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이 좀처럼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있다. 자칫 고물가 고금리 불경기를 한꺼번에 겪는 스태그플레이션에 빠지는 게 아닌가 하는 공포가 되살아나고 있다.

미국 중앙은행인 연방준비제도(연준)가 이번 달에도 기준금리를 크게 올릴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물가급등의 다른 원인인 식량과 에너지의 공급난, 주거비 등을 통제하지 못한 채 경기침체를 부를 것이라는 경고가 나온다.

9월도 최소 0.75%p 금리 인상

경제전문가들은 연준이 20~21일(현지시간) 열릴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에서 기준금리를 최소한 0.75%p, 많게는 1%p 올릴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월가 투자자의 76%가 0.75%p 금리인상을 예상한다. 노무라증권 등 일각에서는 '풀 포인트'로 불리는 1%p 인상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이달 13일(현지시각)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모니카 소재 '99센트상점'에서 장을 보고 있는 한 여성. 8월 미국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덜 하락하면서 미국 연방준비제도가 이달 큰 폭의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사진 AFP=연합뉴스


연준이 물가를 잡기 위해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있지만 한번 올라간 물가는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다. 연준은 물가급등을 잡기 위해 기준금리를 3월과 5월 6월 7월 등 4차례에 걸쳐 2.25%p 인상했다.

하지만 소비자물가(CPI)는 기대에 못미쳤다. 미국 대도시들의 물가를 보여주는 CPI는 6월 9.1%까지 치솟았다가 7월에 8.5%로 완화돼 정점을 찍고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8월 8.3%로 고작 0.2%p 낮아지는 데 그치자 회의론이 비등해졌다. 경제전문가들은 최소 8.0%로 내다봤으나 기대에 훨씬 못미쳤다.

이 때문에 연준은 더 빠르고 큰 폭으로 기준금리 인상을 지속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연준은 올 연말 기준금리를 당초 3.5%로 예상했다가 현재는 4%가 넘게 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물가를 잡겠다는 연준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거나, 달성하더라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고 부작용이 커질 전망이다.

문제는 기준금리를 4% 이상으로 올려도 연말 물가가 크게 낮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연준이 선호하는 개인소비지출(PCE) 물가는 현재 6.3%인데 연말에도 5.2%로 1%p 낮아지는 데 그칠 것으로 예상한다. 연준의 연말 CPI 예상수치는 7%대다.

연준이 물가잡기 힘든 이유

의회전문매체 '더힐'은 지난 16일 "연준이 물가잡기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유는 물가의 1/3을 차지하는 렌트비와 유틸리티비 등 주거비, 20%를 점유하는 교통비와 에너지비용, 15%를 차지하는 식료품 비용 중 통제할 수 없는 요인이 절반에 달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미국민 지출 가운데 32%를 차지하는 주거비의 경우 연준의 금리인상으로 주택모기지 이자율도 1년 만에 두배인 6% 이상으로 뛰었다. 주택거래에 찬물을 끼얹는 동시에 모기지 월상환금, 렌트비 등을 모두 올리고 있다. 물가는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으로 급등한다. 특히 미국의 집값 상승은 연준이 통제할 수 있는 수요가 과열됐다기보다 통제 범위 밖인 공급 부족 때문이다. 따라서 연준의 물가잡기가 오히려 역효과를 내고 있다는 분석이다.

휘발윳값은 6월 중순부터 석달 연속 급락해 1년 전에 비해 10.6% 하락했다. 덕분에 미국의 전반적인 물가가 다소 진정됐다. 하지만 CPI가 8월 0.2%p 낮아지는 데 그친 것은 주거비가 전년 대비 6.2%, 식품가격이 11.4%, 의료비가 5.6% 올랐기 때문이다. 이는 연준의 파격적인 금리인상도 물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는 주거비와 식품가격을 낮추는 데엔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따라서 연준의 손 밖에 놓인 국제분쟁에 따른 공급난 수송대란 공급부족 사태 등을 해결하지 않고서는 물가를 잡을 수 없다는 지적이 나온다. 결국 전문가들은 올 하반기와 내년 중반까지 4% 이상의 고금리를 지속한다고 해도 미국경제가 6~7%의 고물가로 고통받게 될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게다가 올해와 내년 미국경제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가 갈수록 낮아지고 있다. 연준은 올해와 내년에 미경제가 각 1.7%씩 성장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에 비해 골드만삭스는 17일 미국경제 성장률을 올해 0%, 내년 1.1%에 그칠 것이라고 하향조정했다.

세계은행 "내년 경기침체 빠진다"

세계은행은 16일 발표한 경제 분석보고서에서 "각국이 물가를 잡기 위해 올해 금리인상에 가속도를 내고 있으나 기대에 못미치고 있다"며 "고금리에 따른 수요와 투자의 냉각, 그에 따른 저성장을 이어가다 2023년에는 지구촌 전반이 리세션(경기침체)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세계은행은 "미 연준과 영국 유럽연합 캐나다 중앙은행 등이 공격적인 금리인상을 단행하고 있다"며 "올 연말에는 대체로 주요국의 기준금리가 4%를 넘게 되고 더 파격인상을 선택하는 경우 6%에 도달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또 4% 이상의 고금리가 2023년 내내 유지될 것으로 예상했다.

세계은행은 각국의 기준금리 인상에 따른 고금리에도 물가잡기는 기대에 못미쳐 올 연말 인플레이션(근원물가 인상률)이 5%대에 머물 것으로 우려했다. 근원물가가 5%라면 현재 8.3%인 소비자 물가가 연말 6%대 후반이나 7%대로 소폭 내려가는 데 그칠 것이라는 의미다. 세계은행은 내년 지구촌 경제성장률을 잘해야 0.5%, 자칫하면 마이너스 0.4%로 후퇴해 경기침체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물가 고금리 부담 때문에 소비자들의 씀씀이가 줄어들고 물건이 잘 안팔리니 기업들의 활동과 투자 고용이 위축되는 악순환에 빠지게 된다. 세계은행도 스테그플레이션을 경고한다.

데이비드 맬패스 세계은행 총재는 "세계 경제성장이 빠른 속도로 둔화하고 있으며 더 많은 국가가 경기침체에 빠지면서 성장이 더 떨어질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추세가 지속되면 신흥시장과 개발도상국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며 "각국 정책 입안자들이 소비감소보다는 추가 투자 및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을 포함해 생산 증대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인더미트 길 세계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6개월 전에는 경제성장이 둔화하면서 몇가지 품목의 물가가 잡히지 않으리라고 우려했으나 이제는 물가가 전반적으로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우려되고, 이는 지난 1970년대 중반과 그 이후 수십년에 걸친 나쁜 기억을 되새기게 한다"고 말했다.

워싱턴=한면택 특파원 hanmt@naeil.com