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평 한국외국어대 특임강의교수

세계 최대의 순채권국 일본의 엔화가 가진 안전자산으로서의 지위가 후퇴하고 있다. 그동안 일본은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발생할 때마다 엔고에 고민했는데, 최근에는 우크라이나 사태에도 불구하고 엔저기조가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최근의 엔저는 일본경제의 장기적 쇠퇴 현상으로 볼 수도 있다. 사실 일본의 주요 교역상대국과의 상대적 물가수준의 변화를 고려한 실질실효환율로 보면 엔화의 실질적 가치는 지난 2월 평균치로 1980년 이전 수준으로 하락했다.<그래프 참조>

우크라사태에도 엔저가 지속되는 원인

과거에는 해외 각국의 기업과 투자가들이 초저금리의 엔 자금을 대량으로 조달해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다가 글로벌 위기가 발생해 자산가격이 급락하면 서둘러 자산을 매각해 엔화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엔화 매입에 주력했다. 때문에 엔화가 급등했다. 그러나 미국 유럽 각국도 제로금리 정책을 펼칠 만큼 금리가 떨어진 상태에서 엔 캐리 트레이드는 그동안 별로 늘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이 금리인상에 나섰다. 반면 일본은 국제원자재 가격 상승에 따라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금년 4월 이후 일시적으로 2% 내외 수준으로 상승해도 다시 1% 내외의 저물가로 회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금리인상을 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이에 따른 미국과 일본의 금리격차 확대가 지속되어 엔저 압력이 커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국제수지 측면에서 보면 일본은 무역수지 적자에 이어 최근 경상수지도 적자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경상수지는 지난해 12월 3708억엔 적자에서 금년 1월 1조1887억엔 적자로 급증했다. 그동안 일본은 제조업의 공동화 현상이 진행되고 한편 해외투자 자산이 확대되면서 무역수지 적자가 지속되었지만 막대한 해외자산 수익으로 인해 본원소득수지 흑자가 확대되면서 경상수지는 흑자를 기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근 국제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무역적자 규모가 본원소득수지 흑자를 능가하면서 경상수지가 적자로 빠져 외환시장에서 엔화를 매각하고 달러화를 조달하려는 수요가 상대적으로 우위를 점하기 쉬운 상태가 되었다. 일본이 구조적으로 경상수지 적자 국가가 돼 해외자산의 확대추세도 멈출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지만 외환수급 측면에서 현재는 엔화가치가 떨어지기 쉬운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노믹스 이후 엔저가 장기화됨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수출이 늘어나지 않고 무역수지 적자가 계속된 데에는 일본기업의 해외투자 중시 경영의 영향도 있다. 일본기업이 엔저에도 불구하고 수출물량을 늘리지 않고, 일본 내에서의 수출능력 확대 투자에도 소극적으로 대응하고, 수출채산성과 수익 중시 경영에 주력해왔던 것이다. 해외자산이 늘어나는 가운데 엔저가 진행됨으로써 엔화로 환산한 일본기업의 해외투자 수익이 부풀려져서 수익이 확대되는 효과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기업의 대응은 일본 제조업의 생산능력 확충, 근로자의 기량 향상, 기술력 강화 등에는 부정적으로 작용했다. 일본의 수출확대 능력을 제약해 무역수지 적자구조를 고착화시키는 요인이 된 것이다. 일본정부의 엔저 유도가 일본기업의 수익확대 투자확대 임금상승 수출확대로 이어지는 선순환을 확보하지 못하고 일본 산업 및 경제의 체력이 약해진 것으로 보인다. 쿠로다 일본은행 총재는 엔저가 일본경제에 긍정적이라고 계속 강조하지만 도를 넘은 엔저가 일본기업의 엔저 의존체질과 함께 일본 내의 생산능력 확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문제가 엔저를 더욱 부채질하는 상황이다.

취약한 투자입국화의 한계

일본은 무역입국에서 점차 투자입국으로 변화하면서 세계최대의 순채권국 지위를 유지해 왔으나 그 위상은 허약한 상태였다. 미국이나 영국 등 세계적인 채권국은 자국통화의 지위를 올려 글로벌 금융결제의 중심이 되어왔다. 미국의 경우 달러화를 발행해 세계 각국의 재화를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각국 간의 무역결제를 중개할 뿐만 아니라, 세계 각국의 투자가에게 저금리의 미국 재무부 채권을 판매하고, 미국은 각국의 고금리 자산을 달러화로 매입해 막대한 차익을 실현하는 글로벌한 자금순환 구조를 구축했다.

이에 비해 엔화의 경우 무역결제 비율이 낮고 국제적 지위를 강화하지 못하고 일본경제는 달러화에 의존하는 형태에 그쳤다. 그리고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여주는 것처럼 일본의 막대한 외환보유고도 만약 미국이 일본을 제재하겠다고 나서면 속수무책으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허약함을 가지고 있다.

일본의 경우 러시아와 달리 식량이나 에너지, 금속자원을 자급하거나 엔화로 구매할 수 있는 여건도 극히 취약하다. 글로벌화 시대의 후퇴와 함께 경제안보가 강조되고 각종 경제력이 무기화되는 시대에 일본의 국가경제적인 안보체제는 세계최대의 순채권국 위상에 걸맞다고 하기 어렵다. 일본경제 및 엔화의 허약한 위상에 대한 인식이 우크라이나 사태로 높아진 측면도 있으며, 이것 또한 엔저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엔화의 경우 결제통화로서의 위상이 미약한 가운데 일본은 정부채무의 국민총생산(GDP) 비중이 2021년 250%를 넘어서 선진국 중 최악의 상태다. 코로나19 여파로 일본의 국가채무 문제는 더욱 악화되었다.

물론 일본의 막대한 재정적자가 언젠가 국가파산으로 이어져 초엔저가 발생할 것이라는 우려는 그동안 기우로 취급되었다. 일본이 세계최대의 순채권국이며, 일본 중앙은행이 막대한 규모의 국채매입에 나서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가 없어진 것이 아니며 최근의 경상수지 적자와 함께 엔저의 배경이 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생산·수출과 원화의 점진적 위상 강화

이러한 엔화의 행보에서 우리경제에 대한 시사점을 도출하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우선 일본처럼 우리 원화도 무역결제 비율이 낮고 국제적 위상에 한계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구고령화 속에서도 일하고 생산하는 역량을 유지해 수출확대 추세를 유지·강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고령화 시대에 해외자산 수익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이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는 없다. 일본처럼 일시적이라도 급격한 원화 강세 등의 영향으로 제조업이 공동화될 경우 원화가 다시 약세로 돌아서도 수출확대가 어려워질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서 제조업의 지속적인 이노베이션과 고도화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미 우리나라는 순채권국으로 도약했다. 무역수지 흑자와 함께 해외소득수지 흑자 규모를 확대하면서 거시경제의 안정, 각 경제주체의 충분한 부채관리와 함께 안정적인 채권국으로서의 위상을 높여나가야 한다. 또 국채 회사채 주식 등 자산의 글로벌한 안전자산으로서의 위상을 높여 원화의 점진적인 지위 향상에 주력할 필요가 있다. 이와 함께 글로벌화의 후퇴, 지정학적 리스크의 만성화에 대비해 각종 원자재를 장기적 원화 결제 계약으로 확보할 수 있도록 자원부국 등과의 포괄적인 경제 협력 체제를 강화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지평 한국외국어대 특임강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