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제실 검토 선택사항 … 입법예고는 발의 후에

정부 '청부입법' 관행 … 여당 의원 유치 경쟁

국회의원은 어떻게 그렇게 많은 법안을 쉴 새 없이 쏟아낼 수 있을까. 별도의 사전검토 절차가 없기 때문이다. 국회의원의 생각을 법안으로 만들어 국회 사무처 의안과에 내면 끝난다. 특히 요즘은 전자입법시스템이 잘 돼 있어 의원실을 돌아다니며 공동발의 의원의 동의 서명을 받지 않아도 되고 국회 사무처 의안과에 직접 법안을 들고 가지 않아도 된다. 쉬워진 입법절차가 법안 홍수를 만들고 부실법안을 양산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정부가 간편한 의원입법을 활용하기 위해 여당 의원의 손을 빌려 '청부입법'하는 관행도 굳어지고 있다.

보건복지위 제2법안심사소위│25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보건복지위원회 제2법안심사소위원회의가 열리고 있다. 연합뉴스 진성철 기자

31일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임기가 시작한 지난해 5월 31일부터 이달 30일까지 1년간 의원들이 발의안 법안은 모두 9543건이다. 300명의 의원이 한 달에 2.65개의 법안을 냈다는 의미다. 의원 1인당 11.3일에 법안 하나씩 쏟아낸 셈이다. 지난해 7월엔 1238건을 발의해 의원 1인당 4건이 넘는 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1주일에 한건씩 발의한 꼴이다.


◆법안 문제점 사전 검토과정 생략 = 정부는 지난 1년 동안 336건의 법안을 제출했다. 정부는 정책에 맞춰 부처별로 낸다는 점뿐만 아니라 법률안을 국회로 보내는 데만도 많은 단계와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이 특징이다. 정부 입법지원센터에 따르면 정부입법안은 국회 제출까지 8단계를 거치면서 최소 154일이 걸린다. 법령안의 입안(약 30~60일), 관계기간과의 협의 및 당정협의(약 30~60일), 입법예고(약 40~60일), 규제심사(약 15~20일), 법제처 심사(약 20~30일), 차관회의 심의(약 7~10일), 국무회의 심의(약 5일), 대통령 재가 및 국회 제출(약 7~10일) 등이다.

의원입법은 '법령안의 입안'만으로도 가능하다. 입안 기간이 1주일이 채 안되기도 한다. 당정협의, 규제심사, 차관회의, 국무회의는 거치지 않는다. 관계기관과의 협의는 선택사항이다. 정부 법제처와 같은 역할을 하는 국회 사무처 내의 법제실 검토 역시 의무사항이 아니다.


국민들의 의견을 듣는 입법예고는 발의된 이후 소관위원회 회부한 다음에 이뤄진다. 입법예고기간도 개정안의 경우 10일 이상(제정안은 15일 이상)으로 정부입법에 비해 짧다. 법률안 심사를 위해 입법예고기간을 줄일 수도 있다.

재정을 사용하거나 세수를 줄여야 하는 경우에 첨부하는 예산정책처의 비용추계 검토결과마저 법안 발의 이후에 제출해도 되게 했다. 생략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법안의 허점이나 하자를 검토할 기회가 없다.

◆정부가 청부입법 하는 이유 = 정부 입장에서는 속도전을 펼치기 위해 여당 의원을 통한 의원입법을 활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정부입법이 예전과 같이 '일사천리'로 통과되지 않고 오히려 국회 내에서 제동이 걸려 애초 취지가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의안정보시스템에 따르면 21대 국회 1년 동안 정부가 내놓은 법률안(336건)은 20대 국회에서 발의된 390건에 비해 54건이 줄었다. 16대 208건, 17대 256건에서 18대엔 643건으로 확대됐으나 19대(323건)부터 꺾였다.

국회의원 임기 4년 전체로 봐도 정부 발의안은 17대 1102건에서 18대엔 1693건으로 늘었다가 19대와 20대에 1285건, 1453건으로 줄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제20대 국회 입법활동 분석'보고서를 통해 "정부가 직접 발의하지 않고 의원입법 처리된 정부안 중에서 원안가결(12.3%)된 경우보다 수정가결(15.6%)된 비율이 더 높다"면서 "위원회 대안반영폐기로 처리된 비율도 39.6%에 이를 정도로 높다"고 했다.

또 "정부안이 제19대 국회에서 급격하게 감소한 원인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정부입법의 복잡한 사전절차를 회피하고 신속한 입법을 위해서 여당의원을 통한 우회입법이 늘어나는 현상과도 관련될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정부입법안의 가결률(원안가결+수정가결)은 20대에서 27.9%로 떨어졌고 대안반영폐기율은 40% 가까이 올랐다.

대안반영폐기 법안은 정부의 입법 취지는 살아있지만 내용은 상당히 바뀐 것으로 이 비율이 증가했다는 것은 정부의 정책 수행이 의도와 달리 크게 틀어질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

21대 들어 들어온 정부입법안 중 163건이 처리됐으며 이 가운데 가결법안은 79건(원안가결 33건+수정가결 46건)인 반면 대안반영폐기는 84건에 달했다. 모 의원실 관계자는 "상임위마다 피감기관들이 있고 거기엔 정부 부처나 공공기관들이 있으며 이들이 내려고 하는 법안을 의원들이 내는 게 이제는 관행으로 굳어져 있다"면서 "상임위 여당 의원들이 전체 법안들을 올려놓고 나눠서 발의하고 의원들마다 경쟁적으로 정부와 공공기관 법률안 발의에 나서고 있다"고 설명했다.

["21대 국회 1년 쏟아지는 법률" 연재기사]

박준규 기자 jkpark@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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