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위험방지계획서, '면피용'으로 제출서류만 늘어

법과 배치되는 하위규정 … 법 자의적으로 축소·왜곡

5월 1일 고용노동부 이재갑 장관은 이천 화재 중앙사고수습본부 회의를 열고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제도 전면개편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이천 물류창고 화재참사 당시,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제도가 사고예방 역할을 하지 못했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그로부터 6개월이 다 돼가는 10월 19일까지 고용부는 "용역중"이라며 아무런 대책을 내놓지 않고 있다. 현장에서는 여전히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제도가 재해예방 기능을 하지 못하고, '서류상 제도'로 방치되고 있다.

고용부와 안전보건공단의 유해위험방지계획서 홍보용 포스터. '사전 안전성 확보를 통해 노동자의 생명과 건강을 지킨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제출용이지 이행용이 아니라는 반응이다. 사진 안전보건공단 홈페이지

◆일본제도 모델로 1982년 도입 = 유해위험방지계획서제도는 1982년 산업안전보건법이 제정될 때부터 도입된 제도다. 재해발생 가능성이 높은 유해위험요인을 사전에 파악해 제거하려는 목적이다.

이 제도는 선진국, 특히 일본 제도를 모델로 했다. 일본은 이 제도를 대단히 중요하게 여기고 실효성 있게 운영하고 있다는 게 일본 제도에 밝은 전문가의 의견이다.

산안법에 명시된 계획서 제출대상은 크게 두 곳이다. △제조업 등에서 유해위험 기계·설비를 설치하거나 이전할 때 △일정규모 이상의 건설공사가 그것이다. 해당 사업주는 사업장 유해위험요인을 파악해 방지계획을 세운 후 스스로 심사하고, 그 심사결과서를 작성해 고용부 장관에게 제출해야 한다.

고용부는 계획서 검토를 안전보건공단에 위탁했다. 공단은 계획서를 심사해 △적정 △조건부적정 △부적정 판정을 한다. 부적정 판정을 받으면 고용부 지방관서는 공사착공중지명령, 계획변경명령 등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

그러면 사업주는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보완하거나 변경해 다시 제출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작업개시 전에 안전성을 확보하려는 게 제도의 목적이다.

◆"첨부서류 1권에서 2권으로 늘어" = 유해·위험 기계·설비나 건설공사의 사전안전성 확보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인 만큼 계획서를 심사하는 심사위원의 전문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 안전보건공단 지사 내부 직원 1~2명이 담당한다. 심사가 형식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우리나라가 공단에 심사를 모두 위탁한 것과 달리, 일본은 후생노동성 본성(대형건설공사) 또는 일선기관(그 외 건설공사)에서 외부전문가를 심사위원으로 활용해 직접 심사를 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발주자에게 권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심사결과 '부적정' 판단사례는 찾아볼 수 없고, 천편일률적으로 '조건부 적정'이 내려진다. 지난 4월 이천 물류창고 건설공사도 4차례나 '조건부 적정'을 받았다.

건설업체 14년 근무한 서울 통신공사업체 안전팀장 ㄷ씨는 "어차피 부적정 판단은 내려지지 않는다는 것을 다들 알고 있어 그런지 외부업체에 작성을 맡기고 건설업체 스스로는 거의 챙기지 않는다"며 "한마디로 안전보건공단 제출용이지 이행용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 현장과 괴리된 대행 부실작성 = 충청도 소재 건설현장에 근무하는 대형건설사 안전부장 ㄹ씨도 "현장에서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실제 이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심혈을 기울여서 작성하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아마도 한 군데도 없을 것"이라며 "외부컨설팅업체가 거의 전적으로 대신해서 작성해 주고 있다는 것은 고용부와 안전보건공단도 다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전보건공단 직원만이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심사를 담당하는 것도 부실심사의 큰 원인이다. 복잡하고 새로운 공법 등이 활용되는 공사에 대해서는 관련전문가들의 참여가 필요한데도 외부전문가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있다. 이러한 폐쇄적인 심사구조가 충실한 심사의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정진우 교수는 "심사기관이 '부적정' 판단은 하지 않고, '조건부 적정' 판정을 내리며 면피용으로 방대한 서류를 요구하고 있다"며 "해를 거듭 할수록 현장과 괴리된 부실한 서류만 많아져, 두꺼운 책 1권 분량이던 것이 지금은 2권으로 늘었다는 게 현장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안전보건공단 한 관계자는 "향후 조건부 적정 판정 기준을 보다 명확히 하고, 대형사고 위험에 대한 부적정 처리기준을 강화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주요 구조변경, 2가지로 해석 = 한편 제조업 등의 유해위험방지계획서는 고용부가 법령과 다른 하위규정(고시)을 만들어 제도를 왜곡시키고 있다. 산안법 제42조 제1항 제1호는 '제품생산과 관련된 기계·설비 등 전부를 설치·이전하거나 주요 구조부분을 변경할 때' 유해위험방지계획서를 제출토록 했다.

