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구조혁신펀드 역할 커졌지만 한계 … "정책금융, 부실나면 책임 추궁 우려해 소극적"

"전통적인 중소 제조업체들은 자본시장에 아무리 돈이 넘쳐도 투자를 받기 어렵습니다. 이런 기업들을 구조조정해서 정상화 시킬 수 있는 전문투자자를 육성해야 합니다."


24일 기업구조조정 분야의 한 전문가는 "최근 몇 년간 기업 구조조정과 관련해 바뀐 게 거의 없다"며 "성장산업의 경우 투자 유치를 받아 선제적 구조조정을 할 수 있지만 전통기업들은 투자 유치가 어렵다"고 말했다.


중소기업들이 한계기업으로 내몰리고 있는 대표적인 산업은 △자동차부품 △조선기자재 △플랜트 기자재 △산업용기계 부품 △항공기 부품 등이다. 해당 산업에 속한 중소기업들은 투자유치 가능성이 낮다. 정부가 지원 대책을 내놓고 있지만 보다 세부적인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

서울회생법원 관계자는 "시장에 자금이 풍부해지면서 사업성이 있는 기업들은 알아서 투자를 받아 구조조정이 진행되고 있다"며 "과거에는 경쟁력 있는 회사들도 법원을 거쳐 살아났지만 지금은 권리관계가 복잡하고 밖에서 해결되지 않은 회사들이 들어오면서 회생보다는 파산으로 가는 기업들이 많다"고 말했다.

◆모험 투자 꺼리는 기업구조혁신펀드 = 정부가 2018년 시행한 기업구조혁신펀드는 구조조정 시장의 구원투수로 등장했다. 채권은행 중심의 구조조정에서 시장중심의 구조조정으로 옮겨가기 위한 징검다리 역할이 주어졌다. 기업구조혁신펀드는 2018년부터 올해 4월까지 38개 기업에 약 1조7600억원을 투자했다. 정부 재정을 바탕으로 정책금융기관과 금융기관이 출자해 모펀드를 조성하고 민간투자를 매칭하는 방식으로 올해말까지 4조2000억원이 조성된다.

약 1조6400억원 규모로 조성된 1차 펀드는 주로 조선·건설중장비·철강 분야의 중견·중소기업에 투자해 기간산업 경쟁력 강화에 참여했다. 약 1조5300억원 규모의 2차펀드는 중견·중소기업 이외에 대기업 계열사 인수에 참여, 9개 기업에 7089억원을 투자했다.

3차 펀드는 신생·소형 운용사의 구조조정 시장 진입을 유도하는 데 초점을 맞췄다. '루키리그'를 도입해 신생·소형 운용사를 대상으로 중소기업에 대한 소액·다수 투자를 하도록 했다. 모펀드로 750억원을 조성하고 민간자금 500억원을 매칭해 전체 규모는 1250억원이다.

시장에서는 "기업구조혁신펀드가 구조조정 시장에서 어느 정도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도 "남들이 안하는 어려운 투자에 나서지는 않고 있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기업구조혁신펀드는 투자처를 정해 놓지 않고 자금을 모으는 블라인드 펀드와 투자처를 정해놓은 프로젝트펀드로 운영된다. 프로젝트 펀드는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지만 블라인드 펀드는 소규모 운용사들이어서 한계가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중소형 운용사들이 모펀드로부터 500억~1000억원을 받아 민간자금을 매칭해야 하는데, 매칭이 쉽지 않기 때문에 대부분 금융회사들이 참여하는 구조다. 투자 규모가 크지 않다보니 3~4개 기업에 투자를 하는데, 1~2곳만 투자를 잘못해도 운용사 자체의 존립이 어려워지는 게 현실이다. 규모를 쪼개서 여러 곳에 투자하는 경우 관리가 어렵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업계 관계자는 "시장에서 투자를 꺼리는 곳에 이들 펀드들이 나서야 하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다"며 "펀드의 규모를 키우고 남들이 안하는 어려운 곳에 투자하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계기업 살릴 종합적인 역량 부족 = 한계기업을 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한계기업과 관련한 다수의 이해관계를 조율하고 대상회사의 갱생가능성 평가와 회생안 작성, 자금투자, 컨설팅 등 한계기업 정상화 관련 제반 영역을 전체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종합 능력을 갖춰야 한다.

자본시장에서 전문조직을 갖추고 한계기업 구조조정에 적극적으로 뛰어든 기관은 유암코가 사실상 유일하다. 유암코는 워크아웃에 들어간 중견기업, 잠재부실이 큰 중소기업에 대한 재무구조 개선지원(프리워크아웃), 중견·중소기업의 회생기업재기지원, 대기업 구조조정지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구조조정에 참여했다. 유암코는 채권은행들이 출자해 만든 조직으로 시장 기반의 구조조정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디딤돌 역할을 하기 위해 탄생했다. 유암코가 잇따라 구조조정을 성공시켰지만 시장에서 제2, 제3의 유암코는 등장하지 않았다. 유암코도 시간이 갈수록 동력이 떨어졌고, 직원들이 이탈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시장에서 구조조정 전담기구 설립의 필요성이 제기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규모가 작은 소기업의 경우 미국에서는 별도의 절차를 마련해 시행하고 있다. 기업구조조정절차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기 때문에 기존 회생절차로는 부적합하다고 판단, 미국은 소기업회생법을 시행하고 있다. 기업 부채가 256만달러(약 29억원) 미만인 소기업에만 적용된다. 채무자가 직접 회생계획안을 제출하고 채권자의 투표와 가결이 필요하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채권자의 압력 행사가 약해지는 효과가 있다. 박래수 숙명여대 교수는 "소기업에 초점을 둔 강력한 법적 회생절차 마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업구조 재편' 중요 과제 = 금융당국 관계자는 "재무 중심의 구조조정보다는 사업구조 재편을 통한 전환이 기업 회생에 있어 중요한 과제가 됐다"고 말했다.

전통기업들이 몸담고 있는 산업이 빠르게 바뀌면서 생산효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구조를 재편해야 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자동차 산업의 경우 내연기관에서 전기차로 이동하고 있다. 수많은 자동차 부품 업체들이 사업구조를 바꿔야 하는 상황에 처해있다. 전기차는 내연기관 자동차에 비해 부품수가 3분의 1이라서 일부 부품업체들은 자연스럽게 파산에 직면할 수 있다. 하지만 경쟁력을 갖춘 업체들이 전기차 부품업체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자금이 필요하다.

금융위원회는 올해 업무계획에서 "정책금융기관을 통해 중견·중소기업에 13조원의 사업재편·설비투자 자금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사업구조 재편을 통해 기업이 장기적으로 경쟁력을 확보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정책금융기관이 저금리의 장기대출상품으로 공급하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시장의 기대는 크지 않다. 한 구조조정 전문가는 "정책금융기관의 경우 부실이 나면 책임 추궁 등을 우려해 지원에 소극적"이라며 "지원 대상 기업에 대한 옥석가리기를 제대로 할 수 있어야 하고, 일정 정도 손실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 과감한 지원과 인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이후 기업구조조정 대비하자" 연재기사]

이경기 기자 cellin@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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