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물가급등이 다시 악화돼 충격을 던지고 있다. 미국 소비자물가(CPI)가 40년래 최고치로 치솟았다.

3월 8.5%였던 물가는 4월 8.3%로 소폭 완화되면서 정점을 찍고 내려가고 있다는 기대감을 불렀다. 하지만 미 연방노동부가 10일(현지시간) 발표한 5월 소비자물가는 8.6%에 달했다. 1981년 12월 이래 40년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물가 정점 기대감이 무참히 깨졌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는 물가를 잡기 위해 3월 기준금리를 0.25%p, 5월 0.5%p 인상했다. 6월과 7월, 9월에도 연속으로 0.5%p 인상을 예고한 상황에서 물가의 고삐를 잡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미국경제에 허리케인이 몰아닥치고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미국민 대부분이 8%대의 고물가 속에 이자부담이 가중되고 저성장 또는 불경기에 시달리게 될 전망이다. 미국민 10명 중 9명은 싼 곳을 찾아 헤매는 바겐 헌팅에 나섰고 10명 중 8명은 외식과 레저생활을 줄이고 있다. 국민 소비지출이 70%를 차지하는 미국경제가 소비 위축으로 2%대의 저성장을 거쳐 자칫 마이너스 성장이라는 불경기에 빠질 조짐이 보이고 있다.

불경기 공포 심화

경제전문가들은 "고물가 속 저성장이 장기화되는 스태그플레이션, 나아가 경제가 경착륙하는 불경기를 저지하려면 극약처방이 필요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 시절 경제사령탑이었던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은 "제롬 파월 연준의장은 그가 모델로 삼아왔던 1980년대 초 폴 볼커 연준의장처럼 파격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볼커 전 연준의장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금리를 올려 고의적 또는 의도적인 불경기를 유도함으로써 수요를 급냉시켜 물가를 잡는 극약처방을 썼다. 파월 의장의 현 연준이 어떤 선택과 처방을 할지, 그 효과는 어떨지 관심이 쏠리고 있다.

미국의 5월 소비자물가가 악화된 것은 전체 22%를 차지하는 에너지와 식품가격이 급등하고 32%를 점유하는 주거비까지 계속 올랐기 때문이다. 에너지 가운데 휘발유 등 연료가격은 5월 한달 16.9%, 1년 전에 비하면 무려 106.7% 폭등했다. 식품가격도 1년 전에 비해 11.9% 올랐다. 고기와 생선, 계란 등 일일 생필품 모두 두자릿수 비율로 급등했다.

렌트비를 포함하는 주거비도 1년 전에 비해 5.5% 상승, 1991년 2월 이래 31년 만에 가장 큰 폭으로 올랐다. 항공료는 5월 한달 12.6% 급등했고 중고차 가격도 석달 연속 하락을 멈추고 오름세로 돌아섰다. 1년 전에 비해 16% 인상됐다.

5월 소비자물가에서 변동성이 심한 에너지와 식품 가격을 뺀 '핵심 CPI'는 6% 올라 에너지와 식품가격 급등이 CPI 악화를 초래했음을 나타냈다.

미국 물가의 고공행진은 최소 12~18개월 지속될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과 CNBC 등 미 경제전문 언론들은 "연준의 연쇄 금리인상을 통한 물가잡기 시도에도 불구하고 정점을 찍었다는 기대감이 깨졌다. 미국이 불경기를 피할 수 없게 됐다는 공포가 확산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연준은 현재 0.75~1%인 기준금리를 연말까지 2%p 더 올려 2.75~3%까지 인상할 것을 예고했다. 그럼에도 소비자물가는 연말 6.1%로 낮추는 데 그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어려울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는 상황이다.

미국민 생활태도 변화

재닛 옐런 재무장관과 세계은행, 민간 경제전문가들은 "향후 1년 내지 1년 반은 '고물가 속 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에 시달릴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전망했다.

8%대 물가급등에 비해 임금상승은 5%대라 미국민 실질소득은 오히려 마이너스 3%p 줄어든 셈이다.

미국의 물가급등이 장기화하면서 국민들의 생활태도가 바뀌고 있다. 워싱턴포스트(WP)가 9일 보도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87%는 이른바 바겐 헌팅에 나서 싼 곳을 찾아 헤매고 있다고 대답했다. 77%는 외식과 여가생활을 줄이고 있다고 밝혔고, 74%는 사려던 상품구매 계획을 취소했다고 응답했다.

또 59%의 응답자는 유가폭등으로 자동차 운전을 덜하고 전기사용도 최소화하고 있으며 저축도 줄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미국민 27%는 유가폭등과 물가급등에 따른 생활고 때문에 부업을 하거나 일하는 시간을 늘리고 있다고 응답했다.

WP는 "미국민 대부분은 내년 물가급등과 유가폭등이 더 악화될 것으로 우려한다"며 "특히 전국평균 휘발유값이 연일 최고치를 갈아치우며 갤런당 5달러를 넘었고 식료품 가격도 두자릿수 비율로 급등했다. 서민과 저소득층의 생활고가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연소득 5만달러 이하인 서민과 저소득층 54%가 휘발윳값과 식품값, 주거비 등 물가가 너무 올라 가계재정 운용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고 답했다.

이에 따라 미국이 '파격적인 금리인상과 고의적 불경기'로 물가를 잡는 극약처방까지 내놓을지 주목되고 있다. 래리 서머스 전 재무장관 등 저명한 경제전문가들은 현재의 물가를 잡으려면 연준이 80년대 초와 같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WSJ와 CNBC 등도 10일 "80년대 초와 같은 특단의 조치를 취해야 물가를 잡을지 모른다"는 극약처방을 거론하고 있다.

극단적 처방 나올까

미국의 불경기의 시작과 종료를 판정하는 '국가경제연구국'(NBER)의 최근 보고서에서 서머스 전 장관은 "제롬 파월 연준의장은 자신이 모델로 삼아왔던 폴 볼커 당시 연준의장이 1980년대 초 취한 파격적인 행보를 따라해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1980년대 초 볼커 의장이 취한 특단의 조치는 기준금리를 상상하지 못할 수준으로 파격 인상해 경기침체를 초래했다. 고의적 또는 의도된 불경기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물가를 잡는 극약처방을 내렸다고 경제전문 언론들은 해석하고 있다.

1979년 8월 연준의장에 취임한 볼커는 당시 인플레이션이 현재와 비슷한 9%를 기록하자 파격적인 금리인상에 나서 1981년 6월 기준 기준금리를 19.10%로 올렸다. 공격적인 금리인상 직후 물가급등이 더 악화돼 1980년 물가는 14.6%까지 올라갔고 4년이 지난 1983년 말에야 4%로 내려왔다.

볼커의 연준이 기준금리를 19.10%까지 인상함에 따라 1980년부터 82년까지 3년 동안 미국경제는 불경기를 두번 겪었다. 실업률은 1981년 11%까지 급등했다.

파월 연준의장이 전임자 볼커 전 의장의 악명 높은 파격행보를 그대로 따라가진 않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미국 소비자들과 기업, 사업체들은 그와 비슷한 어려움을 장기간 감내해야 한다는 점을 인식하고 대비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서머스 전 장관은 "물가잡기에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 인내와 고통을 감내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미국경제는 향후 12~18개월 동안 8%대 고물가 속에 한해 3% 이상 올라갈 금리에 따른 이자부담 가중, 이에 따른 소비지출과 기업투자 위축, 실업률 상승과 2%대 저성장이 이어지는 악순환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한면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