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택환 언론인, 경기대 교수

장면 1 # : 8월 20일 독일 수도 베를린과 브란덴브루크주 공영방송인 베를린방송(rbb)의 사장 패트리시아 슐레징거와 이사회 의장인 프리데리케 폰 키르히바하 등 여러 간부들이 사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사장을 포함한 간부들이 △수신료로 자가용 자동차에 안마의자 설치 △사장 남편과 자문계약 △27명의 간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 지급 △사장 스스로 과도한 연봉 책정(32만유로, 4억3000만원) 등 흥청망청 사용한 것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장면 2 # : 9월 2일 세계 공영방송의 효시로 칭송받던 영국 BBC 방송은 "1995년 11월 방영된 '파노라마' 프로그램은 왕세자비 다이애나 인터뷰를 성사시키기 위해 악의적인 가짜 뉴스를 보도했는데 이것들 모두 조작된 것"이라고 인정했다. 뿐만 아니라 다이애나를 이혼과 죽음으로 몰아갔던 BBC 마틴 바시르 기자의 인터뷰 역시 "위조한 은행 입출금 내용을 들이밀고 거짓말을 하면서 다이애나비의 동생 스펜서 백작에게 접근해 사기행각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당시에도 인터뷰 관련 문제가 제기됐지만 간부들은 이를 묵살해 제대로 조사하지 않았다. BBC는 "다이애나 인터뷰로 발생한 수익금 22억3000만원을 기부한다"고 밝혔다.

프랑스·영국, 수신료 폐지 본격화

독일 영국의 공영방송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위스의 공영방송까지 개혁대상으로 전락했다. 유럽의 방송전문가들과 정치인들은 "세금 성격의 수신료에 대한 민주적 통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입을 모은다. 유럽 공영방송들이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인 방송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지만 민주적 통제가 없어 이들의 도덕적 해이가 곳곳에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위스 고급지 노이에 취리히 차이퉁(NZZ)은 "유럽 공영방송 스캔들은 시스템 내 종양이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가 문제"라고 비판한다. 공영방송에 '셀프서비스 멘탈'이 공공연하게 지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투명하지도 공정하지도 못하니 부패와 오용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구조라고 분석한다.

또한 방송환경이 변했기 때문에 과거처럼 대국민 '보편적 서비스'를 제공하는 공영방송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국민 소유의 전파를 사용하는 방송은 공영이라는 특별 지위를 확보해야 한다는 논리가 강했다. 그러나 케이블 위성 인터넷 등 무한대 채널의 방송 빅뱅으로 소수 방송이 특혜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게다가 유럽 공영방송은 편파방송 가짜뉴스 특혜 공금횡령 등 비리로 얼룩지면서 지탄의 대상이 됐다. 1980년대 영국인 자부심의 상징이던 BBC가 2000년대 이후 사내 성폭행, 정보원 해킹 사건 등 상업방송보다 더 문제를 일으켰고, 여기에 다이애나비 인터뷰 조작 사건은 결정타였다.

유럽의 지도자 중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이 가장 먼저 공영방송 개혁에 나섰다. 지난 3월 8일 선거유세에서 마크롱은 "재선에 성공할 시 TV수신료를 폐지하겠다"고 밝혔다. 프랑스 TV수신료는 연간 138유로(약 18만5000원)로 약 2800만가구가 내고 있다. 연간 31억유로(4조1000억원) 규모의 세수로 텔레비지옹, 아르테, 라디오 프랑스 등 공영방송·라디오 채널을 지원했다. '수신료 폐지'는 마크롱 외에 다른 주요 대선 후보들이 이미 내건 공약이다. 중도우파 성향인 발레리 페크레스 주지사도 같은 공약을, 극우 성향인 마린 르펜 국민연합(RN) 대표와 에릭 제무르는 수신료 폐지에다 '공영방송 민영화'까지 내걸었다

마크롱은 재선에 성공했고, 프랑스 하원은 7월 23일 '공영방송의 TV수신료 폐지 법안'을 찬성 170표, 반대 57표로 통과시켜 상원으로 넘겼다. 방송수신료 폐지안은 8월 1일 상원에서도 찬성 196표, 반대 147표로 통과했다. 다만 수신료 폐지로 인한 손실은 오는 2025년까지 다른 부문의 부가가치세로 충당키로 했다. 프랑스 공영방송은 3년 이내 자체적인 자금조달 방안을 마련해야 할 처지에 놓였다.