하지만 고용부는 '제조업 등 유해위험방지계획서 제출·심사·확인에 관한 고시'에서 '주요 구조부분 변경'과 관련해 잘못된 규정을 두고 있다.

고용부 위 고시 제2조 제1항 제5호는 '주요 구조부분 변경이란 (중략) 전기정격용량의 합이 100킬로와트 이상 증가되거나, 기계·설비 등의 일부를 옮겨 설치하는 경우'라고 명시하고 있다.

정 교수는 "전기정격용량 100킬로와트 이상 증가나 기계·설비 일부 이전 설치는 주요 구조부분 변경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주요 구조부분 변경은 전기용량이 100킬로와트 미만 증가되는 경우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고, 기계·설비 일부를 이전 설치하더라도 주요 구조부분 변경이 없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법상 '이전'을 대폭 축소하기도 = 또한 위 고시 제2조 제1항 제6호도 '주요 구조부분 변경'을 정의했는데, 제5호와는 달랐다. 제6호는 '주요 구조부분 변경이란 (중략) △열원 종류를 변경하거나 △대상설비를 교체·변경 또는 추가하거나 △후드제어풍속이 감소하거나 △배풍기 배풍량이 증가하는 경우를 말한다'고 명시했다.

정 교수는 "법의 같은 조문 안에 있는 '주요 구조부분 변경'이라는 동일한 용어에 대해 하나의 고시에서 전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이라며 "자의적 해석을 하고 있음을 스스로 드러낸 것"이라고 지적했다.

뿐만 아니라 위 고시 제2조 제1항 제4호는 "산안법 제42조 제1항 제1호와 제2호가 규정한 '이전'이란 기계·설비 일체를 다른 곳으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산안법 제2호는 제1호와 달리 '일체'라는 표현이 없다.

정 교수는 "법 제2호는 제1호와 달리 '일체'라고 한정돼 있지 않음에도 고용부가 자의적으로 '이전'의 의미를 '일체'를 옮기는 것으로 대폭 축소해 규정했다"고 지적했다.

◆하위 법령 상위법 왜곡 '수두룩' = 하위 법령인 고시에서 산안법 규정을 왜곡한 것은 이 뿐만이 아니다. 산안법 제108조는 신규화학물질의 유해성·위험성 조사 주체로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자'로 규정했다. 하지만 고용부령인 '신규화학물질의 유해성·위험성 조사 등에 관한 고시'는 제10조 제2항에서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자'를 '사업주'로 축소했다.

산안법 제2조는 '사업주란 근로자를 사용해 사업을 하는 자'로 규정했다. 근로자를 고용하지 않고 신규화학물질을 제조하거나 수입하는 영세자영업자는 법의 취지와 달리 고시에 의해 법적용대상에서 제외된다.

또한 산안법 제84조는 안전인증 대상을 규정하며 기계·설비 등의 '주요 구조부분을 변경하는 자'를 포함하고 있다. 하지만 고용부령인 '안전인증·자율안전확인신고의 절차에 관한 고시'는 이에 대한 규정을 마련하지 않았다.

정진우 교수는 "그 결과 주요 구조부분 변경에 대한 인증 자체가 누락되거나 개별심사 취지와 달리 주요 구조부분 변경 완료 후의 심사가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끝장기획, 산재사고 왜 줄지 않나" 연재기사]

장병호 한남진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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