급하고 실질적으로 적용되도록 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안전을 경영의 중요 요소로 판단 = 안전보건경영체제는 자율안전관리의 핵심수단으로 꼽힌다. 사업장 안전 확보를 안전담당자나 안전부서만의 일이 아니라, 모든 구성원과 부서에서 관여하고 참여해야 하는 일로 보고 경영의 중요한 구성요소로 파악해 시스템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안전보건경영체제다. 안전보건경영체제는 1990년 중반에 국제표준화기구(ISO)가 규격화하며 논의가 시작됐다. ISO 9000(품질)과 ISO 14000시리즈(환경)에 이어, ISO 18000시리즈로 산업안전보건분야를 규격화했다. 그러나 ISO규격화 시도는 회원국들의 의견차이로 3차례 보류됐다. 그 사이 2001년 세계노동기구가 안전보건경영체제 가이드라인(ILO-OSH 2001)을 공표했다. 우여곡절 끝에 국제표준화기구는 2018년 3월 안전보건경영체제 규격(ISO 45001)을 제정해 공표했고, 그것이 국제표준이 됐다. 선진국 정부는 민간에만 맡기지 않고 'ISO 45001' 등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정부지침을 제정하는 등 이것의 활성화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안전보건경영체제 확립 지원은 정부책무 = 우리나라 산업안전보건법에 안전보건경영체제가 도입된 것은 1999년 법 개정 때였다. 산안법 제4조 '정부의 책무' 조항에 '사업의 자율적인 안전보건경영체제 확립을 위한 지원에 관한 사항'을 포함시켰다. 이어 시행령을 개정해 고용노동부장관에게 안전보건경영체제 확립을 위한 운영기법 등을 연구·보급할 의무를 부과했고, 평가제도를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정부는 사업장에 안전보건경영체제를 보급하고 실행하도록 하는 데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형식적인 평가제도만을 운영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 2013년 시행령 개정(구 시행령 제3조의2 제3항)으로 고용부장관에게 안전보건경영체제 확립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 고시하도록 의무가 부여됐다.

그러나 시행령 개정에도 불구하고 고용부장관은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았다. 문재인정부 출범후 적폐청산을 위해 신설된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이병훈 중앙대 교수)는 이 점을 지적했다.

◆'자율안전관리' 정부 역할 없어 = 2018년 9월 행정개혁위원회는 "2013년 8월 6일 산업안전보건법령에 사업장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지침의 제정근거가 명시적으로 마련됐음에도 불구하고, 현재까지 제정이 안되고 방치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위원회는 "정부차원에서 안전보건경영체제에 관해 아무런 지도홍보를 하지 않고 산하기관인 안전보건공단에서 안전보건경영체제 인증업무만을 수행하고 있다"며 "우리나라에서 안전보건경영체제가 형식적 운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유 중 하나가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정부의 역할 부존재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위원회는 "산안법령의 취지에 따라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고용부의 역할을 중심적 내용으로 하는 안전보건경영체제 지침(고시)을 조속히 제정하고, 고용부에서 안전보건경영체제 활성화와 내실화를 위해 적극적인 지도와 홍보를 실시할 것"을 권고했다. 어이없게도 고용부의 대응은 장관의 지침제정 의무조항을 삭제하는 것이었다.

◆행개위 권고 이해 못하는 고용부 = 고용부는 2018년말 '김용균법'이라고 칭한 산안법 전부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2019년말 산안법 시행령을 개정해 해당 조항을 삭제했다. 그 결과 해당조항은 장관의 지침제정 의무가 규정된 2013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고용부 한 관계자는 "(장관의) 지침제정 의무를 삭제한 게 아니라 산안법 전부개정에 맞춰 좀 더 명확하게 한 것"이라며 "안전보건경영체제에 대한 정부의지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행정개혁위원회 권고도 조정수용을 했다"며 "안전보건경영체제를 고시로 한다는 것은 정부가 정하는 것인데, 사업주가 자율적으로 해야 하는 것을 정부가 고시로 하면 기업의 자율성이 줄어들게 된다"고 말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정부는 안전보건경영체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이것의 구축·운영방향을 제시하는 등 정부 차원에서의 안전보건경영체제 기준을 설정·공표함으로써 이것이 사업장에 널리 활성화되고 내실화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이러한 역할의 필요성 자체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며 "정부가 해야 할 산재예방인프라 조성을 등한시하고 있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말했다.

◆알맹이는 없고, 형식적 인증만 남아 = 고용부가 확산과 내실화에 손놓고 있는 사이, 안전보건경영체제는 형식적 인증업무만 남았다. 안전보건경영체제 인증은 산업안전보건공단과 민간기관에서 이뤄지고 있다. 공단은 국제규격인 'ISO 45001'을 참고해 자체적으로 만든 'KOSHA-MS' 인증업무를 하고 있다.

KOSHA-MS는 ISO 45001을 본 따고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형태와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다(표 참조). 따라서 KOSHA-MS는 국제적으로 통용되지 않기 때문에 기업들이 KOSHA-MS를 인증 받았다고 하더라도 ISO 45001을 추가로 인증 받아야 한다. 정진우 교수는 "KOSHA-MS와 ISO 45001 규격의 인증을 모두 받은 경우 이 두 개 규격의 요구사항에 적지 않은 차이점이 있어 어느 기준에 맞추어야 하는지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며 "그러다 보니 기업들은 인증을 받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실제 적용과 운영에는 관심이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지적했다. 민간인증기관에서도 ISO 45001 인증을 하고 있으나, 신청을 한 곳은 안전보건수준 여하에 관계없이 사실상 대부분 인증을 받고 있어 '인증을 위한 인증'이란 지적을 받고 있다.

◆"돈 주는데 인증거부 어려울 것" = 현장 산업안전보건 담당자들은 한 목소리로 안전보건경영체제가 내실화가 아닌 보여주기용의 인증업무로 전락한 현실을 지적했다.

타이어제조업체 본사 안전부서장 ㄱ씨는 "인증을 위한 인증이 대부분일 것"이라며 "인증을 받아 놓는 게 기업이미지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유리하니까 받긴 한데, 사실 서류로만 받는 것이지 안전보건수준이 실제로 올라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고 고백했다. 서울 소재 화학회사 안전팀장 ㄴ씨는 "기업에서 요구하면 인증기관에서 대개 인증을 내준다. 기업이 돈을 주는데 인증기관이 인증을 거부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강원도 원주 소재 공단 본사 안전팀장 ㅁ씨는 "안전보건공단에서 자꾸 인증 받으라고 해서 받긴 하였지만 안전보건에 실제로 도움되는 것은 없는 것 같고 서류만 잔뜩 많아졌다"고 말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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