영국정부도 공영방송 BBC가 말썽을 일으키자 2028년까지 수신료를 폐지하겠다고 발표했다. 가구당 159파운드(약 25만원)에 달하는 수신료를 내년부터 2년간 동결하고 2027년 말 폐지하겠다는 방침이다. 스위스의 경우 공영방송 수신료 폐지 국민투표는 부결되었지만, 스위스 의회는 현재 수신료를 50% 인하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방만 경영하지 말고, 세금을 아껴 사용하라는 것이다.

유지하는 곳도 의회의 민주적 통제 강조

공영방송 수신료를 폐지하면 대안은 무엇인가. 공영방송 수신료를 민주적으로 결정·통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특별세금 형태인 수신료가 아니라 의회가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세금을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지적이다. 2021년 독일 헌법재판소는 "아직은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복잡한 정보홍수 속에서도 공영방송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판결했다. 공영방송의 필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도덕적 해이의 방만 경영을 막기 위해선 의회를 통한 민주적 통제가 필요하다는 것이 공영방송을 운영하는 유럽 나라들의 관점이다.

독일은 공영방송 재정적 수요를 방송사 스스로가 아닌 '공정거래위원회'(KEF)가 책정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공영방송 임직원 급여와 제작비를 국민의 눈높이 수준에서 맞추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rbb 스캔들이 터졌다.

독일의 경우 제1공영방송 ARD는 지방방송연합체의 운영형태로 본부는 함부르크에 있고, 단독 방송사인 제2공영 ZDF는 마인츠에 본부를 두고 있다. 우리로 비교하면 KBS본부가 목포에, MBC본부가 안동에 있는 셈이다. 공영방송 본부 위치로 전국균형발전에 기여하고 있는 것이다.

독일 공영방송의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수신료 폐지 목소리가 나오지 않은 까닭은 민영방송보다 신뢰가 높기 때문이다. 이는 이원적 구조에 기반하고 있다. 먼저 이사회 거버넌스가 정파에 좌지우지되지 않고 국민 이익에 복무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독일 ZDF 이사회는 주지사 경영자 노조 종교계 등 총 77명의 무보수 명예이사로 구성돼 있다. 한국 KBS 이사회가 11명의 정파적 인물로 구성돼 있는 것과 다르다. 둘째, 독일 공영방송은 '내적 자유'를 통해 프로그램 다원성을 보장한다. 우파 성격의 프로그램을 만들 경우 반드시 좌파 성격의 프로그램을 제작해 시청자가 선택 및 결정할 수 있도록 한다. 또 노조가 보도 및 경영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명시하고 있다. 공영방송은 정파·노조가 아닌, 국민의 방송으로 공정하게 보도해 신뢰를 얻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공영방송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한국의 공영방송들은 어떠한가? 지난 20대 대선에서 홍준표 후보(현 대구시장)는 'KBS 수신료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최근 대한민국시장도지사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된 이철우 경북도지사는 독일처럼 전국균형발전을 위해 'KBS·MBC본사 지방이전'을 제안했다.

또한 전기료에 포함된 수신료를 분리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한국 공영방송들이 공정한 보도보다 정파적 보도로 지탄 받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서울시 공영방송 TBS의 경우 김어준이 편파방송 비판을 받아도 여전히 건재하다.

'미디어 법' '미디어 윤리' 저자이자 인천방송 사장을 역임한 김옥조 전 한림대 교수는 "공영방송의 공(公)개념이 중요하다"면서 "공익 차원에서 국민 이해를 얼마나 대변하는가"가 핵심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한국 공영방송의 이사회 거버넌스가 각 정파 대변자로 '공'(空)자 공영방송이라고 비판한다.

이제 한국 공영방송은 새 이사회 거버넌스와 내적 자유 의무화로 정파·노조 방송이 아닌 진정한 국민방송으로 역할을 다할 때다. 그렇지 않으면 '민영화' 등 공영방송 무용론이 힘을 얻게 된다.

김택환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