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아프리카 · 중동연구부장

중동 정치지형이 예사롭지 않다. 분쟁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곳이기에 예전부터 바람 잘 날이 없었지만 요즈음 형세는 과거와는 또 다르다. 단순히 폭력의 정도가 심해졌다거나 빈도가 잦아진 문제가 아니다. 힘의 변화가 기존의 통념과 독법을 넘어서면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는 불가측성의 공포가 퍼지고 있다. 상식이었던 피아의 구분이 뒤집히는 일도 다반사다.

지난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세계를 당황하게 했다. 푸틴은 고토회복과 러시아계 국민들의 보호를 전쟁의 명분으로 내세웠지만 당치않다. 영토주권의 침해이자 침략행위였다. 미국은 유엔 안보리를 소집, 러시아의 침공을 비난하는 결의안을 준비했다. 하지만 비토권을 가진 러시아가 당사국이기에 애초부터 통과는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미국은 국제사회의 압도적인 침공 비판 여론을 확인함으로써 러시아를 압박할 의도로 결의안을 추진했다.

중국포위와 중동포기, 미국의 딜레마

그러나 특이한 일이 벌어졌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UAE가 의외의 행보를 보였다. 안보리 비상임 이사국 UAE는 표결에서 기권했다. 뿐만 아니다. 산유국 러시아의 석유 수출 급감으로 인한 공급 경색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미국이 걸프 아랍 산유국의 증산을 요청했지만 사우디와 UAE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백악관과의 통화를 거부하고, 오히려 러시아 푸틴과 에너지 협력 기조를 유지하겠노라 밝혔다. 여기에 이스라엘의 애매한 중립 입장도 미국으로서는 놀랄 만한 일이었다. 전통적 친미 국가 세 나라 모두 대러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있다.

언론에서 크게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3월 초 시리아 아사드 대통령의 UAE 방문은 미국과 서방 입장에서 무척 불편한 장면이었다. 아사드는 2011년부터 지금까지 50만명 넘는 사망자가 발생한 시리아 내전의 책임자다. 400만명 넘는 난민이 터키와 발칸, 그리고 중부 유럽으로 밀려들게 만들어 유럽통합을 뒤흔든 장본인이다. 자국 국민에 대한 비인도적인 공격행위로 악명 높다. 심지어 2013년 시리아 정부군의 화학무기 사용은 아사드가 국제사회의 공적이 되기에 충분한 사건이었다.

국제사회는 진즉부터 아사드정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의 퇴진을 전제로 하는 시리아 정치협상을 고민해왔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개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게 만든 주역이 푸틴의 러시아였다. 아사드는 러시아, 그리고 이란의 비호로 지금까지 권력을 지켜왔고 내전에서 승기를 굳혔다. 바로 그 아사드가 미국의 우방인 UAE를 방문한 사건은 작은 일이 아니었다.

이렇듯 전통적 친미국가들이 상궤를 벗어난 행보를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현 미국정부에 대한 일종의 배신감 또는 불신 때문이다. 걸프 왕정국가들은 3중 위기를 겪고 있다. 첫째는 석유시대의 종언에 대한 불안감이고, 둘째는 혁명 이슬람 공화정을 주창하는 이란의 부상이다. 그리고 세번째 위기가 바로 국내 반(反)왕정세력의 발호 가능성이다. 이러한 위기 국면에서 바이든에 대한 불만이 점차 커진 것이다.

'미국이 셰일혁명으로 석유 공급체계를 교란시켰다'고 믿는 산유국 입장에서는 바이든이 기후변화에 적극 대응하며 탄소중립시대를 빠르게 견인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작지 않다. 이 와중에 미국이 이란과 핵합의 재가동을 위한 간접협상을 시작했다. 한편 미국이 인권과 민주주의를 이야기하며 국내 반정부 위험분자들을 오히려 부추기는 것 아니냐는 불만도 한가득이다. 특히 사우디 왕세자와 연관된 것으로 알려진 언론인 자말 카쇼크지 피살 사건을 바이든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사우디왕실의 불만은 크게 고조되었다.

여기에 21세기 최대 비극이라 일컬어지는 예멘 내전 당사자인 후티 반군을 미국이 테러집단 리스트에서 제외하자 사우디와 UAE는 분노했다. 이란 지원을 받으며 사우디 턱밑에서 왕실을 위협하는 이 집단을 미국이 마치 문제없는 조직인 양 풀어준 데 대한 불만이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끝 간 데 없이 전쟁을 이어갈 수 없는 상황에서 일단 정치협상을 위한 불가결한 조치였지만 걸프왕정은 이를 미국의 배신으로 여겼다.

