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관도 모르는 도급인의 의무, 현장에선 불만 극심

현장선 "필요한 안전보건조치 무엇인지 알 수 없어"

'건전한 국민감정에 비추어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되는 행위는 처벌한다.' 1935년 나치시대 독일 형법 제2조 중 일부다. '건전한 국민감정'이라는 불명확한 개념을 사용해 죄형법정주의의 핵심 원칙인 명확성의 원칙에 위배되는 대표사례로 꼽힌다.

산안법 제63조도 명확성의 원칙 위반사례로 지적받고 있다. '도급인(원청)이 하청 노동자의 산재예방을 위해 필요한 안전보건조치를 해야 한다'고 규정했지만, 정작 '필요한 안전보건조치'가 무엇인지 불명확하고 모호하기 때문이다.

고용노동부(장관 김영주)는 2017년 11월 배규식 노동연구원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조사위원회에는 조선업 종사경력자, 노사단체 추천전문가 등이 참여하고 민간전문가 중에는 산업안전 전문가 외에도 산업 및 고용구조를 분석할 수 있는 사회학, 경영학, 법학 전문가가 참여했다. 위원회는 6개월간 활동 끝에 보고서를 발표했다. 보고서는 산업안전보건법상의 도급작업에 대한 불명확한 규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이를 개선할 것을 권고했다. 하지만 고용부는 현재까지 이 지적과 권고를 수용하지 않고 있다. 사진 고용노동부 제공


◆원청의 의무, 명확성과 실효성 결여 = 산안법 제63조에서 규정한 '필요한 안전조치와 보건조치'는 제38조(안전조치)와 제39조(보건조치)를 준용한다. 또 제38조와 제39조는 '구체적 사항은 고용부령으로 정한다'고 위임했다. 그런데 관련 고용부령이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만을 가리키는지, '시행규칙'까지를 포함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이들 규칙에서 원청이 취해야 할 '필요한 안전조치와 보건조치'의 구체적인 범위에 대해 수급인과 구분해 규정하고 있지 않다. 원래 이들 규칙은 모두 노동자를 직접 고용한 사업주에 부과되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청이 자기 노동자 안전을 위해 취해야 할 조치를 원청에게 똑같이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겉으로는 원청의 책임을 강화한 것 같지만, 실제로는 원청이 할 수 없는 것까지 하라는 것이어서 현실성과 이행가능성이 없다는 게 전문가 의견이다.

제63조에 '보호구 착용 지시 등 관계수급인(하청) 근로자의 작업행동에 관한 직접적인 조치는 제외한다'는 단서조항이 있다. 하지만 이 규정만으로는 원청이 단독으로 조치해야 하는지, 하청과 동일한 조치를 해야 하는지, 하청과 공동으로 조치를 해야 하는지, 하청에게 지도관리 조치를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렵다.

◆하청노동자 보호 큰 공백 초래 = 또한 도급이 여러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경우, 첫단계 도급인에게만 의무를 부과하고, 중간단계 도급인에게는 통제력 행사 정도와 관계없이 아무런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있다. 그러다 보니, 중간 단계 도급인이 재하청 노동자 보호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고 실제 행사하고 있는데도 재하청 노동자에 아무런 안전보건조치 의무가 부과되어 있지 않아 하청 노동자 보호에 큰 공백이 생기고 있다.

예를 들면, 물류창고 소유자가 A업체에 창고 운영관리를 맡기고 A업체는 B업체에 제품의 출하업무를 도급 주었을 때, B업체 노동자에 대해 가장 많은 통제력을 가지고 있는 A업체는 B업체 노동자에 대해 아무런 안전보건조치 의무가 없게 된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도급인에 대한 안전보건조치의무를 작업의 실태와 실효성을 생각하지 않고 내지르는 식으로 거칠게 규정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하청노동자 보호에 역행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안전은 원청이 해주는 것으로 생각" = 현장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게 법을 만들어 놓고 지키지 않으면 큰 처벌을 받게 되니 불만이 팽배하다.

모 대기업 철강업체 근무 안전관리자 ㄱ씨는 "고용부에 질의를 하면 애매한 답변만 돌아오고, 서면으로 질의하면 철회하라는 말도 한다"며 "그리고는 감독 나와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여 법위반으로 적발해 가는 식이다. 말을 못해서 그렇지 현장에서 고용부의 법집행에 대한 불만은 폭발 직전"이라고 말했다.

10년 경력의 경기도 평택 소재 건설현장 안전관리자 ㄴ씨는 "원청이 할 일과 하청이 할 일은 다른데도 고용부는 원청한테 다 하라는 식"이라며 "아주 큰 대기업 원청은 하라는 시늉이라도 하지만 대부분의 원청은 어디에서부터 어디까지를 해야 하는지 모르다 보니까 사실상 손 놓고 있다"고 말했다.

강원도 소재 토목현장 안전팀장 ㄷ씨는 "고용부에서 원청에 감독의 초점을 맞추다 보니, 하청은 '안전은 원청이 해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원청에 의존하려고만 한다"며 "고용부가 하청의 안전 무관심을 조장하는 측면이 크다"고 말했다.

감독자들도 헷갈리기는 마찬가지다. 경기도 소재 지방노동청 현직 산업안전감독관 ㄹ씨는 "도급작업에서 원청 의무와 하청 의무 간의 관계에 대해 고용부 본부에 물어보면 명확하게 답변해 주질 않는다. 서면으로 질의하려고 하면 난처하다면서 하지 말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지방에서 사업장을 대상으로 어떻게 지도할지 막막하고, 감독관 개인들마다 해석이 다 다르다"고 고백했다.

산업안전보건공단 전 지역본부장 ㅁ씨는 "도급작업의 현실은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데 고용부는 깊이 고민하지 않고 '원청이 크니까 다 책임지라'는 식으로 쉽게만 접근하려고 한다"며 "그러다 보니 도급 안전문제가 난마처럼 얽혀 현장에서는 이를 둘러싸고 큰 혼란이 발생하고 있다"고 말했다.

◆고용부, 두차례 지적에도 모르쇠 = 원청과 하청의 의무사항을 명확히 하라는 주문은 2018년말 법개정 이전부터 있었다.

2018년 8월 한국노동연구원 배규식 원장이 위원장을 맡은 '조선업 중대산업재해 국민참여 사고조사보고서'는 조선업 재해예방을 위한 안전보건제도 개선방안으로 '원·하청간 안전관리 책임과 역할 명확화'를 제시했다. 보고서는 "현행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는 현장에서 적용하기 어려움이 있으므로 (중략) 도급인이 해야 할 의무를 구체화해야 한다"며 "원청에게는 일차적으로 하청업체가 취해야 할 유해·위험방지조치가 적정하게 이뤄졌는지 확인하고 지원하는 의무를 부여해야 한다"고 밝혔다.

2018년 9월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위원장 이병훈 중앙대 교수)도 "산업안전보건관리에서 각 주체의 역할과 책임을 명확히 설정하는 것은 안전보건관리의 실효성을 확보하기 위해 준수돼야 할 기본적인 원칙에 해당한다"며 "도급인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추가적으로 명확하고 실효성 있게 부과하는 방향으로 산업안전보건법령상의 도급관련 규정을 개정할 것"을 권고했다.

◆고용부 "도급인과 수급인에 동일의무 부과" = 고용부는 여러 권고에도 불구하고, 하청의 안전보건조치 의무를 모든 장소에 대해 원청에게 동일하게 부과하는 내용으로 산안법 개정을 강행해 산업현장에 큰 혼란과 공백을 낳고 있다.

고용부 한 관계자는 "원청에게 하청과 동일한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것이 전부개정 산안법의 특징이고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해명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선진국 법과 비교하여 우리나라 산안법상 도급인의 의무는 도급인에게 어떤 조치를 해야 할지에 대한 행동기준을 전혀 제시해 주고 있지 못하여 실효성과 규범성이 크게 떨어진다"며 "그런데도 고용부는 어떤 문제가 있는지에 대한 인식조차 없다. 이것이 하청노동자의 산업재해가 반복되고 줄어들지 않는 큰 이유"라고 지적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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