미국 부재 내다본 걸프왕국들의 행보

미국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단순히 우방국의 이탈로 대 러시아 압박 전선이 흐트러질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만이 아니다. 대외 관여의 중심축을 중동에서 아시아 쪽으로 옮기는 와중에 일어난 혼돈의 징후가 불길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전략적 경쟁에서 중국을 압도하기 위해 인도태평양 전략에 무게를 실어왔다. 이 과정에서 중동지역에 대한 개입을 줄이는 것은 필수적이었다. 두개의 전장에서 동시에 승리할 수 있다는 20년 전의 자신감을 내보이는 미국 전략가들은 더 이상 없다.

지난해 8월 아프가니스탄 철군은 뼈아팠다. 바이든이 선거 때부터 공언했고, 트럼프 역시 철군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에 미군의 궁극적 퇴진은 예견된 것이었다. 타이밍이 문제였다. 탈레반의 입성을 두려워하며 아프가니스탄을 탈출하려는 카불 시민들의 공항 정경은 비극적이었다. 당시 이슬람국가 호라산(IS-K)의 테러는 이 지역에서 다시 지옥도가 펼쳐질지 모른다는 비극의 전조이기도 했다. 기존 친미진영의 중동 국가들에게 이 장면은 공포였다. 이 와중에 미국은 이란을 정상국가로 끌어들이려는 핵합의를 하고 있었기에 사우디나 UAE는 더 아팠을 것이다.

미국의 부재가 현실이 되어가는 모습을 내다 본 걸프의 왕실은 이제 위험회피(헷징)를 마다않는다. 미국의 안보지원이 미흡하다고 느껴오던 차에 러시아의 방공망을 들여오는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UAE는 230억달러 상당의 F35 도입을 미루고, 러시아제 수호이-75 스텔스기 공동개발을 고려중이다. 어차피 미국에게 충격을 주려 마음먹은 바에야 더 센 이야기도 스스럼없이 내놓는 모양새다.

사우디왕실이 중국에 판매한 석유 대금을 위안화로 결제할 수 있다는 소식의 여파는 컸다. 지난 70년간 달러가 유지해온 패권이 중동에서 무너질 수도 있다는 우려가 조금씩 퍼져나갔다.

식량위기가 제2의 아랍의 봄 부를 수도

이란 핵합의 복귀 협상이 난항을 겪고 있다. 협상이 깨지고 반미 진영의 주축 이란이 핵무기를 가지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국제사회가 아무리 말려도 사우디나 UAE 등도 즉각 핵개발에 나서려 할 것이다. 중동 전역이 핵도미노로 빠져들 확률이 높다. 아니 그 전에라도 이스라엘이 작심하고 이란 핵시설을 선제공격하면 어쩔 것인가? 우크라이나전쟁과 비교하기 힘든 국제전이 일어날지 모른다. 이를 막고 중국 견제에 집중하기 위한 요량으로 미국은 이란과 합의를 통해 상황을 관리하려 하고 있다. 역설적으로 바로 이 의도 때문에 친미 진영의 국가들이 들끓으며 미국과 각을 세우는 딜레마가 발생한 것이다.

친미 진영을 관리하고 반미 진영의 핵심인 이란을 중립지대로 끌어오면 미국의 운신 폭이 커지리라 믿었다. 그러나 미국 뜻대로 상황이 전개되지 않았다. 이스라엘 집권 연정도 일부 의원의 이탈로 붕괴 가능성이 고조되고 있다. 친미도 아니고 반미에도 속하지 않고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터키의 행보도 종잡을 수 없다. 한마디로 우방을 내주고 적진에 공들이다가 혼돈의 진퇴양난에 빠진 형국이다.

이 혼돈이 여명 직전 짙은 어둠의 시간인지, 아니면 무저갱으로 접어드는 초입인지 아직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징후는 좋지 않다. 우크라이나전쟁으로 국제 경제가 곤경에 처해있고, 특히 식량위기에 대한 우려가 크다. 2008년 금융위기와 2009년 국제곡물가격 상승으로 2011년 아랍의 봄이 일어난 당시와 비슷해 보인다. 제2의 아랍의 봄이 곧 일어날지 모른다는 조심스런 전망도 나온다. 살얼음 위를 걷는 시기다. 여러모로 불길하다.

인남식 국립외교원 교수, 아프리카 · 중동연구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